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여성의 고난에 대한 성서적 조명과 응답
한국염(한국여신학자협의회 총무)
1. 들어가는 말
‘여성들의 신학하기’에는 여성의 고난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이 중요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한 기지촌 여인의 삶을 소개하는 글로 ‘기지촌 여성 윤금이를 기억하며’라는 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편은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성서의 시편을 여성의 이야기로 바꾸어 ‘한반도에서 다시 살아나는 여성 시편’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 중에서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목록 중의 한 편이다. 내가 이 시편을 글의 처음에 소개하는 배경에는 여신학자협의회가 ‘윤금이사건공동대책위원회’에 가담해서 이 문제를 위해 싸운 것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그 후 ‘윤금이’는 송정숙 여인과 함께 기지촌 여인의 삶을 대변하는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하는 한 편의 시편에는 기지촌 여성의 삶과 고난과 한이 묻어 있고 우리가 할 과제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 기지촌 여성 윤금이를 기억하며*
1. 하나님, 내가 탄식할 때에
내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제 이름은 윤금이,
남들은 ‘기지촌 여성’ 이라고 부르지요.
2. 하나님, 어쩔 수 없이
미국병사들의 성 노예가 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우리가 탄식할 때에, 우리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험악한 미군 병사들의 성폭력의 위협에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하고
언제나 기도했지요
3. 칼날처럼 날카로운 가난 때문에
우리는 도시의 가내 수공업 공장에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오라비, 남동생 공부시키려고 열심히 일 했지요.
그러나 나를 쏘려고 몰래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나를 짓밟은 남성들은 거리낌이 없는데
나는 순결을 잃었다 외면 당한 채
공장일 보다 더 나은 밥벌이를 찾아서,
병든 아버지의 약값을 위해,
나만 바라보고 사시는 어머니께 매달 보낼 생계비를 위해,
동두천 미군기지촌에 흘러들어 왔지요.
4. 미군과 한국정부가 모의하여 만든 동두천 기지촌,
외인부대에 내 던져진
성 노예의 희생물이 되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처절하게 살고 있는 신세들
돈 몇 푼에 험악한 노랑머리 사내들의 성 노예가 되는 것도 모자라
대한국민으로서 보호와 안전도 받지 못한 채
미군들의 전용나이트 클럽 호스테스로
딸라 몇 푼 쥐어주는 미군들 속에서
웃음과 몸을 팔아 푼돈 모아 불쌍한 어머니에게 보내야지!
5. 그들이 내 몸에 거리낌없이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 칩니다.
“누가 우리를 막으랴?”
1992년 10월 28일, 케네스 마이클이란 미국병사가
성을 팔아 생존하는 피곤에 지친 이 연약한 몸에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짓거리를 해 나는 순식간에 쓰러졌지요.
아, 그의 행악으로 나는 죽임을 당했고
사냥개에게 물린 동물처럼 시신마저
콜라병과 우산대가 꽂혀지고,
가루비누 뿌려져 차마 볼 수가 없구나!
나의 영혼도 차마 처참한
내 시신 위를 떠나지 못했었지.
6. 나의 찢김은 나를 낳으신 어머니의 찢김이요
내 몸의 이 끔찍한 파괴는 내 형상을 지닌
하늘과 땅의 모든 이들의 파괴요
여성을 짓밟는 죄악이요
여자를 만드신 어머니 하나님을 짓밟는 행악이라.
이렇게 악을 꾀하는데도
우리 정부는 잠잠하니 참으로 알 수 없네요.
7. 윤금이 살해대책협의회가 뿌린 성명서에 실린
내 처참한 시신은 부끄럽게도,
아주 낯선 외인이 되어 내 나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머문
서울 역 땅 바닥에,
시골의 어린 내가 처음 발 내린 서울역 그곳에,
대학교 교정의 나와 동갑 짜리 학생들 속에
나는 그렇게 누워있고 벽에 수없이 부쳐있었네 ,
하나님께서 쏘신 화살 맞은 시체처럼
그렇게 쓰러져 있었네
8. 자 보아라! 의로우신 하나님이 활을 쏘실 것이니,
그들이 화살을 맞고서 순식간에 쓰러질 것이다.
법정에 내 처참한 시신이 누워서
우리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주장하게 되었네
드디어 나의 죽음은
주한미군범죄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불평등한 한미행정법 개정을 주장한다네
대법원에서 범인 마이클이 15년 징역을 선고받고,
벌금 몇 푼을 선고받던 날
마이클의 부모는 아들의 형벌에 머리를 떨구고
불쌍한 내 어머니는 땅을 치고 통곡하네
“아이고 내 딸 어쩔거나! 불쌍해서 어쩔거나!”
9. 이 땅의 여성들, 젊은이들은
용산 미 팔군 정문 앞에서 매주 금요일 정오만 되면 외쳐대네.
“미군은 이 땅에서 떠나거라!”
“한미행정법을 개정하라!”
내 죽음이 불씨가 되어
미군이 이 땅에서 사그리 사라질 때까지
나는 처참한 내 시신 옆을 떠 날 수가 없네
오 젊은 친구들이여 ! 여성들이여!
가엾은 나를 위해 울어주고
내 기지촌 친구들을 위해 울어다오! 다시는
이 땅위에서 미군이 주둔하여 행악을 부리지 않도록….
그 날에 하나님은, 그들의 행악을 보시고,
그들을 멸하실 것이니,
이것을 보는 자마다 도망 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10. 억눌린 민족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하나님께로 피할 것이나,
힘센 나라들, 강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이다.
2. 성서에 나타난 매춘
기지촌 여성이란 “미군이 주둔하는 기지 주변에서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여성”을 말한다. 이러한 기지촌 매춘 여성의 문제는 노동문제, 농촌문제, 빈민문제, 여성문제에 분단의 문제가 더해진 형태다. 성서는 이러한 기지촌 여성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성서에서 기지촌 여성을 읽으려고 할 경우 기지촌은 매춘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성서가 매춘을 어떻게 보는지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성서에서는 매춘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조나’라는 말로 표현되는, 돈을 벌기 위한 세속적 매춘이고 다른 하나는 ‘케데사’라는 말로 표현되는 종교 제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매춘이다.
2-1구약에 있어서 매춘 이해
2-1-1 제의적 매춘
고대 오리엔트에 있어서 매춘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당시 여성의 직업은 일반적으로 무녀, 숙박업소를 겸한 술집 여자와 매춘, 이렇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졌는데 포도주를 파는 여자나 선술집 여주인 역시 매춘부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자의 직업은 결국 무녀나 매춘부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무녀는 신에게 바쳐진 여성을 말하는데, 이 처녀 무녀들과 함께 신전에서 일하는 사원 창부들이 있었다. 이 신전 창부들은 도시 국가의 수호신들에게 봉사하는 여인들로 신의 대리자인 국가의 지배자나 제사장과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대지의 순환을 상징으로 재현했다. 이 제의적 매춘은 농경시대에 풍요를 기원하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종교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생식이나 결실 등이 신적 능력으로 숭상되었으며 성과 생식을 관장하는 신들이 숭배를 받았다. 특별히 바알과 풍요의 여신 아세라 또는 성애의 여신 아쉬타로트가 중요한 신이었고 이 남녀 두 신의 성애를 통해 인간에게도 자식의 번성이나 물질의 풍요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산당에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예배가 드려졌는데 이 예배는 본질적으로 성적인 제의였으며 이 제사를 드리는 신당에 제사장뿐만 아니라 성전 창기와 창녀들이 있었다. 신들에게 바쳐진 이들과 성관계를 하는 것은 신에게 바치는 예배의 한 형태로서 다산과 풍요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믿었고 이 산당 제사에서 혼음도 행해졌다. 매춘부 자신이 무녀나 성녀로 간주된 신성 매춘이 이스라엘로 침투되어 온 것은 이미 왕국 건설 이전부터로 추정한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아들들이 신성 매춘의 제사장 역할을 했으며, 신전 막사의 문간에서 시중들고 있는 여자들과 성관계를 해 그 죄 값으로 본인이 죽임을 당함은 물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에서 지게 되었다고 사무엘 상 2장 22절 이하에서 고발하고 있다.
호세아 서에 의하면 어머니가 이 다산과 풍요의 축복을 얻기 위해 며느리와 딸, 아들들을 데리고 산당 제사에 참여하는 풍습을 고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때때로 이 신들을 야훼 하나님과 경쟁하는 신으로 섬기는가 하면, 때로는 야훼와 바알 신을 혼합해서 섬기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제의적 매춘들과 성행위를 했는데 그 형태를 호세아서는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너희 딸들이 음행을 하고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
너희 남자들도 창녀들과 함께 음행을 하고
창녀들과 함께 희생제사를 드리는데,
너희 딸들이 음행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호세아 4:13-14)".
고대 근동 지방과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이 제의적 매춘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것이며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제의적 매춘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은 엄청나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의적 매춘에 참가하여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매춘부와 놀아나 정절을 버리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한 예로 이방신을 섬기는 예배에 참여하여 산당 매춘들과 놀아난 남왕국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자매의 매춘행위에 빗대어 규탄한 이야기가 에스겔 23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자매는 둘 다 이집트에서 매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오홀라는 아시리아 사람들과 매춘을 했는데 이집트에서의 방자한 행동을 본 따 하다가 아시리아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시리아의 혼합주의에 말려들어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타락한 사마리아가 이들 자매들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저주한다. 이들 자매처럼 약탈당하고 돌로 쳐죽이고 그 자식들과 집을 불태울 것이라고, 그래서 다시는 이스라엘 여인들이 이 음행을 본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결국 이런 추잡한 이방신의 매춘제의에 참여한 이스라엘은 이것 때문에 패망하리라는 경고다.
왜냐하면 야훼를 믿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출산이나 수확에 관련된 풍요와 다산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성애라는 것 역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제의적 성매음에 맡기는 것은 야훼신앙과는 맞지 않는, 우상숭배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개혁이 있을 때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성전 매춘이 일어났던 곳은 불태워졌다.
구약성서에서 제의적 매음 또는 매춘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악한 것이고 성전 창녀나 창기뿐 아니라 이에 참여하는 자 역시 징벌의 대상이다
제의적 매춘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인 면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기로 약속한 이스라엘 백성이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가나안 종교의 기복성과 성애적 요소에 혹해 야훼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나안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기 때문이다.
2-1-2 세속적 매춘
돈을 벌기 위한 매춘은 이스라엘 초기부터 행해졌다. 이스라엘 초기 설화시대에 속하는 야곱의 이야기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아들에게 들에서 강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디나의 오빠들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하고 항변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기원 1천년 전부터 매춘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구약 성서에서 제의 매춘이 비난의 대상인 반면 세속 매춘에 대해서는 매춘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서는 매춘하는 여성들에 대해 그리 혐오감을 갖고 있지 않으며, 매춘은 필요악으로 공동체의 일부로 인정되어 온 듯하다. 구약성서는 몇몇의 특별한 매춘 여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말: 창세기 38:14-15절에 나온다. 이 여인은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창녀로 변신을 하고 자기 시아버지와 성관계를 해서 임신을 했다. 다말은 원래 보통 여자였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자식도 없이 죽어버렸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둘째 시동생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당시는 자식 없이 죽은 형의 가계와 형수를 보호하기 시형제와 결혼하는 법이 있었는데 둘째 시동생은 형수가 아기를 낳아도 자기 자식이 되지 못할 걸 알고는 질외 가정을 해버렸다. 하나님이 이걸 괘씸하게 여겨 둘째 아들이 벌을 받아 주어버렸다. 시아버지 유다는 자기 아들이 연달아 죽자 겁이 나서 막내아들이 성인이 되면 며느리에게 주기로 하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막내아들이 성인이 되었는데도 며느리를 부르지 않자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분장을 하고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맺고 아이를 임신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시아버지는 다말이 창녀 짓을 해서 임신까지 한 것을 알고 분노해서 며느리를 태워 죽이려고 하다가 며느리가 임신한 아이가 자기 아이인 것을 알고 “ 그가 나보다 옳다”고 하며 다말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속여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했다든지, 창녀로 변했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비난이 없다. 오히려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시아버지에 대해 자기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며느리 다말이 창녀 노릇을 한 일을 의롭다고 인정한다.
라합: 여호수아 2:4-16에 나온다. 라합은 원래 여리고 성에 살고 있는 창녀였다. 라합은 여리고를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었다. 라합은 여리고의 성곽에 살면서 광야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새로운 세상이 전개될 가능성을 보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살려 준다. 당시 라합이 그 성을 정탐하러 온 히브리 노예들의 입장에 동조한 것을 보면 라합의 처지가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라합은 계급 질서에 억눌려 속박을 당하는 가나안 여리고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의 길을 택하여 히브리 노예들의 편에 선 것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내 아버지 집안에 은혜를 베풀겠다는 맹세를 하시오. 그리고 그 확실한 징표를 내게 주시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과 홍색 줄로 약속을 하였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쳐들어 왔을 때 그 홍색 줄로 인해 라합 자신은 물론 그 가족이 구원을 받는다. 이 본문에 보면 라합이 창녀 짓을 하는 것은 라합 자신의 일신상의 이익보다는 그 아버지의 집을 보호하고 구하려는 강한 집념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여성이 창녀가 되기까지는 집안의 보호라는 강한 가족애가 있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창녀가 되고 그 가족을 구원하는 창녀 라합의 이야기는 창녀라고 해서 비난받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던 창녀 라합은 비록 창녀였지만 예수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귀한 여인이 된다.
두 창녀 이야기: 열왕기 상: 16-27의 이야기에 나오는 한 창녀 이야기는 모성애의 실체를 드러내준다. 이 이야기는 한 집에 사는 두 창녀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두 창녀가 각각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한 여자가 잘못해서 잠을 자다가 아이를 깔아 죽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아이를 바꾸어 놓았고 서로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싸우다가 급기야 솔로몬 왕 앞에 와서 재판을 하게 된 이야기다. 솔로몬은 아이를 갈라 반씩 주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산 아이의 어머니가 ‘모성애가 불타 올라’ “제발 임금님, 살아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솔로몬은 아이를 양보한 여자가 진짜 어머니니까 아이를 그 여자에게 주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솔로몬 왕이 얼마나 지혜가 있는 왕이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진짜 어머니의 모성애가 없었다면 아이는 솔로몬의 잔인한 칼에 희생당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창녀는 모성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표상이다. 직업에 따라 모성애가 다를 수 없고 비록 창녀라고 해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포기할 줄 안다는 것이다. 모성애의 한 표본으로 창녀를 내세운 성서의 이야기에서 창녀를 대하는 시선을 엿볼 수가 있는데 창녀도 왕에게 재판권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사사기 11장에 보면 길르앗 사람 입다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입다는 창녀의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암논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마을 장로들의 초청과 하나님의 영이 내려 길르앗의 지도자가 되어 암논을 쳐 부시고 이스라엘을 구한다. 이 이야기에 보면 입다가 창녀의 아들이라고 해서 모욕을 받지 않는다. 매춘관계에서 생긴 자녀는 적출로 인정되었다. 사사기 16장에 보면 삼손은 매춘부 데릴라에게 빠져 힘을 일었는데 여기서도 데릴라에게 비난의 초점이 잇지 않았다. 어쨌든 구약성서는 매춘을 정당화하지는 않더라도, 남성의 성적 욕망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보았기 때문에 매춘부라는 직업 자체가 그리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매춘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남자들로 하여금 매춘에 빠지지 말 것을 권고하면서 창녀는 교활한 마음을 품고 남자에게 다가가서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자니 그 여자에게 빠지지 말라고 하며 여자의 집은 지옥으로 트인 길이라고 경고한다(잠언 7장).
한편 창녀를 비인격적인 존재로 대하고 있는 곳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딸이 창녀가 되는 것은 금지되었다(신명기 33:17). 창녀가 된다는 것은 저주의 상징이기도 했다. 예언자 아모스를 부당하게 대한 벌로 아마샤의 아내는 “창녀가 될 것이다.”라는 저주 어린 예언을 받는다(아모스 7:17). 거룩한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할 수 없으며 제사장의 딸이 매춘을 하면 화형을 당했다(레위기 21:7).
창녀가 번 돈은 더러운, 깨끗하지 못한 돈으로 취급받았다. “창녀가 번 돈이나 남창이 번 돈은 하나님의 성전에 서원을 갚는 헌금으로 드릴 수 없다”고 못박음으로 매춘해서 번 돈 즉 화대로 헌금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신명기 23:18).
이렇게 매춘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매춘을 용납하는 것은 여자의 순결과 정조를 침해하지 않고 남자들의 성적 욕구를 위한 배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2 신약에서 매춘에 대한 이해
신약시대에 와서는 제의적 매춘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고 소위 세속적 매춘이 일반적이다. 매춘에 대한 신약성서의 입장은 매우 근엄하다. 당시 창녀는 세리와 마찬가지로 소위 죄인 이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매춘부를 보는 시각은 예수와 바울에게 있어 차이가 난다. 예수는 매춘부와 교제를 하셨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저 사람이 죄인과 가까이 한다.”하고 비난을 듣기도 한다. 매춘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가 의롭다고 자칭하는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초청을 받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와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가 나온다. 본문에 분명하게 ‘죄인’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이 여자는 창녀로 짐작이 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저 여자는 죄인인데!”. 그러자 예수는 그 사람들처럼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여인은 용서받았다고 선언한다. 예수는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과 스스럼 없이 음식을 나누셨다. 비난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온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므로 당시의 관습을 깨뜨려 버리셨다.
교회의 전설에는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붓고 머리로 닦은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나온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밑에도 있었고, 예수 님이 부활 후에 제일 먼저 만난 바로 그 여인이었다. 이렇듯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지닌 여성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매춘부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고 매춘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자로서 적지 않은 동정심을 보였다고 한다(매춘의 역사, p. 110).
당시 죄인으로 간주된 매춘여성을 비롯한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대하는 예수의 자세는 매우 해방적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에 따라 돌로 쳐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는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 말에 찔림을 받아 모두가 흩어진 다음,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말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 매춘녀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던 당시의 사회규정에 반하여 정죄하지 않은 예수의 태도는 매우 파격적이다. 예수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여인이 간음할 수밖에 없는, 매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그 구조악을 아셨기 때문이다. 간음이나 매춘은 여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도망간 상대방을 놓아두고 여자만 현행범으로 잡아오는 것이 가부장 사회의 잣대다. 이런 완악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힘없는 여성들의 편에 서신 것이다. 예수는 죄인으로 간주되는 매춘부를 피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바리새파 사람들 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하셨다.
바울 대에 와서 기독교의 성윤리는 근엄하게 바뀐다.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랑, 신부의 결혼관계로 비유하면서 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고린도전서 6:13-15에서 “몸은 음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드는가?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라고 강력하게 매춘을 통한 음행을 금한다. 부부가 정절을 지키고 가능하면 독신으로 살라고, 남자들보고는 정욕을 좇아 몸을 더럽히지 말고 금욕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에 의하면 매춘부는 남자를 속여서 파계에 이르게 하는 유혹자다.
바울이 매춘을 배척하는 이유는 여자가 쾌락의 대상으로 악용되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그런 일을 함으로써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가 곧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가능한 한 남자는 동정을 지키고 여자는 순결을 지키는 금욕생활을 권면했다. 바울의 이러한 금욕주의는 바울 이후 교회의 성 윤리에 큰 영향을 미쳐 결혼과 금욕생활에 관한 혼선을 가져오기도 했다.
우리는 이상에서 성서에 나타난 매춘에 관한 이해를 대략 살펴보았다. 그런데 성서 어디서도 여성이 어떻게 매춘에 이르게 되는지를 언급한 곳이 없다. 다만 당시의 사회경제상을 고발하는 성서 몇 곳을 통해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들, 가난 때문에 부모들이 종으로 판 소녀들, 전쟁의 포로가 된 여성들이 매춘부로 팔리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이다. 당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생존을 위해 매춘부가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3. 교회사에 나타난 매춘 이해
초기 교회는 바울의 영향을 받아 금욕생활이 성행하였다. 수도사들은 매춘부를 회개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제로 이들의 감화를 받아 매춘을 포기하고 성녀가 되거나 순교자가 된 창녀들의 이야기도 많다. 성 타이스가 그 한 예이다. 그는 매춘부였으나 개신 후 성실한 신자가 되어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하였기 때문에 성자의 반열에 올랐다.
교부들 주에 매춘에 괄목한 영향을 미친 이는 어거스틴이다. 그는 결혼한 부부의 성관계의 유일한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외의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는 정욕에 의한 매춘이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매춘부가 그 직업을 버리지 않는 한,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하지만 결혼생활을 정욕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매춘 그 자체는 필요악으로 시인된다고 보았다(매춘의 역사, p. 120).
매춘은 언제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다. 비잔틴 시대까지는 매춘행위 그 자체는 멸시 당했으나 매춘부는 경멸되지 않았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황제를 비롯해서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이 매춘부들의 갱생을 도왔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매춘에 빠지는 처녀들이 많았고, 이중규범이 매춘시장을 낳은 것도 사실이지만 매춘부 스스로 그 죄 많은 생활을 청산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래서 매춘부들 중에는 감화를 받아 수녀원에 들어가거나 결혼을 해서 새 살림을 꾸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 오면서 여성의 정절이 존중되었고 강조되었다. 매춘행위는 매춘부 집안에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매춘은 처벌을 받았고 단순한 간통이나 혼외의 성관계보다 더 심한 비난을 받았다. 경건한 기독교도라면 매춘은 도덕에 반하고 신학상 불순한 것이며 엄하게 규제해야할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을 본받아 매춘을 묵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춘부가 없으면 기존의 사회관계나 성관계의 존속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매춘의 역사, p.187). 중세 법학자들에 의하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강요에 의해 매춘을 하는 매춘부가 아니라 그들을 미끼로 돈을 벌려는 뚜쟁이나 포주, 유곽을 경영하는 자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위대한 신학자는 매춘은 엄연한 죄악이지만 절대로 금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매춘을 궁전의 하수구에 비유하면서 “하수구를 제거해버리면 궁전이 오물 투성이로 되는 것처럼 매춘을 추방하면, 세상은 남색이나 수간을 비롯한 죄업으로 넘쳐흐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 사상가인 루터와 칼뱅은 어거스틴과 달리 결혼 생활 중의 육욕에 의한 성행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신성한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매춘을 거부했다. 남자를 유혹하는 것은 매춘부이기 때문에 매춘부는 파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루터는 매춘의 죄악을 호소하고 국가가 기독교적이 되기 위해서는 매춘이나 강간, 간통을 엄벌로 처벌해야 하며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는 매춘에 대해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뱅은 보다 엄격하게 매춘부를 거리에서 추방하였고 청결한 결혼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도시에는 조직 매춘이 쇠퇴하였다(매춘의 역사 p. 220). 이러한 전통이 개신교의 윤리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성서와 교회사에 나타난 매춘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았다. 이제까지 본 바에 의하면 예수의 눈을 제외하고는 매춘이나 매춘부를 보는 시각이 모두 남성중심이며 남성을 위한 제도로서의 매춘을 옹호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수구 논리가 매춘을 보는 정점에 있으며 매춘부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음을 본다. 과연 매춘에 대한 올바른 기독교적 응답은 무엇인가?
4. 매춘에 대한 여성신학적 응답
역사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춘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나 제대로 성공을 거둔 일이 없었다. 왜 그럴까? 대부분이 매춘부를 회개하는 대상으로만 보고 그들을 위한 임시변통으로 갱생의 길만 열어 놓았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매춘이 일어나는 구조에는 관심이 없이 매춘부를 한 개인이라고 인식하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회개를 기다린다. 여기서 마찰이 일어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용산에 있는 막달레나의 집에서 전에는 매춘을 하다가 그 생활을 벗어나 매춘 여성들을 섬기고 있던 한 활동가가 들려 준 이야기다.
“언젠가 제가 아이들하고 쭉 만나서 상담을 하면서 지내온 적이 있는데, ‘언니, 성당 갈 때 나 좀 한번 데리고 가, 성당에 가보고 싶어’. 그래서 여럿을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우리 지역에 있는 교회로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때 저를 알고 그 애들을 알고 있던 신자 한 분이, 참으로 교회 일 열심히 잘 하시는 분이어요. 그 분이 대단한 분인데 그 양반이 나를 보고 하는 이야기가 저 애들, 저 생활에서 언제 끝내느냐?,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교회에 나오면 교회 인상이 나빠진데요. 정말 그런 사람이 교회를 찾음으로 해서 교회의 인상이 나빠진다면, 정말 교회가 이 땅에서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수 님이 왜 오셨는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혼자 들었으니 망정이지, 그 애들이 들었으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는가? 그래서 다시는 그 애들을 데리고 교회를 안 가요.”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조차도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예수는 그 여인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 여인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잘못된 성 인식과 구조악을 꿰뚫어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처럼 매춘부들이 여성억압의 한 희생자이며 매춘제도는 가부장 제도 하에서 빚어지는 구조악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예수가 간음한 여인에게 말했다고 매춘부의 자리가 쉽게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 여성 교인이 바라는 대로 그 여성들이 매춘 생활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매춘 고리에 의해서 다른 여성으로 교체될 뿐이지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매춘이 근절되기 위해서는 매춘이 일어나는 구조악의 고리를 깨뜨려 버려야 한다.
첫째, 남성 중심적인 성 인식과 성의 이중 규범을 바로 잡아야 한다.
매춘은 왜 일어나는가? 매춘제도는 성의 이중 규범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성서는 물론 남자나 여자나 혼전 순결을 지키도록 장려한다. 그러나 신부의 처녀성과 결혼한 여자의 정조는 강조되었지만, 남자의 순결상실은 문제 삼지 않는 이중적인 규범이 문제다. 신명기 22장 20절 이하에 의하면 신부가 처녀성을 상실한 것을 발견했을 경우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고, 남자가 미혼 여자와 자다가 붙잡혔을 경우에 처녀의 아버지에게 오십 세겔을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재산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자가 처녀성이 없으면 돌로 맞아 죽는데, 남자는 간단한 손해 배상만 하면 되었고 또한 기혼남의 간통은 넘어가면서 기혼녀의 간통은 제재를 가했다. 이렇게 이중적인 성 규범의 이면에는 여자를 재산의 일부로 보는 가치관 때문이다. “네 이웃을 탐내지 말라”는 제 9계명에 이어 괄호로 네 이웃의 아내나 소...“라고 명기함으로 여성을 가축과 같은 재산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다. 이렇듯 아내는 재산이었기 때문에 신부의 처녀성에 벌금이 붙는 것이다. 여성을 재산으로 가치 매김 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의 성이 상품으로 팔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여성을 상품화하고 억압하는 규율을 만들어 놓고 남성은 성 구매자로서 성적 자유를 누리는 남성중심적 성차별 제도하에서 매춘제도가 형성된 것이고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을 상품으로 보며,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는 없고 오직 남성의 권리만이 있는 가부장적 성 규범이 없어져야만 매춘은 뿌리 뽑을 수 있다. 여성신학자 필리스 트리블의 말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성이란 것은 여자와 남자에게 있어서 동시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양성은 서로 연관되어있고 상호의존적이다. 남성으로서의 남자는 여성으로서의 여자보다 앞서지 않았으며 여자와 동시에 존재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첫 작업은 양성 구유자(androgyny)의 창조였고(2,7), 2장 마지막에 나오는 작업은 성의 창조였다(2,23). 남성이 있으므로 여성이 있고 여성이 있으므로 남성이 있다. 둘은 이분된 존재도 아니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사한 존재도 아니다. 오로지 여성에게 반응하는 가운데서 남자는 자신을 남성으로 발견하게 된다.”
"창조기사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약하다거나, 간교하다거나, 더 성적이라는 판단을 지지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동일한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 창조주는 여자의 창조를 피력함에 있어 ‘좋다’(good)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사용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그 탄생에 있어 동등하다. 그들 사이에는 완전한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인 일치가 있다.“(트리블,p.129)
둘째,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성서에서 어떤 사람들이 매춘부가 되었는가를 살피면 매춘과 여성의 지위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매춘부가 되었는가? 우리가 성서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노예나 과부, 고아, 그밖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매춘부로 나섰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말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유일한 생계 보호막인 막내 시동생을 주지 않자 창녀로 나서서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했다든지, 라합이 여리고성 성곽주변에 살면서 식구들을 부양했다던 지, 또 가난에 딸들을 판 부모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아모스나 느헤미야서, 남편에게 쫓겨나 창녀가 된 고멜의 경우 등을 보아도, 성적 방종 때문이 아니라 생계 유지 때문에 창녀가 된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경우는 국가가 전쟁에 졌을 때 포로로 끌려가 종이 되거나 창녀가 된 경우다. 당시 여자들에게 부과된 일은 아들 낳아서 기르는 일이었고, 여자들이 직업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앞에서 본 대로 무녀 아니면 매춘을 겸한 기녀나 창녀였다.
이런 현상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윤금이의 경우에서 보듯이 대다수의 매춘부는 가난에 밀려 매춘부가 되었고 더 극단의 경우가 기지촌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다. 만일 여성들이 직업전선에서 언제나 이차적인 위치가 아니라, 남성과 같이 인정받고 안정된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면, 매춘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빈곤의 여성화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여성의 빈곤화는 여성을 매춘으로 몰아넣는다. 제삼세계의 가난한 나라에서 부모들이 어린 딸을 매춘에 넘기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생존권을 저당 잡힌 여성들이 매춘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매춘여성의 문제는 생존권의 문제이고 인권의 문제다. 왜 여성의 인권이 이렇게 몰락하는가? 그것은 남존여비의 가부장적 가치관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여성의 역할은 가사와 육아라는 고정관념이 매춘제도를 촉진한다. 이점에서 종래의 기독교적 가르침도 한몫 한다. 그러나 정말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인가?
성서는 우리에게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7). 이 선언에 의하면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며 여자도 번성할 권리가 있고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다스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역사는 남자만 다스리고 남자만 존엄한 존재로, 여성을 다스리고 있다. 이런 왜곡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매춘으로 내몰리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춘 여성 문제는 생존권의 문제,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매춘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잘못된 가부장적 가치관과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5. 민족분단의 희생양 -기지촌 여성
윤금이 사건으로 대표되는 기지촌 여성의 문제는 단순한 매춘 문제가 아니라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의 성 상품화, 군국주의, 미패권주의가 뒤얽혀 빚어내고 있는 여성의 고난 문제다. 1945년 우리 나라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후, 이 한반도는 미소 양국에 의해 분단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남한 땅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 미군주둔지는 의정부와 동두천, 송탄 등에 자리를 잡았고 이 주둔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 여성이란 이 주둔지에 있는 미군에게 몸을 파는 여성들을 말하며 속칭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기지촌 여성이 되는 경우는 일반 매매춘에 종사하다가 팔려 오는 경우와 곧 바로 이 기지촌으로 오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가난이 주원인이고 남자에게 버림받거나 성폭력을 당한 상처로 자포자기하여 오는 경우도 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매춘 여성이 거주하는 이 기지촌 여성은 힘없는 나라에 속한 민족의 아픔과 분단의 비극을 처절하게 몸으로 감내해 내는, 고난의 삶을 살고 있다. 기지촌 여성은 지배국의 주둔군에게 정복대상으로 인식되어 윤금이 사건과 김국혜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강간을 비롯한 온갖 폭력과 마침내는 살인 등의 능욕을 당하고도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히 서 있는” 그 어린양처럼 침묵을 강요당하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주한 미군이 저지르는 범죄는 기본적으로 주둔군으로서, 정복자로서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미군이 저지르는 범죄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한미행정협정으로 인해 처벌도 되지 않고 된다고 하더라도 가벼운 처벌에 그친다.
처음 서두에서 인용한 윤금이씨 사건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배태된 여성에 대한 성상품화로서 가장 인권이 침해된 경우이다. 미군에 대한 기지촌 여성의 접대는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외세에 의한 지배의 역사와 연결된다. 고려 원군에 의해 강제로 포로로 끌려간 ‘환향녀’, 그리고 일제시대 때 끌려갔던 ‘일본군위안부’에 이어서 민족분단 하에서 미군의 주둔하에 ‘기지촌여성’으로 이어진다. 미군에 대한 기지촌 여성의 접대는 제 1세계에 의한 제국주의와 다국적 기업 그리고 가부장 문화 등에 따른 힘의 역학 관계에 깊이 개입된 문제이다.
일반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매춘제도가 용납되었던 것처럼, 기지촌 여성은 자국 여성의 보호를 위해 이중, 삼중의 사회구조적 모순의 짐을 지고 미군들의 성 착취와 범죄에 내던져 있다. 이들은 민족 분단의 희생양으로, 동족 여성들의 방패막이가 되었는데도, 동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미 제국주의의 성 착취와 유린 속에서 소외당하는 기지촌 여성의 문제는 한국 여성 입장에서 볼 때 분단의 극복과 한미행정법 개정의 과제를 안고 있다.
기지촌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호세아서에 나오는 고멜을 회상하게 된다. 고멜은 산상 제의에 참여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편 호세아에게 음탕한 여성으로 낙인찍힌 여성이다. 이 제의 매춘은 누가 만들었는가? 도시국가의 위정자가 종교를 통해 백성을 통제할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매춘제도다. 고멜은 호세아가 보듯이 음탕한 여인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제도의 희생자이며 피해자다. 결벽증과 편견에 사로잡힌 호세아의 박해를 견디다 못한 고멜은 집을 나가 다른 남자에게 빌붙어 사는 창녀가 된다. 당시 집을 나가 여자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창녀가 되는 길뿐이었다. 고멜이 집을 나가자 호세아는 자기 자신과 고멜의 관계를 돌이켜 보게 된다. 자신의 잣대로 고멜 위에 군림하고 고멜을 종으로, 비인격 존재로 대한 자신을 반성한다. 그는 이제까지 고멜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자세를 고치고 사랑하는 낭군으로 돌아설 것을 다짐한다. 고멜을 데려 오기로 하면서 호세아는 이렇게 다짐한다.
“ 그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호세아서 2장 19절)
오늘날 기지촌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정의와 공평이다. 국가가 힘이 없어 미국의 비위를 맞추노라 만든 불평등행정법을 바로 잡고 기지촌에 정의와 공평의 법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이들을 위해 예수가 왔다고 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정의와 공평을 세우는 일에 나서야 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자매애와 연대가 필요하다.
나가면서
나는 이제까지 성서를 통해 매춘문제와 기지촌 여성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조명해 보았다. 매춘 여성 문제는 생존권의 문제,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매춘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잘못된 가부장적 가치관과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함을, 교회가 매춘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 과제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할 점은 우리 한국의 기지촌 여성보다 더 착취당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지촌을 중심으로 새롭게 몰려드는 외국여성노동자 문제다. 최근 이 기지촌에는 필리핀, 러시아 등 우리 나라보다 경제적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여성들이 연예인비자로 들어와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한국사람들보다 훨씬 싼값으로, 보다 열악한 조건으로 매춘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지촌에는 한국여성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우리 기지촌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여성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뺏긴다는 심정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국의 가난 때문에 남의 나라까지 몸을 팔러 온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빈곤의 여성화’가 빚어낸 아픔이라고 생각하고 이들과 연대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다각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고통받는 이들과 자매애를 나누는 일이 요청된다.
이 글은 두레방 20주년 기념 두레방 길을 열다라는 단행본에 실린 글이다. 여기서는 매춘이란 용어를 사용했지만 후에 이 용어는 성매매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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