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일본군위안부 문제, 한국교회 무엇을 했나?

한국소금 2019. 3. 23. 18:56

일본군위안부 문제, 한국교회 무엇을 했나?

한국염/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 여성위원장


일본군위안부할머니의 소리

 

,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 처절한 고난의 자리에.

열일곱 꽃다운 나이 친구들과 나물 캐러가는 길목에서

일본군에 잡혀 이름도 모르는 곳에 끌려가

일본군의 정액받이 노릇한 나날들,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일본군이 내 몸을 침범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을 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절규한 나날들.

아기를 지운다고, 일본군이 마취도 없이 배를 가르던 날

제 몸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참히 살육당한 아기를 생각하며

내 친구는 몸부림을 쳤지요.

해방이 되었다고 하네요.

정조를 잃은 우리를 누가 받아줄까요?

더럽혀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친구들이 절벽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지요.

그 절벽 이름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지요.

모진 목숨 죽지 못해 만신창이 된 몸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끝내 창피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숨어살던 나날,

, ‘정신대라고 불리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우리네는

그렇게 처절하게 수모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 글은 20023민족의 고난과 여성이라는 주제로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드린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예배에서 일본군위안부할머니의 소리를 필자가 시어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때는 위안부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라기보다는 몸을 버린 여자라는 낙인으로 정부에 신고를 기피하거나 신고를 하고도 숨어 지내는 분들이 많았다. 점차 일본군위안부할머니들이 내가 잘못이 아니라 일본국가나 일본군이 나쁜 것이고, 나는 전쟁범죄의 피해자다하는 자각들이 높아졌다. 많은 할머니들이 피해자에서 평화운동가로 변모해 공식사죄와 법적 배상을 외치고, 다시는 전쟁으로 인한 여성폭력피해자가 없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일본군위안부들의 명예와 인권을 위해 일본대사관 앞 에서 진상규명’, ‘공식사죄법적 배상’, ‘올바른 역사교육을 요구하는 수요 집회도 1,200회를 넘어섰다.

위안부할머니들의 염원에 찬물을 끼얹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는 일이 터졌다. 바로 20151228일 발표된 한일외교장관합의다. 이 합의에 대해 교계에서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갈리고 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한국교회의 입장은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처해 온 한국교회의 양태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아보고 한국교회 과제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교회여성, 일본군위안부문제 초석 놓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 중심에는 현재 피해 생존자 할머니와 함께 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있다. 그렇지만 정신대(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언급하고 이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첫 시작은 바로 한국 교회여성이고 정대협의 초석을 놓은 곳도 교회여성들이었다.

 

1) 국내 최초로 여자정신대문제에 대해 일본 사죄 요구

1984823일 당시 일본방문을 앞 둔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이하 한교여연)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이하 교회협여성위)가 공동으로 한일정상회담에서 정신대문제와 기생관광문제, 한국의 원폭피해자와 사할린교포에 관한 문제를 의제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건의서는 여자정신대에 대하여 일본은 사죄하여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양국의 우호관계를 맺으려면 여자정신대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것을 건의했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신대 중 군위안부문제를 성 착취로 규정하고 일본에 사죄를 촉구한 첫 공식문서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교회협여성위와 한교여연은 이듬해 198539일 일본여성의 날에 교회협의 파트너인 일본교회협의회에 기생관관문제를 현대판 신정신대문제라고 규정하고 일본에서 이를 거부하는 운동과 일본정부에 사과를 촉구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서에서도 거듭 군위안부 해결에 일본 교회가 적극 협력할 것을 강조했다.

 

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산실로서의 교회여성연합회의 활동

기생관광이 현대판 정신대라는 인식을 하고 있던 한교여연은 당시 평화통일위원장 이효재 교수를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심하던 윤정옥 교수를 만나게 되고, 한교여연 내에 정신대문제 답사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정신대 조사위원들은 정신대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1988212일부터 보름 동안 오키나와를 비롯해서 규슈, 홋카이도, 도쿄, 사이다마 현까지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 답사결과가 19884월 제주도에서 10개국 13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여성과 관광문화국제세미나에서 발표되어 회의 참석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교회여성들이 인권활동가들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연대의 다리를 놓게 되었다.

이 세미나를 계기로 1988516일 한교여연 교회와 사회위원회에 정신대연구위원회‘(후에 정신대연구소로 재편됨)가 만들어졌다. 19891월 한교여연은 히로히토 일왕의 사망과 아키히토의 즉위에 즈음해 일본의 전쟁책임 및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성명서 발표하였다. 1990518일 한교연과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가 노태우대통령 방일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과거 범죄 중 특히 묻혀있는 정신대문제에 대한 일본당국의 진상규명, 사죄와 배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한교여연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전국적인 여성운동으로 전개되게 된 것은 종군위안부 업무는 일본정부와 무관하고 민간차원에서 행해진 일이라고 한 일본정부의 망언 때문이었다. 이에 분노한 한교여연의 정신대연구위원회는 1990825일 긴급회의를 열고 이 문제는 역사적 사안임으로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할 문제임을 확인하고 범 여성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고 여성단체에 제안했다. 37개 여성단체가 19901017일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과 한국정부에 항의하는 공개서한에서 조선인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서 강제 연행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할 것6개항을 요구했다.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37개 여성단체 대표들은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키로 하였고, 19901116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었다. 정대협은 일본이 계속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부인하고 한일문제는 한일협정에서 다 끝났다고 주장하자 피해생존자 찾기에 나섰다. 19917월 한교여연의 반핵평화한마당에서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814일 처음으로 생존자 증언이 이루어졌다.

나는 김학순이오. 요즘 신문을 보니 나 같은 사람이 시뻘겋게 살아있는데 천인공노할 저놈들이 이렇게 거짓말을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나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오직 나 홀몸이니 거칠 것도 없소. 그 모진 삶 속에서 하나님이 오늘까지 살려둔 것은 이를 위해 살려둔 것 같으니 내 말을 다하리다.”

김학순이라는 산 증인이 나오자 한교여연은 1991918일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설하였다. 이 신고전화를 통해 55명의 위안부신고가 들어왔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신고전화 확대 필요성을 느낀 정부가 19938월부터 대한적십자를 통해 피해신고를 받았고, 한교여연이 시작한 신고전화는 문을 닫았다. 정부에 등록한 피해자는 2013년 현재 총 237명이다. 이러한 조사는 정부가 할머니 생활지원법을 만드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한교여연이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과 같은 일본군위안부운동은 없었을 것이다.

 

기독여성의 일본군위안부운동 참여와 신학화 작업

정대협이 만들어진 초기부터 한교여연을 비롯해 많은 기독여성단체들이 일본군위안부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정대협이 발족할 때 참가한 37개 단체 중 기독여성 단체는 13개 단체였으며, 현재 19개 회원단체 중 12개 단체가 기독여성단체이고 실행위원 12명 중 8명이 기독교인이다. 회원 단체들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일 년에 2번씩 주관한다. 미야자와 일본수상의 방한을 앞두고 199218일 시작한 첫 수요시위에서 이색적인 이벤트가 전개되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곱 바퀴를 돈 성서이야기에서 착안해 일본대사관을 구호를 외치며 일곱 번을 돌았다. 정대협 이름으로 하기는 해도 초창기에는 주축이 한교여연 사람들이었기에 이런 퍼포먼스가 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뜨거운 감자가 된 평화의 소녀상은 수요집회 1,000차를 기해 세워진 것이고 20151231일로 1,211차 수요시위를 벌였다.

정대협 회원단체인 기독여성들은 수요집회 주관과 아울러 정대협의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올바를 역사교육, 추모비 건립 등 6개 요구사항 관철을 위한 각종 활동을 각 단체의 특성에 맞추어 벌이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학화작업과 교육, 캠페인이다.

 

1) 신학화 작업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신학화 작업은 주로 여신학자협의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신학자협의회는 정대협에 참가한 후 성서연구반을 만들어 정신대문제에 대한 성서연구를 시작했다. 정신대여성의 고통의 의미-노수복 할머니 증언과 열 처녀 비유(25:1-33), 사마리아여인과 정신대 여성의 상호 연대적 해석(4:3-42), 신명기 법전에 나타난 포로여성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21:10-14)에 관한 성서연구와 아울러 교회여성들을 위한 정신대 추모예배를 입다의 딸을 중심으로 드리고 이를 엮어 정신대 여성들의 고난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했다. 또한 기독교와 성폭력을 주제로 한 여성신학정립협의회와 성폭력작업반 연구에서 국가와 성폭력문제를 통해 정신대 문제를 다루었다. 성서언어연구반에서도 시편을 여성신학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 한반도에서 다시 살아나는 여성 시편을 펴내었는데, 이 중에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시편이 6편이나 되었다.

2) 일 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연대교류를 통한 국제연대활동

교회협여성위 역시 정대협회원단체로서 연 2회 수유시위 주관을 기본으로 각종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교회협 여성위는 한일 교회협 여성위원회 연대교류회의를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연대를 이루어냈다. 1차로 1996625-27일에 일본 와카야마 현 에쿠시브 호텔에서 광복 1년을 디디며 - 화해, 협력을 위한 교회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열린 회의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아시아국민기금문제 등을 다루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에서 참여자들이 일본 정부에 대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진상규명, 사죄배상하고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고,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철폐하고 중국 거주 정신대 할머니들을 모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 한일연대교류회의는 2년마다 양국을 번갈아가며 열렸는데, 일본군위안부문제가 매번 다루어졌고 한일 교회여성의 공동과제로 인식되었다.

 

3)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캠페인활동과 교육

정대협에 속한 교회여성단체들 중 한교여연과 교회협 여성위 이외에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한 단위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이하 여신도회). 정대협에서 전개한 일본군위안부생활비 지원을 위한 시민기금 모금활동부터 각종 서명운동, 여신도회가 교류하는 국제단체를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알려내는 일에 열심히 참여했다. 또한 각종 기도회와 예배, 여신도교재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다루어 여신도들을 의식화시켰다.

 

4) 소극적으로 변한 기독여성들의 일본군위안부운동

일본이 제대로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고 위로금 형식인 아시아 국민기금이라는 것을 통해 정신대 문제를 덮으려 하자 국민들이 분노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반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는데 반해 역설적으로 기독여성운동은 약화되었다. 2000년 일본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여성법정이 끝난 즈음하여 기독여성들의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이후 정대협 회원단체로서 수요시위를 연 2회 주관하는 것 말고는 별로 눈에 띄게 하는 일이 없었고, 그나마 수요시위조차도 주관하지 못하는 단체도 생겨났다. 그 원인은 정대협을 중심으로 일반 여성들이 이 문제를 열심히 해결하고 있는 점, 그리고 기독여성들이 해야 할 과제가 많아진 탓도 있지만, 기독여성운동이 보수화되고 침체되었다는 점도 그 이유일 것이다.

 

3. ‘위안부고통에 외면하고 있는 한국교회

오랫동안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여성들의 몫으로 치부되었다.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서 할머니가 된 위안부할머니들을 마치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인식하고 외면했다. 정대협의 회원단체인 기독여성들의 외침은 전반적으로 교회에서 외면당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유엔에 가져가기 위한 서명요청을 하자 그렇게 더러운 여자들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거부했다고 한다. 이게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보는 일반적인 교회 정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위안부문제에 협조한 일부 교회들이 있었다. ‘위안부할머니들의 비참한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기금을 모금할 때, 강도만난 사람을 지원한다는 신앙적 관점에서 큰 액수의 헌금을 한 교회도 있었고, 교단의 물적 토대가 약함에도 위안부문제가 정의와 평화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시민기금, 박물관모금을 비롯해서 서명 운동에 많은 교회를 참여하도록 촉구한 교단도 있었다.

2010년 이후 역사왜곡, 독도, 군국주의 부활 등 일본의 극우화에 대한 반동으로 일본군위안부에 무관심하던 보수적 한국교회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몇몇 교회들과 교역자들이 지속적으로 수요시위와 서명운동, 모금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교회 희망봉사단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갖고 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한 쉼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명성교회에서 새로 좋은 쉼터를 마련해서 할머니들이 살아계실 때까지 그곳에 사실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곳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은 입양한 자식을 키워 목사를 만들었고, 그 아들은 지금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런 분들은 불교에서 하는 나눔의 집에 가시는 것을 꺼려하실 수밖에 없다. 희망봉사단 목사들이 정대협 쉼터를 찾았을 때 할머니 한 분이 하신 말씀이다. “불교는 일찌감치 쉼터를 마련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기독교는 뭐하다 이제 오노? 그래도 지금이라도 관심 가져주니 고맙습니다.”

 

4. 12.28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

20151228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한일외교장관합의가 기자회견으로 발표되자 한국교회는 찬성과 반대 양쪽으로 나뉘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이 찬성을 하였고, 교회연합은 찬성과 우려를 동시에 표명하는 성명을 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감리교시국대책위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는 합의 반대와 무효선언을 표명했다. 이 입장들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침묵하거나 무관심한 교회에서는 찬성입장을 발표했고, 어떤 형태라도 위안부문제에 관여했던 단위에서는 반대 입장을 발표했다.

한기총은 1229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만에 한일관계의 최대 난제였던 위안부문제에 대해 양국이 합의를 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결단을 내리고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한 우리 정부의 노력에 격려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동안 한기총이 주로 정부의 입장을 지지해왔던 관례로 보아 이러한 성명서의 진정성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성명서 후 한기총은 침묵하고 있지만 여차하면 교회 강단에서 전 교인을 상대로 정부쪽의 의견을 대변할 것으로 보인다. 1228일 발표 이후 곧바로 이번 한일외교부장관 회담의 합의가 그동안 아베 정권이 보여준 태도에 견주어 볼 때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 한국교회연합은 과거사를 왜곡해 왔던 일본의 행태로 볼 때 과연 얼마나 신의가 지켜질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점, 이번 사과가 일왕이나 아베총리가 직접 밝힌 사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진정성에 의혹이 있다는 점, 일본정부 차원의 사과 표명이 있었더라도 피해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맺힌 응어리가 폴리지 않는 한 합의문제는 한낱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찬성과 우려를 동시에 표명한 한국교회연합은 일정정도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갖고 관여를 했었기 때문에 무작정 찬성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기장)20151229위안부 문제 법적 책임 배제된 합의는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이어 2016114일에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외교적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20151228일 한일 외교장관의 합의를 즉각 파기하라!” 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201614일 독도영토수호위원회와 인권위원회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절차와 내용에서 진정성이 의심되는 졸속 합의이며, 국가 차원의 법적 책임을 규정하지 못한 외교적 담합으로 역사의 기억을 말살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한일외교합의를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201617일 여성위원회와 국제위원회가 1228합의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입장발표를 하고 22일에는 실행위원회 이름으로 “12.28합의는 그 절차와 형식, 내용, 모든 면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감리교시국대책위원회는 2016114기만적인 한일외교장관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전면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박근혜대통령과 윤병세 외교장관의 대국민사과를 요구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2016128정의로운 해결을 통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평화로운 화해가 일어나길 소망 한다는 합의반대성명서를 발표하였다.

 

5. 일본군위안부문제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강도를 만났다. 그 강도는 바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한일외교장관합의. 교회는 강도 만난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서 정의로운 해결에 나설 과제가 있다. 이미 1228합의 이후 일본군위안부문제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이 발족해 세계1억인 서명운동과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손잡기 정의와 기억재단100억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개신교 단위에서 교회협과 기장, YWCA, YMCA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교회협과 예장통합, 기장교회는 삼일절과 사순절을 기점으로 예배와 서명운동, 헌금을 통한 할머니와 손잡기 캠페인을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교회협이 제시한 한국교회가 할 7가지 과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한국교회는 일본군위안부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 외침에 귀 기울일 것이며, 12.28합의를 전면 거부하고 정의로운 합의안이 마련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2. 한국교회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이 여전히 유효한 권리임을 재확인하며, 권리쟁취와 인권회복을 위해 피해자들 편에서 함께 할 것이다.

3. 한국교회는 일본정부에 진상규명과 범죄사실 인정, 공식사죄와 법적배상, 관련자 처벌과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촉구할 것이다.

4. 한국교회는 제2위안부가 역사에 재현되지 않도록 평화의 정신이 담긴 평화의 소녀상을 보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일본군위안부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5.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더불어 일 일본군위안부합의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이 전개하는 1억인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이다.

6. 한국교회는 침략전쟁 과정에서 약자인 여성에게 저질러진 반인륜적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성차별, 성폭력을 거부하고, 인신매매가 없는 세상, 평화와 인권이 회복되는 세상을 위하여 모든 전쟁과 폭력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7. 한국교회는 위와 같은 입장이 관철되기까지 세계교회협의회, 시민사회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연대할 것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는 단순히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의 문제이며, 동북아평화의 중요한 이정표다. 한국교회가 함께 이 과제를 이행해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정의롭게 해결되기를 간구한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를 도우소서!

 


이 글은 2015 한일합의이후 2016년 3월 기독교사상에 개제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