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신학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른 하갈

한국소금 2019. 3. 22. 21:12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른 하갈

 

하갈 이야기

옛날에 두 여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주인이었고, 한 사람은 종이었다. 불행하게도 주인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직도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 자식을 낳아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아내는 얼마 전 남편에게서 하나님이 가업을 상속받을 자식을 주겠다고 하셨다는 환상을 보았고 또 음성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자식 갖는 것이 소원이었으면 그런 환상을 다 볼까? 이미 폐경이 된 아내 입장에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아내는 여종을 남편의 대를 이어줄 씨받이로 들여보낸다. 여종은 임신을 하고 나서 여주인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 여주인은 임신을 못하지만, 자신은 임신을 했다고 기세를 부린 것이다. 화가 난 여주인은 남편의 동의하에 종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여종은 견디다 못해 임신한 몸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고향 길을 향해 도망을 쳤다. 그 도망 길에서 여종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다. 그 천사는 여종에게 하나님은 네 고통을 살피고 계신다. 임신한 몸으로 사막을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네 뱃속의 아이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아이이니 안전을 위해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종은 자기를 살피시고 계신다는 것, 자기 뱃속의 아이를 축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천사의 권고대로 주인에게 돌아가 아들을 낳았고, 여주인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런데 여종의 아들이 태어난 지 13년 후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주인이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젖을 뗄 무렵 어느 날 여주인은 여종의 아들이 자기 아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이 동생을 데리고 논 것일 수도 있겠는데, 여주인의 눈에는 마치 여종의 아들이 자기 아들을 놀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여주인은 자기 아들과 종의 아들이 같이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게 화가 나서 남편에게 종과 종이 낳은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였다. 줏대 없는 남편은 비록 종이 낳은 아들이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달랑 물 한 병 들려서 내보낸다. 그래도 전보다는 달라진 것 하나는 있다. 전에는 그 여종은 도망친 노예 신분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유인이 되어 내 쫓겼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광야란 자칫 하면 죽을 수 있는 곳인데, 두 모자는 어머니의 고향을 향해 광야로 들어섰다. 한 낮이 지나 물병의 물이 다 떨어졌다. 여종은 아들이 목말라 죽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죽어가는 아이 옆에서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아이가 죽은 것을 차마 못 보겠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내 고통을 살피는 분이고, 내 아들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고 했는데, 이렇게 주려 죽는 우리 모자를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하는 원망과 하소연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여종과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다시 천사를 보내 두 모자를 샘물로 인도하였다. 천사의 지시로 주인의 집으로 돌아간 종과 아들은 주인이 아이를 낳자 쫒겨나 다시 그 광야에서 고통을 당한다. 이렇게 종과 그 아들이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펼치셨다. 마침내 두 모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힘을 얻어 어머니의 고향 근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위 이야기는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여종 하갈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이 본문은 두 여자의 갈등 이야기로 읽혀지면서 여성의 적은 여자다. 여성은 여성 편이 아니다. 여자는 시기와 질투가 많아 문제”, 라는 근거로 읽혀지고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이게 옳은 것인가? 이 상황에서 두 여성은 한 남자를 중심에 두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그런데 이게 옳은 것인가? 두 여성은 한 남자를 중심에 두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이런 갈등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한 남자에게 속해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라와 하갈은 모두 가부장제의 희생자들이다.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 씨받이를 두어서라도 대를 이어야 하는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문제지, 오히려 두 여자의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성들의 본질이 적대감이나 질투의 화신인양 매도하는 것 역시 가부장 사회의 책임회피일 뿐이다.

가부장 사회는 남성 중심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 끼리 경쟁을 시켜서 서로 간에 적대감을 조장하게 만든다. 목사님들의 말에 의하면 교회에서 장로를 뽑을 때 여자들이 여자를 안 찍고, 목사를 청빙할 때 여신도들이 여성 목사 청빙을 반대한다고 한다. 여성들이 여성의 적이라는 말이 교회에서 나온다. 여장로나 여목사의 위상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누가 여성이 여성의 적이 되게 만들었는가?

 

창세기 21장에는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이 사라와 아브라함에 의해 쫓겨난 이야기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갈을 내보내는데 찬성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라의 편이라는 뜻인가? 왜 하나님은 하갈을 내보내도록 허락했을까?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한 하갈은 그저 종일뿐이고 이스마엘은 종의 자식일 뿐이다. 그 집에 머물러서는 다른 삶을 살 수 없다. 하갈은 아브라함과 결별을 통해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생존의 위협과 죽을 위기를 겪는다. 하갈이 집을 나와 브엘세바의 광야에서 당한 고난은 자유를 향한 여정이 그리 쉽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 자유를 향한 고통을 통해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갈의 이야기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와 결별해야 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유의 여정을 떠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최초로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부른 하갈

 

하갈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증언하는 첫 기록은 아브라함이나 이삭 등의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놀랍게도 하갈이라고 하는 한 여종에게서 비롯된다.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다. “네가 고통가운데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천사의 말에 감격한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외치고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를 보시는 하나님, 살피시는 하나님 - 엘로이라고 지어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장소, 그 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고 이름 짓는다(16:13-14).

하갈이 만난 하나님, 하갈이 경험한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 살아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이를 지켜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 바로 고통당해 울부짖는 사람들의 편이시다.

 

그런데 하갈의 하나님 고백에서 우리가 인식해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른 맨 처음 사람이 바로 하갈이라는 점이다. 사람 축에도 끼지 못했던 여자가! 그것도 주인도 아닌 종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이건 엄청난 사건이다. 그리고 하갈이 지어 부른 엘로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야훼(여호와)라고 일러주기 전까지 하나님의 대명사가 되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외치신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원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맨 처음 지어 부른 사람은 바로 여성 하갈이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말할 때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그 이름을 지은 이가 하갈이라는 여성임은 말해지지 않는다. 하갈처럼 많은 중요한 여성들의 이름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전해져왔다.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무시된 채, 아담의 갈비뼈만 강조해 남성에 종속시키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현장에 함께 하고 첫 증인이 되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교회 전승에서 창녀였던 여성으로 묘사되어 깎아내려졌다.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사도행전 1212절에 분명히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밝혀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가의 다락방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울 서신 곳곳에서 여성이 자기의 동역자이며 자기와 같은 주의 종이라고 바울이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여성들은 사도가 아닌 보조자로 폄훼되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은폐되고 왜곡된 성서해석과 이를 기반으로 제정된 교리들로 인해 여성들이 교회에서 차별당해 왔다.

이제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새롭게 볼 때다. 여성의 눈으로 성서읽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해보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하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보시는 하나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지켜보시는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당신의 빛과 볕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잘못으로, 때로는 억울하게, 때로는 원하지 않게

사막과도 같은 고통의 심연 속에 떨어져 고통에서 도망치려할 때.

사막의 한복판에서 하갈을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를 만나주시옵소서.

우리 내면에 쌓인 분노와 불안과 절망을 들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여주옵소서...

고통스러운 일이 닥칠 때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는 당신이 계심을 알고

브엘라헤로이,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샘물을 마시며 힘을 내게 도와주소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당신을 만난 경험으로

당신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르며 당신을 믿는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게 우리를 이끌어주소서.

브엘라헤로이의 하나님을 경험한 우리가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한 브엘라헤로이가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