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한국의 이주여성과 교회여성

한국소금 2019. 3. 23. 18:20

9과 한국의 이주여성과 교회여성

 

준비: 다양한 색종이

1. 여러 가지 색종이를 예배드리는 중앙에 놓는다.

2. 중앙에서 마음에 드는 색 또는 좋아하는 색종이를 선택하고 왜 그 색깔을 선택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3. 옆의 사람과 자신들이 선택한 색을 같이 놓고 색의 조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4. 색종이를 중앙에 다시 모아놓고 다양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보자.

 

찬송

475 장 인류는 하나되게

여는 기도

창조주 하나님,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임을 망각하고 자기 나라를 떠나 이 땅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이주민들을 차별하고 무시함으로 당신의 형상을 무시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이주여성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들의 섬김과 보살핌을 통해 이들이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이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서본문: 룻기 22-13

 

말씀 나누기

 

세계화 시대에 일년에 지구 인구의 3%에 달하는 약 2억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동을 한다. 2009년 말로 한국에는 약 120만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47%이고 결혼이주여성들이 11%, 유학생이 7% 정도다. 157개국의 이주노오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고 127개국과 국제결혼을 하고 있다. 바야흐로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다문화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이 외국인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편견과 배타주의 때문에 힘들게 살아간다. 더욱이 해마다 우리 국민 결혼 중 10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상황이고 2050년이 되면 5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해 국민의 20%가 다문화가족을 이룬다고 한다. 물론 한국 가족의 이해와 배려로 잘 사는 결혼이주여성들도 있다. 그런데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 한국에 온 상당수의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인의 편견과 무시 때문에 힘들게 살아간다. 가뜩이나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가 달라 한국살이가 힘든데 인종차별과 가부장적 가족문화로 인권침해를 당하기도 한다. 통계에 의하면 40%에 달하는 이주여성들이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인격무시 때문에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을 위해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이주민이 존엄한 존재로서 존중받는 풍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그리스도인은 이주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이주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이며, 이주민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창세기 1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이 뜻하고 있는 바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유엔인권선언 제1조의 기초가 된 사상이다. 이 창조선언이 기독교인의 신념이 되도록 선포하여야 하며, 타인이 나와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성적, 문화적으로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차별하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죄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도둑질이나 강도질, 거짓말 하거나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것, 탐욕과 교만 같은 것만 죄라고 생각하고 이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창세기 126절에 근거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역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성령을 거슬리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갈라디아서 328절에 의하면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되어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됨을 지시하고 있다. 갈라디아 328절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성은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세례의식에서 행한 신앙고백문을 인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징표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갈라디아 328절의 말씀 즉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하는 신앙고백을 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교인이라면 초대교회의 전통처럼 이 말씀을 우리 신앙으로 고백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당신 안에서 하나이듯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주민을 차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종이나 자유인이 당신 안에서 하나이듯 잘 사는 나라 사람이나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사람이나 다 차별 없이 대하겠습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당신 안에서 하나이듯 우리의 이웃으로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을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겠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을 하고 그 신앙고백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주민을 돌보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의무다.

출애굽기, 레위기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약자보호법이 있고 그 약자보호법 가운데 나그네 보호법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법과 십일조 법, 첫 열매를 드리는 법을 통해 이주민 보호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 이삭 남기는 전통을 통해서 외국인 나그네의 생계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그 공동체에서 가장 힘이 없는 이주민, 과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이들의 보호와 하나님의 복은 서로 직결되어 있다. 약자 편에 서계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이들이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남겨놓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렇게 율법은 소외된 이주민을 보호할 것을 법으로 규정해 놓은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레위기 2535절에서는 가난한 동족을 돌보기를 나그네 돌보듯 하라는 말로 하나님이 이주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가난한 동족을 보호하듯이 이주민을 돌보아주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자기 동족을 이주민처럼 잘 대우하라고 할 정도로 이주민 대우가 약자보호의 이상형으로 나타나 있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을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3D업종이며, 한국인들의 떨어드린 이삭과 같은 일자리다. 약자를, 나그네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법 정신을 이해하고 이주민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한다.

 

2. 룻기에서 배우는 이주여성 사랑

룻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살이 이후 주전 5세기 중엽에 씌어진 작품이다. 룻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모압 여인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다가 나오미의 주선으로 보아스와 결혼한 여성이다. 룻기는 국제결혼에 배타적인 느헤미야나 에스라서와 달리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서로 평등하게 자유로이 사는 것이 올바른 공동체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룻기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거나 이방인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인종차별, 민족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주민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국제 결혼하여 우리 땅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을 어떻게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된다.

 

룻기는 이주민(국제결혼)에 대한 편견을 거부한다.

 

룻기는 이주민의 삶의 전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사람들이 왜 이주하는지, 이주노동자의 삶의 모습, 국제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사의 한 형태로서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에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다 함유되어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타민족과의 혼인은 일관되게 배타되거나 긍정된 것이 아니라 민족이 처한 상황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아무튼 룻기에서는 국제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발견할 수 없고 오히려 지지를 받고 있다. 나오미는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으며 그 며느리와 일심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보아스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 이방여인이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의 중심이 되는 다윗왕의 증조모가 된다. 나오미와 보아스의 이웃들도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격려한다. 룻이 아기를 낳자 이스라엘 사람은 룻의 행위를 그들의 옛 조상인 유다의 며느리로 유다의 부인이 된 다말의 행위에 견주어 축복한다.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반열에 세운 것이다.

현재 한국 땅에 많은 아시아의 여성들이 룻처럼 한국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다. 그런데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타적인 인종편견에 의해 국제결혼으로 이주한 여성들이 차별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룻이 다윗의 증조모, 나아가서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듯이 이 여성들도 우리 역사에 중요한 기둥으로 설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이주민에게 힘을 주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눔

룻이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에 나섰을 때 보아스는 이삭줍기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물을 마시도록 허용한다. 보아스는 이렇게 룻을 배려할 뿐만 아니라 식사 때가 되자 음식을 나누어 준다. 보아스가 룻을 함께 음식을 먹도록 초청했다는 것은 더 이상 룻이 타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한 공동체에 속한 일원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런 보아스의 배려에 대해 룻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는 한낱 이방여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이에 대해 보아스는 댁은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댁이 하나님의 날게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넉넉히 갚아주실 것이오.“

이주여성들은 보아스의 말처럼 부모와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사이로 왔다.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 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보아스의 말을 듣고 룻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힘을 얻습니다.” 룻의 말처럼 이주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일은 이주민에게 힘을 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도 바로 보아스가 했듯이 이주여성을 보살피고 배려하고 우리 이웃으로서 한 공동체 식구로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할 때 바로 룻의 고백처럼 당신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힘없는 우리가 큰 용기와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하는 이주여성들의 고백이 울릴 것이다. 룻기에 나타난 타민족에 대한 수용과 존중성, 보아스가 룻에게 한 나그네보호와 힘을 주는 행동을 그리스도인들이 실천에 옮겨야 한다.

사실 우리, 한국인 원주민과 이주민을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 의미도 없다. 베드로전서 211절에 보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두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이주민이기 때문이다.

 

마무리기도

하나님,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 우리는 때대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만 존중받으려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합니다. 이주여성들 입에서 당신들 때문에 용기를 얻습니다.”하는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이주여성을 우리 이웃으로 보살피고 배려하고자 결단하오니 주님, 우리를 격려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실천과제:

1. 함께 인종차별 금지 10계명 만들어보기

2. 이주여성을 초청해서 그들의 애로점을 들어보고 우리가 할 일 찾아보기

 

  이 글은 감리교여선교회 구역예배 교자에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