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설교

여교역자들을 기억하라!

한국소금 2019. 3. 22. 20:30

여교역자들을 기억하라!

 

한국염/전 기장여교역자협의회 회장

 

역사학자요, 언론가요, 독립운동가인 단채 신채호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일설에 이 말은 신채호선생이 한 말이 아니라고도 한다), 이 말은 비단 민족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보면 여성의 역사는 아예 존재자체가 없거나 부정적으로 남겨져 있다. 이건 교회사에도 마찬가지다. 여교역자의 역사는 간데 없고 온통 남성 교역자들의 이야기로 교회사가 기록되었고, 남성인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여교역자들의 한 일과 공헌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되는 걸까? 역사라는 말 자체가 남성들의 이야기 History 이니 이제 여성들의 이야기 Herstory 를 새로운 역사의 이야기로 써야 한다. 교회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여성들의 교회사를 새로 써야 한다. 복음을 위해 기독여성이 한 일, 우리 여교역자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기념해야 한다.

 

그녀를 기억하라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저희에게 말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여인들의 이야기는 묻혀버리거나 왜곡되어 전해진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창세기 1장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전하면서 남자와 여자가 다같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전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자기의 동역자로 나와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여성들을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쓸 때는 사도나 하나님의 일꾼, 감독이라고 지칭하면서 여자는 그냥 일꾼이라고, 집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도 있을 수 없고, 모두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하는 말은 가르치지 않고 남자가 여자를 위해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하는 말만 가르친다. 가부장사회에서 남성들에게 편리한 대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여성들에게 좋은 이야기는 묻어버리거나 왜곡해 전해왔다. 이런 교회를 행해 예수님은 명령하신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을 전하고 기억하라!”. 우리는 잠시 여기서 기억하라라는 말에 대해 제대로 뜻을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기억이란 히브리 말의 어원은 그냥 과거를 회상하고 반성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결단하는 행동까지를 뜻한다고 한다. 히브리 민족이 유월절 행사를 통해 과거 자기 민족의 출애급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기억이라는 단어 속에서는 과거의 회상, 그 일의 의미, 새로운 결단을 하는 일련의 행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이 한 일을 기억하라고 한 말에는 여인이 예수님이 여인을 위해 한 행위를 회상하고 그 의미를 반추해보고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여인처럼 그렇게 하겠다는 결단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디딤돌 전도부인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이 한 일을 기억하라고 아무리 말씀하셨지만 교회는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않는다. 말씀으로 선포되지 않으니까 여성들도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기억해주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우리라도 이제 기억하는 일을 해보자. 성서 속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해석해서 기억하는 일을 시작해보자. 우리 여 교역자들이 가장 먼저 기억할 일은 우리가 새롭게 해석해주기를 기다리는 성서 속의 여성이야기와 더불어 우리 여교역자들의 이야기다.

우리가 우선 기억해야 할 여성들은 초창기 우리 한국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를 썼던 우리 선배 여교역자들인 전도부인들이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는 가부장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압제당하고 차별받으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도 남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하나다.‘라는 남자와 여자, 성의 구별없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교 전통의 가부장제 하에서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말 그대로 복음이었다. 이 복음에 접한 여성들은 성서를 읽기 위해 사경회를 통해 읽기 쓰기를 배웠고 이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전도부인이 되었다. 여성이 집 안에만 있지 않고 전도부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일반적 규범을 깨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마을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한 전도부인은 매를 맞으면서도 여자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주 예수님 안에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 복음을 버릴 수 없다며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것은 복음이 준 해방과 자유의 감격 때문이었다. 이런 전도부인이 지나간 곳에 새신자가 생겨났다. 얼마나 전도부인이 남녀유별한 집을 드나들며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했던지 한 여선교사는 한 전도부인을 가리켜 황금쥐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이 전도부인들의 역할과 공헌에 대해서 브라운 이라는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의 성공에는 전도부인의 노력이 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돕는 조력자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명실공히 한국교회 여신도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도부인들은 개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교회 여성들을 조직하고 성장을 도왔다. 이렇게 전도부인들이 조직한 교회의 여신도조직들을 기반으로 국제보상운동 등 일제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교회의 만세운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전도부인의 역할과 공헌은 묻혀버리고 교회가 커가면서 교회제도와 질서는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 가부장적 교회가 되어 버렸다. 전도부인들에 의해 해방과 자유로서의 복음을 맛보게 된 교회여성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성차별의 질곡 속에 다시 놓이게 되었다. 신학교가 생기고 여성들도 신학공부를 해 전도부인에서 전도사가 되었지만 여교역자들의 역할과 위치는 딱 거기까지였다. 오즉했으면 춘원 이광수가 1917년 청촌지에 금일 조선야소교의 결정이라는 글에서 제일은 금일 조선 예수교회는 계급적이외다.’라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목사와 장로를 비판했다. 사실상 남자만 목사와 장로가 될 수 있는 교회 제도에서 여성은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의 계급주의는 전도부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오죽 차별이 심했으면 1922년이 여전도사들이 남교역자들과의 불평등한 임금을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임금차별 뿐만 아니라 1930년 남녀 평등에 입각한 교회치리권과 운영권, 여장로와 여목사 안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이 시대부터 여교역자들의 지위행상과 평등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남성교역자와 장로들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 때문에 묵살되고 말았다.

한국초대교회의 디딤돌이 되었던 전도부인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여교역자들이 생각할 점 하나는 왜 이들이 각자 복음전도로만 그치지 않고 조직을 만들었나 하는 것이다. 교회여성들의 조직을 만들고 자기들의 조직을 만들어서 그 조직 틀 속에서 서로 뭉쳐서 민족을 위한 일,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활동을 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시가하는 바가 크다.

 

최덕지 목사와 여성안수

해방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 주에 경남노회 안에 들어가서 교회재건을 하자는 파와 안된다는 파가 달라졌다. 그때 재건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해 옥고를 치루었던 최덕지 전도사에게 공로를 인정해서 195143일 목사안수를 주기로 했다. 여성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최덕지 선생에게 주는 것이라고 목사안수 허락 이유를 밝혔다. 그러자 최덕지 전도사는 일서서서 오는 나 개인 최덕지에게 목사 안수한다면 안받겠습니다. 여자에게 성직을 줄 수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진리냐 아니냐, 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자 찬반토론 끝에 여성들도 성경에 따라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헌법에 여성안수권이 명시되었다. 이에 최덕지목사의 뒤를 이어 김영수그 김가숙 두 여성을 목사로 안수시켰다. 그러자 여성안수에 반대하는 파가 나오고 이러한 의견대립으로 지지파와 반대파가 분열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교회는 여장로와 여목사직을 여러 가지 이유로 번번히 기각하였다. 여성안수를 위해서는 분열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 우리가 전도부인들의 이야기를 살려내고 기억하려는 것은 당시 여교역자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공헌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교회를 향한 이들의 투쟁의 역사도 함께 기억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우리의 젖줄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초창기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었던 우리의 선배 전도부인들처럼 그렇게 복음을 향해 열정적인가? 복음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가? 복음의 본질인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가?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전도부인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아니다.

 

여교역자회를 기억하자

두 번째로 우리 여교역자들이 기억해야 하는 역사는 여교역자회에 대한 역사다. 우리가 여교역자회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기장 여교역자들이고, 기장여교역자회는 우리 회원들에 의해서 회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회원의 단체로서 우리의 고향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1954610일은 장로교가 분열되어 우리 교단이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탠생된 날이다. 교단이 분열되자 여전도회도 분열되었디. 김재준목사를 지지하는 6연합회 13인이 모여 강정애씨를 회장으로 선출했고 기장여전도회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출범한 기장 여전도회는 1950년대 교회내의 여성지위에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교단신학교인 한국신학대학에 여전도회 측 대표로 이사 한명을 파송하였고, 1957년 강정애, 이혜경, 김말봉씨가 장로 안수를 받았다.

 

기장여교역자회의 탄생

기장 여교역자회가 만들어진 것은 1956년으로 여전도사 김계성, 조정동, 조남순, 홍화숙, 김운자, 박명필, 정순원 등이 처음에는 여교역자의 친목을 위해 여전도사회를 조직하였다. 1957년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여전도사의 회원권을 청원하여 여전도회 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여전도회의 회원이 된 여전도사들은 여전도회 회장이면서 교단 부녀부장이던 강정애 회장을 통해 여목사제를 교단총회에 청원하였으나 부결되었다.

196711월에 전도사로서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총무이던 김영희 총무와 한신 여동문회장 강혜순씨가 여전도사회와 여동문회를 통합하여 여교역자협의회를 발족할 것을 제의해서 1967. 12. 7. 한국기독교장로회 여교역자협의회 발족을 12월 월례회에서 결의하고 마침내 1968. 1. 경동교회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김영희 전도사가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해 교단 제 45회 총회에서 서울노회의 여목사제 청원을 노회에서 수의키로 결의했으나 부결되었다. 그러나 여교역자협의회(회장 박성자전도사)는 포기하지 않고 여신도회전국연합회 제 34회 정기총회에 여목사제도를 교단총회에 청원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 청원은 해마다 이어졌다. 1971년 여신도회 전국연합회를 통해 여목사제도 재청원, 여장로의 총회 자동총대권, 여전도사의 당회참석권을 청원하였으나 역시 부결되었다.

 

여성목사안수제도 통과와 여교역자들의 연대

드디어 1974년 대망의 여목사 안수제도가 교단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세계여성의 해를 일년 앞두고 통과되었는데, 서울노회에서 헌의하였다. 이때 통과를 도와준 것이 총회 헌장 개정이었다. 헌장에서 목사자격을 35세 이상된 로 되어있던 것을 35세 이상된 사람으로 바꾸었고 이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속한다는 이유로 헌의를 해 통과되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여성목사 안수가 통과된 다음해 세계여성의 해인 1975년 여교역자협의회는 5. 26~27일베다니집에서 교회의 민주화를 위한 여교역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총회를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교회민주화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77년에 실시된 준목고시에 양정신, 김정희 두 전도사가 합격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합격한 데는 여교역자회의 공헌이 컸다. 목사안수제가 통과된 다음 여교역자회에서는 여성안수의 첫 단계인 준목고시 준비를 위해 강좌를 열었다. 안수를 받고자 하는 여전도사를 모으로 준목고시 시험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를 초방해 시험공부를 지원한 것이다. 그리고 양정신, 김정희 두 사람이 준목고시에 합격하자 당시 장로였던 양정신선생이 1호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아 김정희 목사가 안수를 미루고 양정신목사가 기장 여목사 1호가 되었다. 기장 여교역자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기장여교역자들의 자매애가 곷피는 좋은 본보기였다. 이렇게 기장 여교역자들은 여교역자회 안에서 서로 동지애를 키워가며 격려하고 지지하면서 힘을 키워갔다.

한편 이렇게 여성목사 안수제가 통과되고 여성목사들이 배출되면서 이미 1974. 7. 교단총회에 은퇴교역자 은급지급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여교역자협의회는 1983. 7. 여신도회전국연합회를 통해 여교역자의 위치 및 예우에 관해 교단 총회에 헌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여교역자의 위치와 예우란 여전도사 채용에 관한 헌법준수의 건 / 전도사의 청빙과 임기제도 개정의 건/ 최저봉급제 적용과 여교역자 대우의 건 / 교역자 명단에 여전도사 기재의 건 등이다. 여교역자들의 헌의는 계속  거부되었으나 여교역자들은  여교역자 처우개선의 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베다니집과 초대관장 이야기

1956년 총회에서 당시 여전도회 총무였던 이주선 총무의 간곡한 호소로 채택되었된 이후 여교역자 노후를 위한 사업추진위원회 구성한다. 19582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길리에 임야 13,830평을 639,359환에 매입해서 이 집 이름을 베다니집으로 명명하고 1958. 11. 24 . 베다니집 건축 설계도를 작성하고 제1차 건축비로 800만환 예산을 세우고 건축 기금으로 캐나다연합교회에서 500만환, 여신도 모금 1,362,550, 찬조금 1,563,900환 해서 모두 ,931,384환을 조성하였다. 1961711일 베다니집 낙성예배를 드렸다. 건물은 반부양관과 정양관으로 지어졌다. 19623월부터 현직 여교역자들이 베다니집에서 모임 가지기 시작, 해마다 총회를 베다니집에서 실시했다. 이때까지는 관장이 없이 여전도회가 사찰집사를 두고 베다니집을 관리했다. 한편 1963년 여전도사회에서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기금 모금을 결의해서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기금 681,245원 모금 중 서울시내 여교역자들이 196,995원을 헌금했다. 1972. 5. 초대관장으로 안계희 전도사 취임했다. 안계희 관장이 베다니집관장으로 취임하게 된 데는 여교역자들의 정의를 위한 분노와 연대정신이 빛을 발휘한 때문이다. 당시 안 관장은 모 교회 전도사로 있었는데 부당하게 해고가 되었다. 이에 분개한 여교역자협의회 회원들이 모여 안전도사를 베다니집 관장으로 부임시키기로 하고 1년간 인건비를 여교역자들이 부담하였다. 이후는 여신도회가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10월 헌금으로 베다니집을 운영하고 있다. 베다니집 관장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교역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결국 당사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을 통해서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기장여성연대 구성과 한 일

교단의 4개 여성단체들, 여신도회와 여교역자회, 여장로회, 한신여동문회가 기장여성연대라는 이름으로 모여 가부장적 교단을 성평등한 교회로 바꾸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교단의 여성정책과 교단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분석하고 양성평등 교단으로 가기 위한 대안들을 구체적으로 모색해 기장여성10년 달력을 만들었다. 또한 교단 총회에 대비해서 여성총대모임을 갖고 총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전략논의도 하고 총회장과 총무를 초청하여 기장여성연대가 제출하는 헌의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는 모임을 해마다 하고 있다.

 

한 일

- 교회와 사회위원회에 양성평등위원회 설치 헌의요청을 해서 2007년 교단총회에서 통과된 후 해마다 양성평등정립협의회를 갖고 논의한 사항을 양성평등위원회를 통해 교단에 교단의 양성평등에 대해 헌의

 

기장 여성들의 역할과 공헌, 활동과제에 대한 모색

성폭력 등 여성차별에 대처하는 정책수립과 추진에 관한 사항

여성신학에 관한 연구 및 교육 사항

5. 기장 에큐메니칼 여성지도력의 육성과 협력에 관한 사항

6. 생명평화적인 가치로 교단을 변화시키는 일

7. 양성평등 기장을 위한 조사연구사업

 

헌의하여 통과된 사항들

-교단신학교와 교단교육기관에서 양성평등교육을 의무화-인턴교육에서도

-2009 교단양성평등실태조사 헌의/ 2010년 조사 실태조사보고서 발행

-2010년 총대가 20인 이상인 노회에서 여성목사·, 여장로 1인을 총대로 선정/한국기독교장로회 양성평등을 위한 선언문-첫째 교단 기구의 여성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둘째 여성지도력의 재발과 활용에 대한 정책을 마련한다. 셋째 양성평등교육정책에 따라 양성평등교육을 필수적으로 실행한다.

2012년 모든 위원회에서 여성위원 1인이상 참여시킨다 통과

 

초교파여교역자 교류와 연대

이렇게 교회에서의 여교역자를 비롯한 교회여성의 지위를 위해 노력하던 여교역자회는 1972.116일 예장, 감리교, 천주교 등 초교파 여교역자 초청, “한국이 사는 길이라는 주제로 서울 경동교회에서 일일세미나를 개최하여 최초의 초교차여교역자 모임을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몇 년간 돌아가면서 초교파여교역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다가 197410월부터 한국교회여교역자연합회로 이름을 바꾸어서 교단간의 진교를 도모하며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위한 연대강화를 하고 있다.

 

대사회적 활동

이렇게 기장여교역자회는 교단이 양성평등으로 개혁되고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회협의회나 교회여성연합외,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에 회원단체로 참여하면서 사회변혁을 위한 활동도 전개하였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 성고문반대 대책활동, kbs 시청료거부운동, 여대생성추행반대운동 등/ 1986. 12. 가족법 개정 여성연합회에 가입, 가족법 개정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함(87.1.)/1988-1995 ‘95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 참가단체로 활동/ 북한어린이 돕기 교회여성연대 가입/1988-1998, 2000-2010 교회협 양성평등위원회 속에서 여성과 함께 하는 기독여성 10, 폭력극복을 위한 기독여성 10년 활동/ 1992년 구성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원단체로 활동

올해는 2013년 한국부산에서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 여성사전대회와 마당에 참여해서 활동하고 있다.

 

왜 여교역자들이 사회변혁을 위해 일하는가? 물론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기독교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성안수문제에서 보듯이 기장에서 여성목사안수제가 통과된 것은 세계여성의 해 흐름을 탄 덕을 본 것이다. 사회의 소리가 그만큼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치계가 여성할당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여성할당제를 요구하기 쉬워졌다. 세상이 평등해지면 그만큼 교회에서도 평등한 소리를 낼 수 있다. 교회 일이 아니라고 사회문제에 외면하거나 침묵하면 교회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틴 니믈러(히틀러에 저항했던 독일교회의 목사)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가톨릭 교도룰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햇다.

그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제까지 여교역자회의 역사와 역할 등을 간략하게 돌아보았다. 우리는 왜 여교역자회를 기억해야 하는가? 여교역자회는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여교역자 스스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친교로 시작했지만 바로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 여교역자회의 활동과 노력을 통하여 이마마 여교역자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여교역자회에 속한 선배 여교역자들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다. 여전히 가부장교회전통 속에서 종처럼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신학교 졸업할 때 파송찬송으로 부를 찬송이 부름받아 나선 이몸이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하는 찬송을 부를 때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남성목사와 장로가 지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여교역자와 여신도들이 지는 현장 때문에 분노가 치밀 때가 있다. 이런 분노를 여성신학자들은 거룩한 분노라고 하는데, 아무튼 여교역자회가 없었다면 여교역자들의 위해는 바로 이 노래처럼 되어 있을 것이다.

회원들 개개인의 힘으로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꾀할 수 없다. 모이면 힘이 모아지고 서로가 힘을 받아 더 큰 힘이 난다. 여교역자회가 강해질 수록 여교역자들의 지위가 향상된다. 여교역자들이 소리와 힘을 모아야 여교역자들이 원하는 성평등한 목회자리, 보수의 평등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과거 우리 선배들의 땀과 고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걸 기억하고 계승할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을 상기하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여교역자회와 우리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연대이야기- 새날을 위한 여성의 연대와 자매애

십자가와 무덤에 함께 했던 여인들-마리아의 다락방에 함께 했던 여인들

최덕지목사- 나혼자만 받으면 아니다. 여성에게 주어라!

혼자 꾸는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같이 꾸면 현실이 된다.

 

혼자 소리로는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겠네 둘의 소리로도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커단 함성될 때 저 어리석은 자 깨우칠 수 있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 둘의 힘으로도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강한 힘이 될 때 저 억눌린 사람 참 자유 얻겠네

 

이 글은 2013년 6월 3일 전북지역회 여교역자 교육모임에서 한 발ㅈ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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