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설교

새 날을 잉태하는 기다림

한국소금 2019. 3. 23. 18:24

새 날을 잉태하는 기다림

 

어두운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고 합니다. 깊은 밤을 지나서야 새 날이 온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세상을 구원한 한 아기의 나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기 예수를 맞기 위해 한 달 동안 기다림의 기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맞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도 깊이가 달라질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사람을 애틋하게 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기다리는 존재의 의미가 내 가슴에 새로워집니다. 기다리는 동안 희망도 자랍니다. 기다리는 동안 인내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간절히 기다린다고 그 기다림의 답이 모두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이란 노래처럼 일출산에 해 뜨거든 행여 날 불러줄까, 월출산에 달이 뜨면 행여 날 불러줄까 하고 아무리 님을 기다려도 님은 오지 않고 애꿎은 벌레소리만 처량하게 들리는 것처럼 기다림 자체가 허망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님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을 포기하거나 멈출 수 없는 것은 기다리노라면 언젠가는 그 님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지만 간절함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하느니, 애를 끓이면서도 희망가운데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이런 인간의 기다림의 현실을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고목나무가 한 구루 서있는 황량한 길가에서 블라디미르라는 사람과 에스트라공 이라는 두 사람이 고도라는, 그들을 구원해 줄 고도라는 분이 내일 올 것이라는 럭키라는 한 소년의 말을 듣고 그 미지의 인물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고도는 매일 새로운 내일이 와도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끝없이 기다린 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두 주인공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과연 고도가 누구인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합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 기다려도 결코 오지 않는 그 고도는 신이라고도 하고, 유토피아라고도 하고,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매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렇지만 자신들을 구원해 줄 고도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 작품은 삶의 부조리와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끝없이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지만, 그래도 그 고통에 희망이 수반되는 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역설을 작품에서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또 인간의 삶이 끝없이 기다림으로만 설명되는 불합리성을 갖고 있지만, 이 기다림이 인간을 버티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본 그 연극에서 두 사람이 기다리는 고도는 끝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내일 고도가 온단다.’ 하는 럭키라는 소년의 말을 듣고 또 기다림을 시작합니다.

 

인간의 삶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려야만 하는 삶의 연속인지 모르겠습니다. “내일이면 다른 세상이 오겠지..” 이런 기다림으로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여러분은 기다리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떤 희망, 무엇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삽니까? 아니면 아예 희망이라는 것이 없습니까? 희망을 갖고 무엇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고 기다림을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성서는 우리에게 기다림에 대한 두 가지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다림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은 25장에는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는 모두 등불을 준비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등잔불이 다 타도록 신랑을 기다렸으나 기다리는 신랑이 오지 않아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신랑이 온다!“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섯 처녀의 등은 기름이 다 타버리고 불이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만이 신랑을 맞아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끝은 깨어있으라!“라는 말로 끝내고 있지만, 사실상 올바른 교훈은 준비하고 기다려라!’가 맞는 말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처럼, 기름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준비하는 사람들만이 기다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기다리던 무엇을 맞이할 수 있음을 성서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준비하며 기다리는 이들만이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서는 우리에게 기다리면 거기에는 응답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때가 차면 해산하는 것처럼,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이 온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맞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그 대상이 분명합니다. 그 대상은 아기 예수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이 땅을 구원해 줄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은총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오기까지 성서의 백성들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상으로 기다려 왔습니다. 민족이 적군에 짓밟혀서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암울한 입장에 처해 있을 때, 예언자 이사야는 한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이사야 9,2).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참고 기다려라! 어둠에 처해있는 백성 앞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징표로서 보여준 것이 바로 한 아기의 탄생계시었습니다.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약속을 믿고 5백년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나라가 적의 손에 넘어가고, 로마의 점령지 백성이 되었으며, 가난과 기근, 독재자와 종교지도자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어둠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포기할 법도 하련만, 어둠이 점점 깊어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은 간절히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만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기다림 속에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위해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라는 한 여성을 택해 새 날, 새 시대를 열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새 날을 열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마리아는. “저는 주의 종입니다. 당시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 지이다” (1: 38)하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 본인의 말대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고 의심이 갈 일이지만, 메시아 오기를 대망하는 민족의 염원 앞에 합리적이고, 불합리적인 것은 따지지 않고 자신이 도구로 부름 받았으니, 그에 응하겠다는, 목숨을 건 순종이요, 결단이었습니다. 결국 죽음을 각오한 마리아의 결단으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시는 구원의 역사, 새 날의 표징이 왜 하필, 아기의 임신과 해산으로 표현되는가? 그건 그 안에 기다림이 있고 꿈이 있고 준비하는 기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기를 열 달 동안 배에 품고 그 아기가 열 달 후에 태어날 날을 기다리며, 온갖 꿈을 꿉니다. 자기 뱃속의 아기에게 기대를 걸고 그 아기가 태어나 만들어 갈 새로운 세상, 행복한 삶을 그리며, 아기를 잘 낳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된 마리아는 뱃속의 아기에게 어떤 꿈을 꾸었습니까? 바로 누가복은 148절 이하의 마리아의 찬가에 나타난 그 세상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권력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다.“는 그런 세상을 아기에게 기대했습니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열달 동안 꿈을 품고 기다린 대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며,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은총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란 이런 은총의 해가 우리에게 임하는 날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기쁜 소식, 은총의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땅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힘겹게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외국인노동자들 중에서 여성이주자들이 더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 여성이주자들 중에서도 국제결혼중개업을 통해 국제 결혼한 이주여성들은 돈 주고 사온 상품 취급을 받으며 가정폭력과 인격모독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모르는 탓에 가족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고립되어 살아가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허덕대고 있습니다. 국제 결혼한 가정 52.9%가 최저빈곤층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국민들의 인종편견 때문에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야말로 인권사각지대에 놓여있어 자기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처년 전 마리아를 구원의 도구로 선택하신 하나님은 2006년 오늘 여러분을 세상을 구원할  어머니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죽임의 세상을 살림의 세상으로 만들 아기를 낳는 어머니,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아기의 어머니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새 날을 잉태할 어머니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새 날을 잉태할 어머니는 꼭 생물학적으로 여성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날에 대한 꿈, 소외된 이들이 살만한 그런 기쁜 세상이 오는데 관심하는 이들, 그런 이들은 모두 새 날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성을 초월하여 나이를 초월하여 모두 새 날을 잉태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속한 장로님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2006년 대림절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소외된 이들을 위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새 날을 잉태해 봅시다. 그 새날을 열기 위해 준비하며 해산할 날을 기다려 봅시다. 2006년에 메시야로 오신 아기를 기다리며, 우리도 한 큰 아이를 잉태하는 믿음의 해, 은총의 해를 맞이합시다.

 

이 글은 2006년 대림절 기간 기장 여장로회 모임에서 한 설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