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일어나서 평화의 노래를 불러라
한국염
청암교회목사, 이주여성인권센터대표
지리산 생명평화의 기도 여정을 들어서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종교 다른 여성들이 모여 함께 생명 평화 위해 기도드리는 일!“
지리산에서 여성성직자들이 모여 생평, 평화, 민족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드리는데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불자 수지행님의 부탁을 받고 그러마고 쉽게 승낙을 했다. 우선 지리산이라는 말, 여성교직자들이 모인다는 것, 생명 평화기도회를 드린다는 말이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나는 여기서 여성성직자 대신 교직자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는데, 나 자신 목사이지만 종교에서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가른다는 것,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한다는게 위계질서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다른 여성들과 한 자리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2000년 한국에서 열린 아셈 회의가 열렸을 때 민간아셈회의가 있었다. 그때 종교분과가 “세계화와 영성”이라는 주제로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종교의 영성을 다루는 세미나를 계획하였다. 그때 준비 모임에서 제시된 프로그램을 보고 한마디 쓴 소리를 했다. 그 프로그램에 여성의 자리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계화의 한 복판에서 신자본주의에 의한 “빈곤의 여성화”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이 여성인데, 또 성차별적인 종교 속에서 여성의 영성이 메말라가고 있는데 종교분과가 영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여성을 소외시키고 있으니 이런 모임에 여성들이 참여한다고 해보아야 들러리밖에 더되겠느냐? 이런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종교 분과 안에 여성 팀이 꾸려지게 되었고, 문제제기를 한 죄로 내가 그 팀을 인도하게 되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여성들로 종교 여성팀이 꾸려져 종교 여성의 문제를 갖고 워크숍을 하고 대회에서 발표를 하였다. 이 종교분과의 절정은 여성예식이었고, 감동적인 예배였다고 참여자들이 입을 모았다. 이 예식에는 천도교 여성들도 참여해서 5개 종단 여성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 예배는 성직자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종교 여성 엔지오들이 모인 것이었고, 이를 계기로 호주제 폐지 종교여성연대가 결성되어 행진과 심포지엄을 갖기도 하였다.
참여 의사를 밝히자 수지행씨가 메일을 보내왔는데, 그 메일에 실린 평화기도문 내용이 좋았다. ”세끼 밥 굶지 않고/ 나 혼자 등 따뜻하다고 평화가 아닙니다./지붕에 비 안 새고/바람들이지 않는다고 평화가 아닙니다.“ 로 시작해서 ”생명 평화 민족화해 통일의 그날 크게 한번 울게 하소서.”로 끝나는 평화기도문을 읽으면서 지리산 평화 기도회의 실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8월에 지리산 생명평화결사를 시작하면서 드린 기도문이라고 한다. 그 평화의 기도를 우리 교회의 예배를 위한 공동기도문으로 실어 함께 기도드리고 교회협의회 환경주일에 드렸던 기도문을 손질해서 개신교 기도문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내 지리산 생명과 평화를 위한 기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주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거짓으로부터 진실로,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두려움으로부터 신뢰로 이끄소서.
주님 우리를 미움으로부터 사랑으로, 전쟁으로부터 평화로 이끄소서.
어머니 지리산과 평화를 향한 염원
왜 지리산에서 드리는 평화의 기도에 관심하게 되었는가? 그건 지리산이 갖고 있는 신화적, 역사적, 지리적 의미와 상징성 때문이다. 지리산은 지리적으로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품고 있는 하나됨의 산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질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지역감정이 지리산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자락은 달라도 몸체는 하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지리산은 분단의 뼈아픈 상처가 배어있는 그런 산이다. 지리산 속에서, 지리산 기슭에서 한민족이 빨치산과 토벌대가 원수로서 총을 겨누고 서로 죽고 죽였고, 그 후손들에게 짙은 앙금을 남겨 서로 증오를 안고 살아가게 하는, 그래서 누구보다도 화해가 일어나야 하는 그런 곳이다.
신화적으로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다. 지리산의 산신은 ‘천왕 성모’로 불리우고 있는 어머니 신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여신학자협의회에서 한 여신상 연구에 의하면 이 지리산 성모신은 단순한 산신이 아니라 창조신으로서 자신이 창조 이후의 생명들을 섭리하고 품어내는 위대한 신이다. 이 성모신은 민중들에게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창조주 신일뿐만 아니라 원한을 풀어주는 해원의 신이기도 했다. 이 어머니 산인 지리산에서 종교의 어머니 위치에 있는 여성성직자들이 모여 어머니의 영성으로 생명과 평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결심을 다져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모임이라고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란 여성의 역할을 낳고 기르는 것으로 한정해서 성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그래서 모성이데오로기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생물학적 모성이 아니라 사회학적 모성을 뜻한다. 실제로 모인 사람들은 개신교 성직자들을 빼놓고는 원불교 교무님, 불교 스님, 가톨릭 수녀님들 모두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성직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 교직자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생명과 평화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지리산에서 모여 생명평화와 민족화해의 문을 여는 기도회를 했다는 것은 한국 종교사적으로, 통일운동사적으로, 그리고 세계 평화운동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거창하게 의미부여를 했지만, 실상 이번 기도회에 개신교의 참여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뿐 극히 미약했다. 초청인으로 되어 있는 나 자신도 불과 일주일 전에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내고 모임을 추동해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산에서 기도회를 한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참석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엄청난 준비가 있었다. 다른 종단의 성직자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왔다. 원불교의 법복, 불교의 가사가 엄청난 위엄이 있었다. 수녀님들은 예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수녀복 자체가 예복이라 문제가 없는데, 정보를 받지 못한 우리 개신교 참여자들은 성직자 가운을 갖고 오지 않았다. 기도를 드리는 장소가 다만 지리산일 뿐이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임한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성직자 가운이 너무 권위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교회 예식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가운을 입지 않는 내 고집 때문이기도 한데, 종단의 힘을 결집할 때는 예복이 갖는 효과가 큰 것 같다. 시위현장에서도 수녀님들의 복색은 티가 나는데, 개신교 목회자는 참여해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활한복 스타일로 우리 교단 여성 목회자의 옷을 통일할까 하는 구상 중에 있었는데, 아무튼 이번 기도회를 통해 그 결심이 굳혀졌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의 만남 속에 넘치다.
기도회를 시작하는 오후 5시, 노고단에는 햇볕이 비켜가기 시작했다. 산 정상이라 찬 바람이 으스스 몸이 떨렸다. 춥고 떨리는 것을 참으면서 평화란, 생명을 지키는 것이란 자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그 작은 고통을 통해서도 얻으면서 내 생명과 평화의 감수성이 얼마나 작은지 몸으로 느꼈다. 서로 다른 기도문, 그러나 내용은 여성교직자들이 나서서 생명과 평화, 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을 들으며, 우리가 오는 한 뜻, 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이 땅의 종교 지도자들이 평화를 위해 한목소리를 낼 수 없는가, 또 교리를 넘어 하나가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기도회를 드리면서 언뜻 우리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노고단을 오르는 길목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스님 앞에서 불교 믿으면 천당 못 간다고 악을 써대던 한 전도자의 모습이었다. 정말로 그 스님께 면구스럽고, 창피하였다. “불교야 불교의 구원받으면 되지 그분들이 왜 기독교의 천국을 가야 합니까?” 하고 한 마디 하고 말았지만, 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것만 옳다고 하는가?
각 종단들의 애절한 기원, 수녀님들과 원불교 어린이 합창단의 맑고 밝은 노래를 들으며 추워 떨리는 손으로 잔잔한 감동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다. 각 종단의 축도를 끝내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를 평화, 생명, 화해라는 말로 노랫말을 바꾸어 부르면서 우리 안에서 번져 나가는 화해와 평화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기도회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은 이미 어둠이 짙어졌다. 그 길을 내려 오면서 문득 사사기 5장에 나오는 드보라의 노래가 생각이 났다. “드보라여, 일어날지어다. 노래할지어다.!” 드보라는 왕이 없던 시절 이스라엘의 사사였다. 그는 가나안 왕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야엘이라는 여자와 더불어 가나안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 온 사람이다. 드보라와 야엘이 군대장관을 죽인 이야기를 놓고 여자들도 폭력적이기는 매 한가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여자, 즉 여성지도자와 한 주부의 연대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멸족되는 더 큰 폭력을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적군을 물리치고 나서 드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드보라는 이 노래에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로 표현한다.
나 드보라가 일어나기가지,
이스라엘의 어머니인 내가 일어나기까지,
이스라엘 촌읍들은 죽어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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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야 떨쳐 일어나라.일어나라
일어나 노래를 불러라--
이렇게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민족의 운명을 보면서 떨쳐 일어나 민족을 구한 드보라! 그 반대편에는 “ 왜 이렇게 병거가 늦느냐? 틀림없이 약탈한 것을 모아 나누겠지! 내 몫으로는 수놓은 목도리 하나 또는 둘,” 하고 전리품을 갖고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는 군대장관 시스라의 어머니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의 눈에는 죽어가는 생명은 보이지 않는가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생각하면서 파병을 외치는 어느 개신교의 집단 모습, 죽어가는 생명들에 대한 관심이 없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군대를 파병하려는 사람들, 개발논리로 생명이 깃드는 산하를 마구 파헤치는 사람들의 죽어버린 평화 감수성을 보면서, 삼보일배가 갖고 있는 생명에 대한 가치를 보지 못하고, 교리로만 잣대를 들여대 이단 시비를 하고 있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들이 꼭 시스라의 어머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때, 여성교직자들이 모여 한 마음 한 목소리로 평화를 기원하고 살림의 문화를 일구어가겠다고 다짐하는 여성교직자들의 기도회는 드보라가 노래하듯 종교의 어머니들의 일어섬이요, 깨우침이요, 노래다.
종교 여성들이여 일어나라 떨쳐 일어나라
이 땅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노래를 불러라
생명을 우선으로 보는 어머니 지리산의 눈,
대립하는 자식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지리산의 마음으로,
생명을 보듬어 안는 지리산의 가슴으로 일어나라
그리고 생명과 평화를 노래하여라
이 글은 2002년 지리산 살리기 종교여성모임에 참석하고서 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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