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설교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어라(세월호 부모와 함께 하는 설교)

한국소금 2019. 3. 24. 01:07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어라.

누가복음 7: 11-16

 

우리는 지난주에 부활주일을 지냈습니다. 부활절을 지낸 지 얼마 안 되는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해서 부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이 많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로서 예수님께서 나인 성에 살고 있는 과부의 외아들을 살렸다는 이야기인데 이 예수님이 베프신 기적의 이야기로 읽혀져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세월호 1주기, 세월호 정국 앞에서 부활의 이야기로 읽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무대는 나인이라는 성입니다. 성서 기자는 그냥 나인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인이라는 성이라고 성의 이름을 강조합니다. 나인이란 이름은 귀여운, 사랑스러운, 아름답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에드론 편원이 내려다 보이는 성으로 북왕국의 왕들이 도시 방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호를 파서 해자 시스탬으로 왕궁을 보호하는 그런 곳입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도시, 해자가 둘러 싼 안전한 도시, 그런 곳이 바로 나인성입니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그런 곳입니다. 아름답다고, 안전하다고 하는 하는 이런 성에서 안녕하지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이가. 바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안전하라고 해자까지 파서 보호하는 그런 성에서 외아들을 잃은 비참한 과부, 그 대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성서에서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보아야 할 세 부류 중 하나입니다. 과부, 고아, 나그네. 과부라는 단어만 해도 처지가 딱한데 거기에 이 과부는 아들, 그것도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 인간으로서 가장 처절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 과부에게 있어 외아들은 그냥 아들이 아니라 자기 삶의 전부였습니다. 어릴 때는 삶의 낙이었고, 앞으로는 자기의 미래입니다.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비통해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과부의 외아들 상여를 따랐습니다. 세상 상식으로 보면 힘없고 빽없는 과부 아들의 죽음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를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상여 뒤를 따랐다고 강조합니다. 젊은 이의 죽음이 안타깝고 과부의 아픔이 안타가와서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은 그 고통과 아픔에 개입하십니다. 그 어미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며 관에 손을 댑니다. 관이 멈추자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일어나거라. 죽은 이가 일어나자 예수님은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성서는 이 기적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오늘 성서의 말씀에 의하면 죽은 자식을 살려 어머니에게 돌려보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시는 징표입니다. 이 표징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들, 딸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세월호 부모들과 진상규명과 안전한 사회를 촉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첫 째 과부 외아들의 상여를 따르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처럼 슬픔당하는 이의 고통에 함께 연대하는 행렬이 중요합니다. 이런 연대의 행렬이 있는 곳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상여에 손을 대신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시체가 있는 상여는 부정한 것이라 해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금기를 깨뜨리셨습니다. 금기에도 관에 손을 대신 예수님처럼 살림, 생명을 살리는 일은 금기를 깨는 데서 시작합니다. 금기를 깨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길, 부활의 길로 이어집니다.

 

셋째, 예수님은 상여 뒤를 따르는 어머니를 보시고 가엽게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가엽게 여기다.” 라는 말은 단순한 동정의 뜻이나 연민의 뜻이 아니라 함께 아픔을 느끼는 그런 말입니다. 가엽게 여기다라는 말,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의 어원은 히브리말로 라민이라고 합니다. 라민이란 말의 근원적인 뜻은 자궁이 떨린다.”는 뜻입니다. 성서에서 이 말은 예레미야서 31:15절에 보면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여기서 비통하다는 말은 열왕기 3:26에서 솔로몬이 아기를 칼로 잘라 나누려고 하자 친 어머니가 모성애가 불타올라, 아이를 향한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뜻으로, 자궁이 떨린다는 뜻입니다. 애간장이 녹는다는 표현보다 더 절실한 표현이지요. 자궁이란 생명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자궁에 담긴 생명 때문에 애타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과부를 보시며 느낀 마음입니다. 금쪽같은 자식을 잃은 어미를 향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일어나거라!”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이런 예수님의 간절함에 죽은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야기라면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지 않고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아들은 어머니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자식을 돌려보내는 것! 이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징표라고 성서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조금 있으면 세월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세월호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본문에 나오는 과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머니가 지금 울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에게 울음을 멈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죽은 아이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적을 일으킬 예수님도 없는데 어떻게 죽은 아이가 살아올 수 있습니까? 세월호가족에게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자식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그 진상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세월호를 인양해서 아직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진실을 규명하고 그에 의해서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게 죽은 아이를 살려 부모에게 돌려주는 길입니다.

 

죽은 아이를 살려 부모에게 돌려보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과부 외아들의 상여를 따른 사람들처럼 세월호 가족이 걷는 그 길에 함께 따르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고통의 현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통의 현장에 함께 해야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에 연대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곳에 부활사건이 생기고 변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하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금기를 깨야 합니다. 금기를 깨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성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이들을 살립니다. 그로 인해서 출애급 사건이 가능해졌습니다. 라합은 낯선이가 오면 신고하라는 여리고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탐꾼을 살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게 합니다. 에스터는 왕의 허락이 없으면 왕앞에 나갈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나가서 자기 민족을 구원합니다. 금기를 깰 때 구원의 역사, 해방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월호를 인양하지않고 진상규명을 은폐하려는 집권자들의 금기에 아니요! 하고 몸으로 항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을 말로만 살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몸으로 금기를 깨셨습니다. 관을 만지는 일!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도 이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기도, 금기를 깨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처한 곳곳에서 올바른 진상규명과 세월호 인양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다음으로 예수님이 가지셨던 마음처럼 자식을 잃은 어미를 향한 애타는 마음, 생명에 대한 감수성으로, 자궁이 떨림을 알 정도로 같이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월호 가족과 같이 애통하는 마음, 절실한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세월호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진상규명을 할 수 있습니다. 애탐 없는 외침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자궁이 떨리는 애탐이 있어야 아이를 살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살아난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냥 아들만 살리면 되는데 성서는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은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상규명을 통해 세월호에 묻힌 아이, 세월호에서 죽임을 달린 아이들을 살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부모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려줄 수 있습니까? 살아 돌아 온 아들을 보고 과부가 안도감, 안전감을 느끼듯이 한국사회가 안심하고 살수 있는 안전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배가 인양되고 진상규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을 기본으로 다시는 세월호 같은 사건이 나지 않도록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사회가 안전한 사회가 되는 것을 보며 세월호 부모들이 자식을 가슴에 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월호 가족이 바라는 것이고 자식을 부모의 품에 돌려보내는 일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맞을 부활의 기쁨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다시 살아나는 세월호 아이들의 부활소식입니다.

 

말씀을 끝내면서 저는 세월호 가족들과 그 가족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는 여러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예레미야서 31: 16절에서 자식을 잃고 우는 라헬에게 들려주시는 야훼의 말씀입니다.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 딸들이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 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

 

이 말씀이 세월호 실종자가족과 유가족,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모든 분께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이 설교문은 201548일 한신대 신대원 누리보듬 여학생화 주관으로 드린 예배에서 한 설교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