마리아의 노래
한국염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69년에 신학교에 가보니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여목사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력이 없어서 여성목사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건방지게도 내가 최초의 여목사가 되어야겠는 생각했었습니다. 제도에 막혀 여성이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왜 여자가 목사가 못되는지를 알아보았더니 세 가지 이유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남자니 여저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되어있고 여자가 가르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 때문었고, 셋째는 예수가 남자 제자만 선택했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예수의 제자가 남자뿐이기 때문이라면 예수의 제자는 유대인인데 그럼 왜 유대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한국남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여자에게 안수를 안주려고 별 이유를 다 끌어다 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아버지라서 여자가 목사가 못된다니,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화가 났습니다. 그나저나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는 들어왔는데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니 신학교에 계속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당시 여자로서 교수를 하시던 이우정 선생님을 보면서 “기왕 들어온 학교,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되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학교에 남았습니다. 그런 어느날 기장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여목사 안수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 말에 솔깃해서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이때부터 전국연합회사무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세계여성의 해”를 일년 앞 둔 해에 우리 교단에서 간신히 여목사제도가 통과되었는데 통과 이유 또한 어이없었습니다. 당시 우리 교단 헌법에는 목사 안수 조건으로 “30세 이상된 자”라는 자격규정이 있었는데, 이 ‘놈者’의 者를 사람으로 바꾸게 되었다. 사람으로 바꾸다 보니 이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로 해석해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목사 안수제도가 통과된 것은 교단 분위기가 바뀌어서 겠지만, 아무튼 그때까지 여자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나봅니다. 아무튼 여성안수제가 통과되자 기장 여교역자회에서는 준목고시 준비를 위한 교육을 실시했고, 양정신선생님을 제1호 목사님이 되게 하기 위해 후배들이 양목사님이 목사안수를 받을 때까지 안수를 미루는 자매애의 미덕을 발휘한 역사도 갖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교역자회가 끈끈하게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뭉쳐있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1974년 여성안수제가 통과된 이후 많은 여목사들이 교단에서 배출되었고, 여교역자들이 목회 현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여교역자를 청빙하기 꺼려해 안수받기가 바늘구멍만큼 좁고, 여교역자들의 지위는 매우낮고, 남성교역자들보다 차별받으며 목회하고 있는 것이 현장입니다. 여교역자회는 이렇게 차별받는 여교역자들의 보다 낳은 미래를 위한 꿈을 꾸며, 또 여교역자들이 연합해서 올바른 여성목회를 정립하고, 여성들간의 연대와 친교를 강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단의 조직입니다. 오늘 이 기장여교역자들의 유일한 연합조직인 기장여교역자회가 새로운 총무를 맞게 됨을 축하하면서 본문 말씀에 의거, 앞으로 기장여교역자회와 신임 총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보려고 합니다.
변혁의 힘을 준 마리아의 노래
오늘 읽은 누가복은 1장 46절 이하의 본문은 일명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립니다. 대학시절 저는 마리아의 찬가를 읽으면서 그 노래가 갖고 있는 엄청남 힘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마리의 노래는 제 여성목회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제 목회 비전은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삶에서 울려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여성목회의 비전을 여교역자회와 새로운 총무의 비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본문을 택하고, 모든 기장의 여교역들이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며, 이 노래가 기쁨으로 불려지는 교회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섰으면 하는 뜻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마리아의 노래’라고 정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이 노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마리아를 임신한 것을 알고 부른 노래로서 교회에서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함은..”하고 시작했다고 해서 ‘마그니피캇“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 노래는 한나가 젖을 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부른 사무엘상 1: 1-10을 모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탄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마리아는 당시 여성에게 씌워졌던, 아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조라는 굴레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해방의 새날을 노래합니다. 저주스러울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축복의 상황으로 변모시킵니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을 꺾으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시고,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며 부요한 자를 내치시며,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는 분입니다. 마리아는 이 노래에서 자신을 고난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동일시합니다. 구체적으로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성, 정치적으로 눌려 지내는 힘없는 백성,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이들의 해방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마리아의 노래 속에서 마리아는 여성의 행복을 일차적으로 선포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째 이유로 하나님께서 종처럼 천대받고 있는 자신이 모든 백성이 복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비천하게 여김을 받은 여성의 행복이 일차적이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인권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의 문제도 해결된다며, 여성문제를 뒤로 미룹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정의, 평등을 기반으로 한 평화문제에 가장 앞장서는 진보교단으로 이름나 있는 우리 교단에서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의 문제를 말하면서 교단에서의 성평등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평화문제를 말하면서도 교회에서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당하는 폭력이나 차별에 의해 받는 상처들은 문제로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 억눌린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말하지만, 여성이 행복해지고, 여성이 복된 존재가 되는 그런 세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여성의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말합니다. 억압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 여성의 구원이 우선되어야 함을,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이 일차적으로 들려 져야 할 기쁜 소식이라고 선포합니다.
마리아는 ‘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위치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비천한 여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의 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게 없습니다. 교단과 교회의 모든 결의권은 남성에게 독점되어 있고, 여성은 결정된 일을 수행하면 되는, 종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하는데, 그 주의 종이라고 하는 의미가 남성 목회자에게는 성직자로서 권위의 상징이 되는 반면에 여교역자에게 적용될 때는 글자그대로의 종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종으로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그 단적인 예로 소위 성직으로 분류되는 교역자들의 분포를 본다면, 전도사는 557명 중 남자 294명/ 여자 263명으로 거의 같은 비율입니다. . 그러나 남자전도사는 곧 준목이 되고 목사가 될 수 있는 반면 여전도사들은 전도사로 끝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성의 분포가 높다고 해서 여전도사의 수가 남자 전도사의 수와 같다는 것은 남녀평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의 현장을 드러내줍니다. 목사고시를 통과한 장차 목사가 될 준목의 경우 164명중 남자 준목이 116명이고 여자가 48명으로 30%, 목사의 경우 전체 목사 2,090명중 남자 1,884명에 여목사 126명으로 불과 6%에 불과합니다. 준목이 되면 목사안수를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여교역자가 준목이 되기도 어렵고 목사로 청빙받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런 현상은 여성안수 측면 뿐 만 아니라 교단에서의 여성참여현상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교단총회에서의 총대로 참여하던 여성참여율이 1/70에 불과하던 것을 양성평등위원회를 중심한 교단 여성들이 노력해서 간신히 총대 20명 이상되는 노회에서 여성목사와 여장로 각 1인씩을 총대로 선출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 그나마 총대 700명 중에 50명 정도의 여성총대들이 합니다. 참여하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는 교단이 아니라 남성이 결정해 놓은 것을 여성은 따르기만 하고 여성은 지도력이 안니라 보조자로 섬기는 일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당하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이런 불평등은 불의요,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죄악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 교단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우리 기장 여교역자들이 복된 존재로 자리매김 되는 그런 교단이 되었으면 합니다. . 여교역자회와 새로 된 이혜진 총무님이 우리 교단에 속한 여교역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일에 나서기를 바랍니다. 여교역자가 행복해지고 행복한 여교역자들이 교단 여신도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교회, 그런 교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라는 부르심에 예, 하고 목숨을 걸고 응답했듯이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 총무님과 함께 가장 일차적으로 행복한 여교역자, 행복한 여교역자회가 되는데 나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총무님이 행복해야 하는데, 이 일을 위해 여교역자회 회원들의 결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둘째로 저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장여교역자와 총무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노래한 다음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노해합니다. 기독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이 자비가 실현되도록 행동하는 일입니다. 솔직히 우리 기장 여교역자회는 언제부터인가 에큐메니칼 정신을 잃어버려 온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게 된 과정이 있지만, 이제는 과거를 단절하고 새롭게 에큐메니칼 정신을 회복해서 교회여성들과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 생명을 일구고 가꾸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여교역자는 교단의 지도자입니다. 지도자가 지도자 구실을 할 때 신도로부터 복된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여교역자들의 문제에만 관심하고, 힘이 없다, 역량이 없다 하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여신도들도 나서는 일에 여교역자는 주저 앉아 있다면,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잃게 될 것이며, 이런 이들이 모인 여교역자회는 하나의 친목단체에 불과해질 것입니다.
마리아가 새 세상을 위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라는 천사의 부탁에 처음에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고 주저했을 때,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결단한 마리아처럼, 여교역자들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나섭시다.
다음으로 여교역자들이 복된 자가 되고, 교단의 여성들이, 사회의 여성들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위한 연대의 중요성입니다. 저는 마리아의 노래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엘리자벳을 찾아갑니다. 북쪽 나사렛에서 남쪽 유다 산골에 있는 엘리자벳을 찾아갓다는 것은 마리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비록 자신이 임신한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라고는 하나, 요셉이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마리아에게 왜 고뇌가 없고,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서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입니다. 뜻밖에도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은 복받은 자다. 당신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위대한 분이고, 거룩한 아이다.” 하는 축복의 인사를 들려줍니다. 이런 엘리사벳의 격려를 받고 부른 노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의 노래입니다. 엘리사벳의 격려, 그것은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끼라의 연대입니다. 엘리사벳도 인간적으로는 상상못할 아이를 임신한 여성입니다. 마리아 역시 그렇습니다. 임산부인 엘리사벳이 같은 임산부인 마리아에게 해 주는 격려, 그 격려를 받고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는 연대와 자매정신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격려를 해주는 일,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 주는 일은 어떤 큰 일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기장 여성의 행복,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그 일을 하려는 여교역자들과 함께 하는 기장 여신도들의 지지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이 연대와 지지는 여교역자가 복된 자들이 되는데 큰 힘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입장이 다르고 삶의 자리가 다른 계층사이의 연대입니다. 마리아는나사렛에 사는 일개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부인입니다.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이렇게 삶의 자리가 다름에도 엘리자벳은 힘들어 찾아 온 마리아를 격려합니다. 마리아가 그랬듯이 새 날을 잉태하고 새날을 낳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입장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격려했듯이, 그 일을 통해 새날을 이루는 일에 힘을 주었듯이, 오늘 기장여교역자회가 하는 일에 우리 기장 남성들의 연대와 지지가 필요합니다. 교단의 격려와 지지는 앞으로 새 일을 이루려고 결단하는 여교역자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이런 형제자매애와 연대를 통해 변화가 일어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매애와 연대는 고난을 극복할 힘을 줍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연대하듯 연대성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찌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리아처럼, 저는 차별 받는 여성들이 여성들을 돌아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목숨을 걸고 결단해서 일어나는 여성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기장여교역자들이, 기장교회 여성들이 일어나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면서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받고 차별없이 사는 세상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의 교회에서 그나마 여성이 숨을 틀 수 가 있는 것은 선배여성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이 전해지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성들의 공헌과 노력을 전승하면서 여교역자들이 일어나 새 총무님과 함께 새 날을 낳을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기를 희망합니다. 이 헤진 목사님이 여교역자회 총무 되심을 축하합니다.
* 이 글은 2012년 기장여교역자회 이혜진 총무 취임식에서 한 설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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