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시대, 성서를 통해본 고향과 이주민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대표, 목사
1.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
1) 왜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 이주를 하는가?
이주민들이 싫어하는 물음 중의 하나가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냐?” 또는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하는 물음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후부터 나는 이주민을 만나면 “고향이 어디예요?” 하고 묻는다. 고향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태어난 곳”이라는 말의 뜻을 가르쳐 주면서. 그러면 이들은 “아, 나는 필리핀 사람이예요.‘라고 대답하거나 ”내 고향은 호치민예요.“라고 대답한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고향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뜻하는데, 나라보다는 고향이라는 말에 정감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처장이 유엔에 제출한 <이주의 새 시대를 위한 초기 로드맵 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일 년 이상 자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이주하는 사람들이 약 191백 만 명(2005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 6,470백만명의 약 3%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65-70%가 생계유지나 새로운 일자리의 추구 등 경제적 이유에서 이주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이주가 글로벌 시대의 한 현상이 되고 있는 가운에 한국의 경우도 2007년 12월 31일자로 거주 외국인 1,066,273명으로 1백만 명을 돌파했다. 이중 외국인노동자가 47.1%를 차지하고 있으며, 결혼이민자가 10.4%, 외국인 유학생이 5.7%다. 주민등록 인구의 2%시대에 돌입하였다. 이렇게 거주 외국인이 증가하는 가운데 노동자로 들어와 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 157개국이며, 국가 간의 쌍무협정에 의해 노동자로 입국하는 나라만도 15개국 이다.
이 거주 외국인의 증가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국제결혼 이주자의 증가다. 2005년에는 그해 국민결혼의 13.6%로 8명 중의 한 쌍, 2008년의 경우 11%로서 9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추세에 이르렀다. 127국가 여성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으며, 결혼이주여성이 1000명 이상 되는 나라만도 15개국이 넘는다. 이렇게 거주외국인의 일백만 명 시대 돌파, 특히 국제결혼 이주자의 급진적인 증가는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에 진입했다는 신호탄이 된 가운데 바야흐로 한국사회에 다문화 열풍이 불고 있다.
2)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의 한국살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 즉 이주민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한국을 제2 고향으로 삼고 있는 외국인 일백만 명의 시대에 접어들자 한국사회는 바야흐로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에 진입했다고 선언하면서 다문화사회 실현을 위한 각종 정책을 펴고 있다. 정부는 결혼이민자 등 정주 이민자의 출현을 우리 사회가 다문화 사회에 진입했다는 근거로 삼으면서 다문화 사회는 ‘민족적 문화적 다양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지난 2006년 4월 26일 국정과제 현안으로 제시된 “여성결혼이민자 가족의 사회통합 지원대책”과 외국인정책본부의 “재한 외국인기본정책”에서는 우리 사회가 이미 다문화사회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으며, 행정자치부의 외국인지원조례에서는 이주민을 우리 주민으로 설정하면서 “다문화 열린사회”를 말하고 있다. 정부가 열린 다문화사회를 비전으로 하는 각종 정책을 발표하자 한국사회는 과히 ’다문화 트렌드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문화범람시대‘를 맞고 있다.
그런데 과연 “열린 다문화 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다문화의 담지자인 이주민이 존중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다문화지상시대에 정작 다문화의 담지자인 결혼이민자들의 위상은 어떤가? 다문화의 주체로서 존중받고 있는가? 한국사회의 다문화열풍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을 원 고향으로 두고 있는 이주자들은 ‘단일민족’이라는 편견에 의한 외국인 혐오증과, 소위 선진국에서 온 사람과 후진국에서 온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중적 인종차별에 의한 인권침해에 부닥치고 있다. 여기에 이주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차별이 더해져 삼중의 인권침해를 겪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 인격모독, 성폭력, 가정폭력, 모성보호의 부재라는 인권침해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 여성이 결혼이라는 고리를 통해 한국에 올 경우, 이주여성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국제결혼중개업체의 인신매매성 알선과 한국인들의 편견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다.
다문화사회라고 하면서 정작 다문화의 담지자들의 인권은 무시되고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유엔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인종, 민족, 성, 국적, 종교, 사상 등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이주민들은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과 편견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몸에 쇠사슬을 묶고 절규한 이주노동자의 절규, 길을 묻는 방글라데시 노동자에게 15명 중 3명만 길을 가르쳐주었는데, 카나다 청년이 물었을 때는 15명 중 12명이 대답을 했다는 모 방송국의 실험에 나타난 ‘한국인의 이중성“, 버스 안에서 한 인도인을 ”더럽다“고 모멸적인 언사를 퍼부은 한 승객의 인종차별적 언어, ”당신과 나는 슬픕니다.“라는 편지를 써놓고 고향의 부모님께 돌아가려고 짐을 싸다 남편에게 맞아 갈빗대 18대가 부러져 죽은 베트남 여성 후안 마이, 정신질환이 있는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베트남여성 탓티황옥의 사건은 한국인들의 차별과 편견에 의해 발생한 이주여성 인권침해의 한 단면을 노출했을 뿐이다. 한국사회가 성숙한 다문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주민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보는 존중이 필요하다.
2008년 이주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이주노동자영화제”를 추진한 “미누”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이런 물음이 필요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이주민과 원주민(한국인)은 모두 지구라는 같은 별 아래 살고 있는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2. 우리 모두 이주민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본래의 고향을 떠나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자기 땅에서 함께 살고 있는,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을 돌보아주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정신이다.
우리 모두 자기의 본래적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거류하는 이주민이라는 사상은 일찍이 구약성서 구속사의 중요한 동기를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에서 들어가 햇곡식을 거두는 때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런 신앙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다.
" 우리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에 몸 붙여 살다가 거기에서 번성하여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여 괴롭게 하며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신명기 26:1-10)
성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고백을 통해 끊임없이 아브라함을 비롯한 자기 조상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었다는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이집트의 강제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해방노예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있다. 물론 이런 신앙고백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회상이 들어있다. 그런데 성서는 이렇게 조상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운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위사람과 너희 가운데서 사는 외국사람(나그네)과 함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와 너희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려라(11절)”. 하고 명령하신다. 비록 지금은 약속된 땅에서 살고 있지만 너희의 전신은 고향을 떠난 나그네, 떠돌이였다. 그러니 지금 너희 땅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즉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과 더불어서 잘 살라는 것이다. 더불어 살되 좋은 것으로 누리라 하신다. 외국인(나그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위인, 과부, 고아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4대 대상으로서 이들과 나누어 사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청하는 조건이었다(신명기 26:12-15). 이 신명기적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자기 본래의 고향을 떠나 떠돌던 나그네로서 남의 땅에 붙여 살던 이주민이었다. 따라서 같은 처지에 있던 나그네 이주민들을 좋은 것으로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한다. 우리 역시 지금은 한국이라는 땅에 살고 있지만 옛적 우리조상은 먼 중앙아시아에서 떠돌아 온 나그네로서 이땅에 정착한 사람들이며, 이런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지금 우리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이주민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앙적인 삶이다. 나그네 보호법(신명기 26:10-11, 19-22, 레위기 19: 9-10, 25;35)에 의하면 이주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펴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면 하나님이 나그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 책임을 물으심으로 나그네를 자기 민족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비유(마태복음 25장)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즉 나그네를 돌보는 것이 예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요, 반대로 나그네를 돌보지 않은 것이 곧 예수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라고 하시며 나그네 돌봄을 심판의 잣대로 삼고 있는 것도 위의 나그네 보호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나그네 보호 정신이 확대되어 갈라디아 3장 28절에서 차별금지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선포하고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금하고 있다. 이 사도 바울이 인용한 이 구절은 초대교회에서 세례 시에 고백하던 세례 고백문이었음을 안다면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비신앙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을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레위기 19,33).
이스라엘 백성이 나그네였던 처지를 생각하고 외국인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한 구약성서의 정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베드로전서 2장 11절은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께 권합니다.‘라고 함으로 아예 우리가 모두 이 땅에서 거류하고 있는 이주민이요, 나그네라고 선언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둔 시민으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하늘에 영원한 집을 둔 사람으로 잠시 땅에 있는 장막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고후 5,1).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두고 이 땅에 나그네로서 잠시 빌붙어 살고 있는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같은 나그네를 형제자매처럼 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연 우리는 과연 하늘나라에 본향을 두고 있는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이 글은 침례교 여선교회 월간지에 개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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