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일어나 마리아의 찬가를 노래하여라!

한국소금 2019. 3. 24. 02:00

민중목회와 여성목회 사이에서

- 나눔과 섬김, 평등목회를 지향하며 -

 

일어나 마리아의 찬가를 노래하여라!

한국염 / 청암교회 목사

 

1. 나의 이야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9년에 신학교에 가보니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 여목사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력이 없어서 여성목사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건방지게도 내가 최초의 여목사가 되어야겠는 생각했었다. 제도에 막혀 여성이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왜 여자가 목사가 못되는지를 알아보았더니 세 가지 이유였다.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남자니 여저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되어있고 여자가 가르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 때문이란다. 다른 이유는 예수가 남자 제자만 선택했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예수의 제자가 남자뿐이기 때문이라면 예수의 제자는 유대인인데 그럼 왜 유대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한국남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안수를 안주려고 별 이유를 다 끌어다 댄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님이 아버지라서 여자가 목사가 못된다니,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화가 났다. 그나저나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는 들어왔는데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니 신학교에 계속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당시 여자로서 교수를 하시던 이우정 선생님을 보면서 기왕 들어온 학교,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되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학교에 남았다. 그런 어느날 기장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여목사 안수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 말에 솔깃해서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이때부터 전국연합회사무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1974, “세계여성의 해를 일년 앞 둔 해에 우리 교단에서 간신히 여목사제도가 통과되었는데 통과 이유 또한 가관이었다. 당시 우리 교단 헌법에는 목사 안수 조건으로 “30세 이상된 자라는 자격규정이 있었는데, 를 사람으로 바꾸게 되었다. 사람으로 바꾸다 보니 이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로 해석해서 통과가 되었다. 그때까지 여자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나보다.

 

내 눈으로 어머니 하나님을 발견하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 일생에서 잘한 것이 있다면 한신을 다닌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한신에서 내 일생의 두 나침반을 만나게 된다. 두 분의 삶의 모델을 만났는데 하나는 이우정선생님이요, 다른 한분은 문동환교수님이었다. 이우정선생님을 보면서 여성으로서의 지도자상을 꿈꾸었고, 문동환교수님으로부터 억압과 차별, 이에 대한 정의의 항거, 세상을 뱐혁시키야 할 과제 등을 배웠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삶을 그 두 분들을 보면서 체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우리학교의 분위기였다. 비록 교단은 가부장적으로 여성의 길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한신은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였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했지만 교수님과 학생들 사이에 권위주의로 인한 위계질서는 없었다. 진보적 신학사상을 배우는 가운데 남녀 차별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 없이 지내던 동료들이 교회에 나가서 목사가 되면 목에 깁스를 하고 뻣뻣한 권위주의적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알다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신학교에 남은 나는 하나님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북에서 탈출하여 임진강을 건너려할 때 배를 탔는데,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원이 내가 자다가 깨어 울면 어떻게 하느냐고 아버지에게 닦달을 하자 아버지는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살아있는 나를 임진강에 던지려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느냐고,당신들은 배타고 건너라, 나는 이 아이와 함께 다른 길을 알아보겠다. 하고 배에서 내였다. 우리 아버지는 그 배를 타고 갔고. 어머니는 초겨을 임진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나를 업고 그 찬물을 건넜다. 이남에 와서 어머니는 꿈에 왠 젊은이가 나타나 내가 예수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깨었는데, 그때 교회에서 치는 새벽 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나도 어머니를 따라 골수 예수쟁이가 되었다. 열신히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했다. 그랬는데 이 임진강 이야기를 안 이후부터 도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는 순간에 임진강에서 나를 버리려고 했던 얼굴도 모르는 그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은혜가 될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고, 아버지는 남자니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와 친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하나도 은혜가 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도 그 배안의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버리려고 했는데, 그 때 나는 아버지의 외동 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도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여성신학이 들어오기도 전인데, 나는 그냥 하나님, 하고 기도를 했고, 하나님과 친밀감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니 고역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 때 구약통독이라는 과목이 생겼다. 교수님은 그냥 통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명깊게 읽은 구절을 두 구절씩 밑줄을 쳐서 내게 했다. 그러니 성경을 꼬박꼬박 읽을 수밖에. 이렇게 읽어가는 중에 이사야서 46장을 읽게 되었다.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남은 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고 하겠느냐?”(3-5).

이 구절을 읽는데, 문득 내 앞에 나를 업고 임진강 찬물을 건너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고, 하나님의 모습이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 떠오르면서 내 안에 뜨거운 감동이 일었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모습의 발견,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나님 어머니의 모습을 찾고 나서 나는 그동안 의무로 읽던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비로소 누구의 주입이 아닌 내 눈으로 성서를 읽기 시작했고, 성서 곳곳에서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모습들이 읽혀지면서 은혜가 되었다. 여성의 눈으로 성서읽기와 신학하기가 내 목회의 중요한 현장이 되고 있다.

2. 내 목회신학의 전거

 

1) 변혁의 힘을 준 마리아의 노래

나는 교회여성운동가로서, 교회목회자로서, 그리고 이주여성운동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 내 여성목회의 길이다. 내가 이런 길을 걷게 된, 목회에 신학적 전거가 된 것은 바로 누가복은 146절 이하의 마리아의 찬가다.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삶에서 울려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회의 비전이다.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이 노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마리아를 임신한 것을 알고 부른 노래로서 교회에서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함은..”하고 시작했다고 해서 마그니피캇이라고 부른다. 이 노래는 이제껏 나의 삶과 신학과 신앙을 지탱하는 큰 원천이 되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탄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마리아는 당시 여성에게 씌워졌던, 아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조라는 굴레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해방의 새날을 노래한다. 저주스러울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축복의 상황으로 변모시킨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을 꺾으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신다.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며 부요한 자를 내치신다.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는 분으로, 현재의 지배질서를 역전시키는 분으로 노래한다. 마리아는 이 노래에서 자신을 고난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여긴다. 구체적으로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성, 정치적으로 눌려 지내는 힘없는 백성,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해방을 노래한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해방의 노래 속에서 여성의 해방을 우선적으로 선포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째 이유로 하나님께서 종처럼 천대받고 있는 자신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들 인권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문제도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여성의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얘기 한다. 억압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 여성의 구원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받는 여서의 해방이 일차적으로 들려 져야 할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 마리아의 노래가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마리아가 소위 여성이기에 당하는 성의 불이익을 뛰어 넘어 해방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서 처녀로 임신했다든지, 정조관념 따위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의 가부장 질서 하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가치관을 깨뜨려버린다.

다음으로 나는 마리아의 노래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임산부인 엘리사벳이 같은 임산부인 마리아에게 해 주는 격려, 그 격려를 받고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는 자매정신의 좋은 본보기다.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격려를 해주는 일,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 주는 일, 이런 자매애와 연대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매애와 연대는 고난을 극복할 힘을 준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연대하듯 연대성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찌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여성해방을 위해 여성끼리의 연대는 특히 중요하다.

 

2. 목회란 해방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성공하는 목회와 교회성장이 직결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성장이란 교인수와 교회크기로 나타나는 물량적이고 외형적 성장을 말한다. 그런데 소위 목회에 성공했다고 하는 목회자일수록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교인수도 적고 그 교인들이 대부분 가난하기 때문에 교회가 경제난에 허덕이는 민중교회의 경우 비교적 교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져 있고 남녀평등적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목회가 무엇이며 바람직한 목회는 어떤 것인지 묻게 된다.

일반적으로 목회란 좁은 의미에서 목회자가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또는 교회를 대신하여 행하는 모든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목회자는 교회를 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환자를 찾아가 위로하고 교인들을 방문하며 성례전을 베푼다. 여기서 목회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일한다.

넓은 의미에서 목회는 섬김과 봉사(Diakonia)로 정의된다. 그래서 목회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자상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목회자상과 결합되어 특별한 권위주의적 모습을 띠게 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개념이 남녀의 성과 결부되면 하나의 성차별적 계급구조를 낳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서 남자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를 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똑같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여교역자에게 적용할 경우 글자 그대로 남자 목회자의 종 내지 교인의 종이라는 낮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한국풍토에서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자상을 강조할 때는 그 대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민중신학자나 디아코니아 신학자들은 섬김의 신학을 강조한다.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한국 목회자들에게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자 상은 매우 필요하고 적절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가 여성들 앞에서 섬김을 강조할 경우 이제껏 섬기는 존재로서 희생당해 온 여성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 된다. ‘섬김을 말할 때는 누구를 위한 섬김이고 무엇을 위한 섬김인가가 분명히 말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섬김이며 무엇을 위한 섬김이어야 하는가? 예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선적으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죄인취급을 받으며 사는 눌린 자들을 섬겨야 한다. 이 눌린 자를 섬기는 길은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눌린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억누르고 있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기에 목회는 해방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에서 눌린 자들의 표상인 민중과 여성의 인간성회복을 지향하는 민중목회, 여성목회야 말로 참다운 목회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민중목회여성목회를 특수목회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민중목회, 여성목회는 특수목회가 아니라 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과제다. 여성과 민중목회의 관점에서 목회를 할 때 전 한국기독교인들의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다고 본다. 해방이라는 목회의 관점은 민중이나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억압자들 역시 인간성이 파괴되어 있다. 이들의 인간성회복을 위해서 눌린 자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것처럼 이들의 인간성회복을 위해서 억압하려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에 목회란 총체적으로 해방하는 일이다.

 

내가 이런 목회관을 갖게 된 것은 여성신학의 영향에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가부장적이고 물량적이며 개교회중심의 기복주의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나는 한국교회의 과제를 여남평등공동체를 이루는 일,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 그리고 창조의 보전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목회도 여남공동체를 지향하는 목회, 섬김과 나눔을 지향하는 목회, 창조의 보전을 지향하는 목회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땅에서 눌린 자들의 표상인 민중과 여성의 인간성회복을 지향하는 민중목회, 여성목회야말로 바람직한 목회라는 생각으로 나는 민중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공동목회를 하고 있다. 목회자가 해방과 고난의 영성을 가지고 해방하는 목회를 한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민중교회 목회였다. 민중교회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눌린 민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며 바로 이 민중교회의 목회는 남편과 내가 섬김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택한 길이기도 했다.

 

3. 우리의 목회 현장 - 청암교회에서의 민중목회

 

1) 빈민가에 터를 잡고

우리는 소위 민중 목회자로서 막차를 탄 사람들이다. 민중교회사 분류에 따르면 제 2기말 또는 3기가 시작되는 때 목회를 시작하였다. 동구권이 무너진 후 94년을 기점으로 민중교회는 침체기를 겪는다. 교인이 줄고 재정 상태가 열악하고 민중 교회 목회자와 실무자가 소진 상태에 빠지면서 이제까지의 민중교회 정체성에 대해 흔들리는 사람들이 생겨나 민중 목회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남들은 떠나는 마당에 너희는 40살이 넘어 이 길을 시작하느냐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걱정을 들으며 우리는 민중목회를 시작했던 것이다.

맨 처음 우리가 목회할 청암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인들은 20명 남짓이었는데 야학 출신의 노동청년들과 선생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있는 산동네인 창신동 언덕의 빈민가의 어느 무허가 건물의 방 하나를 세 내어 있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좁고 허름한 공간에서도 낮에는 그 지역의 가난한 맞벌이 부부들을 위하여 탁아소를 하고 밤에는 노동청년들이 모여 독서회나 성서읽기 모임을 하고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은 적었지만 주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댔다.

많은 민중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 역시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떠나갔다. 구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몰락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대안이었던 마르크스식 분석틀을 무력화시킴으로 이들 운동가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 혼란은 민중교회에도 파급되었다. 특히 신앙성 보다는 사회 운동성이 강한 민중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 실무자들, 노동운동에 종사하던 교인들에게 대안의 상실에 따른 정체성의 위기감이 만연, 사회주의 편향적이던 진보 운동가들이 교회를 떠났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한 92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유사 민주주의의 확대 역시 민중교회에 영향을 입혔다. 노동조합이 합법화됨에 따라 그 동안 노동운동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민중교회의 필요성이 약화되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활기를 잃게 되었다. 여기에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복지정책이 진행되면서 그 동안 민중교회가 담당해 오던 빈민을 위한 탁아소나 무의탁노인센터 등의 지역선교사업을 이제는 정부 차원에서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함으로 민중교회의 입지가 그만큼 축소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와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는 그 동안 민중교회를 지지해 후원을 하던 사람들이 이탈함으로 민중교회는 재정적으로도 취약해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수적 물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에는 그야말로 노동자 중에도 힘없는 노동자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민중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민중목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로만이 아니라 민중의 편에선 목회를 한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목회를 하였다. 우리의 경제적 여건은 이미 교인들의 수준과 비슷했다. 남편이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는 30만원인데 그 사례비는 남편의 손에서 없어졌다. 나는 밤과 주말에는 교회의 부교역자로 일하면서 주중에는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에서 여성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내 월급은 60만원, 우리 두 사람의 사례비를 합쳐도 노동부에서 정한 최저 봉급에도 못 미치는 수입이었다.

목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리는 민중목회자가 되려면 삶의 여건도 그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로 이사왔다. 세놓았던 공장을 내보내고 그 공장을 베니다판으로 칸을 막아 한 칸은 낮에는 교회 사무실로 쓰고 밤에는 중학생인 아들의 잠자리로 사용했다. 다른 한쪽은 남편과 나, 딸의 침실 겸 살림집이었다. 우리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여교역자들이 우리 집에 들렸다가 많은 힘을 얻고 간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실상 나는 그곳에서 사는 게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은 판잣집에 사는 우리 처지를 가슴아파 했지만 교인들과 탁아방 자모들은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교인들과 주민들이 목회자인 우리와 자신들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걸 통해서 깨달은 것은 민중목회란 민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선교개념에 입각하여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는 창신동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정신에 입각하여 지역주민을 위한 선교활동을 실시하였다. 창립 당시부터 우리 교회의 표어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표어에 맞추어 우리 교회가 벌인 선교활동의 대표적인 것이 초창기의 재건대(넝마주의)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배공동체였고, 그후 종로5가를 중심으로 노동야학을 운영했으며, 창신동에 와서는 저소득, 한부모 가정의 자녀를 위한 탁아방과 공부방 활동을 벌였다.

부모들이 일 나간 자리에 방치된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함은 물론 거리에서 방치되었다. 또 적은 수입으로 인해 어린 아기를 먼지 구덩이인 작업장에 함께 데리고 가서 일하는 부모들, 이런 삶 속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이곳에서 탁아방과 공부방을 시작했다. 초촹기 청암탁아방은 만 20개월부터 4세까지 오전 8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전임교사와 자원 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돌보았다. 우리가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두 명의 탁아방 아이가 재래식 화장실에 빠져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돈이 없으니까 잡일은 교인들이 거들고 아는 기술자에게 부탁하여 무료로 일을 맡겼다.

그 다음 해 여름,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다. 그 어린이들 중의 많은 수가 한글을 제대로 못쓰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6학년 어린이도 있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 이 동네의 아이들은 저소득층의 부모가 맞벌이를 하러 공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와도 마땅히 공부할 곳도 없다. 아이들은 자연히 방치된 채 길에서 헤매기 마련이다. 또 이들은 잘못된 학교교육의 희생자들이다. 요즈음 학교에서는 일 학년에 들어가면 한글 기초를 가르치지 않는다. 극성스러운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글을 가르쳐 많은 어린이들이 한글을 익혀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글을 안다는 전제로 공부를 가르치기 때문에 고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우리는 이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학교를 시작했다. 대학생 자원 봉사자를 모집하여 어린이들에게 숙제와 한글, 산수 등 기본적인 공부를 가르쳤다. 청암공부방은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치 못하는 아이들, 오락실이나 어른들의 퇴폐문화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오후 2시부터 7시까지(초등학생), 7시부터 9시까지(중학생)을 돌보았다. IMF 이후에는 공부방에서 결식아동을 위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어느날 저녁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교회 앞 골목 한복판에서 놀고 있는 여자 아이 둘을 발견하였다. 어두워졌는데 왜 집에 안돌아가느냐고 물었더니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한다. 저녁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더니 굶었단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밥을 먹였는데, 그게 그 아이들이 이틀 만에 먹은 첫 끼니였다. 아엠에프 이우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버지와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돈을 2천원 주고 나가면 그걸로 하루 끼니를 때우는데, 주로 날 라면이나 길에서 떡볶이 등으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그 다음날부터 공부방에서 결식아동을 위한 밥집을 시작했다. 지금은 이 공부방이 지역아동센터로 정부의 인가를 받아 운영되고 있다.

 

3) 교회건물을 마련하고

1995년 한국교회에서 선포한 희년의 해에 우리는 교회당을 새로 마련했다. 우리 교회는 그 판잣집에 월세를 지불하고 있었는데 이 월세가 해마다 올라가서 월 80만원까지 올라갔다. 이 월세를 감당하고 탁아방 교사와 공부방 실무자의 사례비를 마련하는 것은 교인들의 힘이 아니라 순전히 목회자의 손에 달려 있다. 비록 민중 교회의 주인은 민중이라고 하지만 그 민중은 재정적으로는 책임을 질 능력이 없었다. 실정이 이러니 우리는 이 많은 월세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후원비도 줄어드는 마당이었고 월세 부담 때문에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우리는 용단을 내려 그 월세만큼을 은행에서 융자를 얻기로 하고 교회건물을 마련하는 모험을 벌이기로 하였다. 바자회, 다른 교회의 지원금, 친지의 후원금을 모았다. 이때는 교인들에게도 참여를 호소했고 일부 교인들이 이에 동참했다. 힘겹게 이층짜리 개인 주택을 한 채 사서 이사를 했다. 일단 우리 교회 건물이 생긴 것이다. 한 층에 20평짜리 건물로서 평일에는 공부방을 하고 예배처소는 주차장이었던 곳을 개조해 사용하고 2층은 외국인노동자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민중교회에 비하여 우리는 그나마 자기 건물이 있어 안정적으로 목회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4) 민중선교의 개념에서 이주민 목회를 시작하다.

우리가 외국인노동자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96년 성남의 한 양말공장에서 공장주의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국 한족 8명이 공장을 도망쳐 우리 교회로 오게 된 것이 동기가 되었다. 이들과 한달가량 지나면서 우리는 평소에 하던 질문인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민중이 누구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바로 외국인노동자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워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외국인노동자선교를 하면서 내 눈에 이게 아닌데!’하는 의문이 생겼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에 이주여성노동자들도 드나드는데, 여성운동을 하는 내 입장에서 볼 때 여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주노동운동을 살펴보면 당시 이주노동자 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단체에서 젠더 관점이 부족했다. 허긴 미쳐 성문제까지 배려할 여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 대개의 센터들이 쉼터를 하는데 여성들을 위한 쉼터는 없었다. 정말로 쉼터가 필요한 사람들은 여성들인데도 말이다. 이런 문제를 남편과 의논하고 성인지적 관점에서 외국인여성문제를 다루는 장을 따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의 집이었고, 이것은 후에 이주여성인권센터로 확장되었다.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의 집은 독일세계기도일에서 3천만원 후원을 받아 일차적으로 다세대주택 2층에서 시작하였다. 이렇게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의 집을 따로 세우면서 이주여성 선교를 시작한 이유는 이 땅의 민중이 외국인노동자라면, 그 외국인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민중이 이주여성이라는 인지 때문이었다. 이 이주여성 선교는 민중으로서의 이주여성, 여성으로서의 민중성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오늘날 한국에는 약 1백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이주여성은 약 30% 가량 된다. 노동이주여성이 15만 명 정도, 결혼이주여성이 16만명 정도, 유흥업종사자가 1만 명정도 된다. 이 이주여성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과 계급차별, 성차별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들을 섬기는 것이 민중목회와 여성목회 현장으로서의 나의 중요한 목회현장이 되고 있는데, 이주여성 목회를 하면서 나는 이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대접을 받으며 사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본회퍼의 말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목회를 하고 있는 셈이다.

 

3. 페미니스트목회 현장

 

나는 청암교회 목회현장에서는 여성목회의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 그것을 나는 페미니스트 목회라고 부른다.

 

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공동목회를 시작하고

 

(1)목회에서의 동등성.

처음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회법상으로 나의 남편이었다. 당회가 없는 교회는 미조직교회라 해서 한 명밖에 안수를 받을 수 없었다. 나는 10년 전에 이미 목사고시에 합격하여 준목이 되어 있었는데 뒤늦게 신학을 한 남편이 먼저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교회가 목회자로 초청한 사람은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공동목회를 한다는 정신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사실 남편과 나의 공동목회는 부부가 하나는 목회자로, 하나는 사모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목회선상에서 파트너쉽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하나의 실험대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동역자로서 목회 전반에 걸쳐 공동으로 해 나갔다. 교회의 운영은 물론 설교와 목회상담 등의 일을 나누어 하였다. 그 결과 우리 교인들 역시 나와 남편의 역할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왔다. 1996년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를 설립하며서 남편이 소장 일을 맡고 내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었다. 준목이 된지 16년만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것이다. 내가 남자였다면 벌써 오래 전에 목사가 되었을 텐데, 결혼을 하고 민중교회에서 일하다 보니 목사가 될 수 없었고 겨우 남편이 일할 목회지를 찾은 후에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삶에서의 동등성

목회선상에서 동등한 동역자로 일함과 동시에 우리는 삶에서 진실한 동반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삶을 보고 감동을 받아야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하는 인권운동가나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경우 남녀평등의식은 갖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인식은 남녀평등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목회와 운동을 무기로 부인의 희생을 간과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가사와 육아 등 모든 면에서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평등한 부부로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평등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 부부의 이런 모습은 새로 결혼한 부부들에게는 한 이정표가 되고 교인들에게는 자극제가 되는 듯하다.

 

2) 평등과 나눔의 예배

(1)성평등을 지향하는 예배

우리는 교회에서 성차별적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설교 시에는 가부장적 본문을 사용하지 않음은 물론 예배문에서 성차별이든 인종차별이든 간에 모든 차별적인 용어를 평등적인 용어로 수정하여 사용한다. 남편도 성차별적 언어를 안쓰려고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 그러나 몸에 배인 가부장적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설교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러 놓고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면 한 목사한테 혼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도 되시고 어머니도 되시는 분이지요하고 해명하는 일도 있다. 우리 교회 설교시에 자주 인용되는 용어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두가지 면에서 강조하는데 하나는 민중인 우리 교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강조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교인들은 보수적인 신앙의 뿌리가 없이 우리 교회에서 하는 야학을 통해 교인이 된 사람들이라 기성교회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목회 방침에 별로 이의가 없다. 우리 교인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 특히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고 믿는다.

 

(2)평신도가 골골루 참여하는 예배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교인들에게 예배 순서를 분담시켰다. 일반 교회에서는 예배순서를 대부분 교역자와 장로들이 독점을 한다. 대부분의 민중교회가 그렇듯이 우리 교회 역시 목회자가 예배를 독식하지 않고 평신도가 골고루 참여한다. 비록 세련되지 못하고 가끔 실수도 많지만 예배의 사회, 기도, 성경봉독 등을 평신도가 함으로 평신도들의 예배참여도를 높이고 지도력을 키우려 하였다. 예배순서를 분담시키는 것은 교인들의 지도력을 키우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나 여성교회처럼 설교 후에 교인들과 그 설교에 대한 응답을 나누는 일까지는 못하고 있다. 이걸 몇 번 시도하였는데 교인들이 너무 부담을 느껴서 설교시간에 질문을 하고 의견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시도해 보려고 한다.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듣기만 하는, 설교를 교인들과 나누지 못하는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밖에 우리 교회의 예배가 기성교회의 예배와 다를 것은 예배순서가 획일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찬송가 외에 일반교회에서 애창되는 복음성가보다는 의식을 깨우고 공동체성을 키우는 노래들이 불려진다. 또한 성서는 새번역 성서를 읽는다. 이는 새번역성서가 비교적 성포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역이나 공동번역에서 형제들아하고 번역된 부분을 표준새번역은 형제 자매 여러분하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례전에서는 성례전 보다는 애찬식을 주로 한다. 교회법에는 세례교인만 성례전에 참여토록 되어 있어 우리는 모든 교인을 소외시키지 않게 위해 애찬식을 진행, 아기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 교인이 참여하게 한다. .

 

우리 교회의 예배는 예배 후 공동식사를 함께 하는 것까지를 예배로 포괄하고 있다. 이 애찬 준비는 남자와 여자가 한 팀이 되어 준비를 한다. 목사네 가정도 예외가 아니어서 순서에 따라 당번을 해야 하는데 내가 음식준비를 하면 남편이 설거지를 한다. 한 보수교회에 다니던 교인이 우리 교회에 와 보고는 목사가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하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한 일이 있다. 남자가 그것도 감히 목사에게 설거지를 시킨다는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목사가 설거지를 하니까 아무리 가부장적인 남자라도 설거지를 안할 수 없다.

이렇게 교회에서 공동식사 준비를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하다보니 밥 짓는 일은 여성만의 일이라는 편견이 없어지고 이일을 통해서 교인들은 가정생활에서도 가사가 여성의 일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서로 가사 일을 나누어서 하는 데로 발전했다. 그리고 목회자인 우리 자신도 교인과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자칫 빠지기 쉬운 목사로서의 권위의식을 털어버리는 연습을 한다.

한편 우리는 교회의 문제는 전교인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일반교회는 제직회나 세례 교인들로만 구성된 공동 의회를 통해 교회 일을 결정하지만 우리는 전교인회의를 연다.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고 다수결보다는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까지 회의를 한다. 이 전교인회의를 통해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기회가 주어지고 이를 통해 회의하는 연습도 하게 됨으로 직장이나 다른 모임에 가서도 자기 의견을 제시할 줄 알게 된다. 결국 전교인회의는 교회의 민주화와 아울러 교인의 지도력을 키우는 중요한 장이 되고 있다.

 

(3)파트너쉽을 지향하는 교회공동체

한편 여남공동체를 지향하는 목회를 위해 나는 남자와 여자의 평등성에 관심하고 특별히 파트너쉽 형성에 관심했다. 파트너쉽 형성을 위해 두 분야에서 노력하였다. 첫째는 내가 남편과 목회선상에서 파트너쉽을 이룬다는 것이요, 둘째는 목회자와 교인간에 파트너쉽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사실 남편과 나의 공동목회는 목회선상에서 어떻게 파트너쉽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대이기도 했다. 내가 목회선상 뿐 아니라 나의 가정의 삶에서도 파트너쉽이 일어나도록 애썼는데 이는 파트너쉽이 목회선상에서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위선이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목회자와 교인간에 파트너쉽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예배순서를 교인들과 분담했다. 예배순서를 분담한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권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 양성의 문제다. 한국교회에서 예배는 권위의 상징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신성한 예식이기 때문에 아무나 맡을 수 없고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성직자와 장로가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권위주의는 예배를 정점으로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특정인에게 독점되어 있는 예배를 일반 평신도와 나눈다는 것은 권위를 나눈다는 것이요, 목회자와 평신도간의 파트너쉽을 이루는 한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예배순서를 나누고 예배의 내용이나 의식에 성차별적 용어나 상차별적 본문을 다루지 않거나 또는 차별적인 본문을 재해석해서 설교하는 것은 교회가 명실공히 평등한 교회공동체가 되는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가부장성은 설교를 포함한 예배의식을 통해 강화되기 때문이다.

 

(4)성역할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파트너쉽

한편 남자와 여자, 목회자와 교인이 함께 하는 공동식사 준비는 목사와 평신도간의 권위주의를 깨뜨리는 일을 할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파트너쉽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성역할 분담은 고질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많은 교회에서 여성들이 여전히 교회의 주부 노릇에서 못 벗어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여성들이 결의기구에 참여하고 마가복음 14장에서 처럼 여성들이 한 일을, 여성들이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한 노력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인정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여성의 영성으로 신학을 하고 자율적인 존재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에서 여성의 자율적 영성이 메말라지고, 여성이 2차적인 존재로 차별받는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왜 여성에게 더 이상 복음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5. 민중교회, 여전히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대안

 

1)한 민중목회자의 고백

 

나는 목회를 해방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 해방하는 일을 위해 민중교회에서 섬김과 나눔, 평등한 여남공동체의 형성, 창조의 보전을 지향하는 목회를 추구했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목회자로서의 내 역량 부족과 아울러 민중목회라는 것에 대해 한계를 느끼게 된다.

섬김과 나눔의 목회를 지향했지만 실제로 지역을 향한 섬김과 나눔으로서의 선교는 엄밀히 말하면 목회자의 프로그램에 불과할 뿐 교인의 활동에까지 이르지 못했고 섬김과 나눔의 사람들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선교의 거룩한 정열에 불붙어 있는 교회, 살아 움직이는 건강한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 민중교회운동이고 그래서 선교와 목회, 생활과 신앙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공동체, 하나님을 섬기듯 하나님의 백성인 민중을 섬기는 공동체, 말씀을 나누고 삶의 기쁨과 보람, 고통과 애환까지도 함께 나누자고 다짐했던 공동체 운동이 민중교회의 지향점이었는데결국 민중교회 목회자로서의 정체감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희박했다. 섬김과 나눔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고백은 하지만 그 고백대로 살지를 못했다. 개교회주의와 대교회주의가 확고하고 물량주의와 기복주의,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민중교회와 함께 하려는 교회가 너무 적은 한국교회 풍토에서 오늘날 순교는 민중교회에서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 목회자도 있다. 그러나 나는 순교자적 열정을 가지고 전문적으로 민중목회를 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한다는 사람들의 각광을 받으며 아마추어처럼 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민중교회에 대한 비전과 전망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2)그래도 여전히 민중교회는 교회개혁의 대안이다.

 

대부분의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민중교회가 자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가족이 딸리고 자녀들이 자람에 따라 생활고 때문에 민중목회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민중목회자들은 여러면에서 목회에 대한 대안 모색을 하는 과정에 있다. 기성교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교회성을 재평가하고 영성운동과 목양적 목회에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교회의 특성은 민중선교에 있기 때문에 목양적 목회보다는 기왕에 해 오던 선교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으로 정리되면서 그 선교적 이념은 복지사회로의 편입을 맞아 기존의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디아코니신학적 입장에 선 민중복지선교 차원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편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한국민중목회자협의회, ‘기장민중교회운동연합생명선교연대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를 보고 민중목회자들이 민중교회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는데, 이는 오히려 민중목회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 민중교회는 민중을 계급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목회와 선교를 해왔는데 이제는 민중 그 자체의 생명을 사랑하고 만중과 같은 약자의 처지에 있는 생태계까지 포함해서 생명적 관점에서 민중목회를 넓혀 가겠다고,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과 연대의 틀을 넓혀 가겠다는 뜻이다.

민중교회가 현재로는 비전과 전망이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중교회가 여전히 억압적인 한국교회 풍토에서 교회갱신의 강력한 대안이며 민중목회는 해방목회의 대안이라고 믿는다. 너무 지쳐 민중목회를 포기할 마음이 꽉 차있을 때 한 여교우의 기도에서 나는 민중목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다시 힘을 얻었다. 그 교우는 풍물을 배우러 우리 교회에 왔다가 교인이 된지 3년밖에 안되었는데 그녀의 기도에는 예수를 닮고자 하는 마음, 섬김과 나눔의 삶, 공동체를 추구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한 관심이 들어있었다. 그 관심은 작게는 자기 식구로부터 자기가 속한 청암이라는 우리 교회공동체와 크게는 북한에 있는 동포와 외국인노동자에게 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 관심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신이 아끼는 것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는 이 기도는 혈연가족을 넘어서는데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기도에는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가 그대로 살아있었고 우리가 강조한 섬김과 나눔의 목회의 비전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기도를 들으며 나는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고 민중목회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비록 지금은 비전이 거울처럼 희미하나 민중교회는 여전히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대안이다.”라고!

 

상심할 때, 절망할 때, 위로와 희망으로 오시는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 두렵고도 기쁩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고, 닮고 싶은 소망들로 모여 드리는 이 예배가

당신께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머리의 판단만큼 가슴이 따라가지 않고,

마음 먹은 대로 행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제,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변화되고자 다짐을 합니다.

아직은 주는 사랑에 몹시 인색하지만,

주님 닮은 품성을 가꾸어

내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랑이 되고자 소망합니다.

아직은 불쑥 상처 주는 말로 상대를 상심케 하지만,

내가 먼저 손 내밀어 화해를 이루고

모든 갈라진 곳 틈새 메꾸어 가는

아주 작은 예수 되기를 감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외치는 사랑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아주 작고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청암의 형제자매를 내 몸처럼 아끼는

작은 사랑부터 충실하게 하소서.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

겨레의 고통도 내 고통이 되고 동포사랑과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의 고통도 내 혈육적 고통이 되는

크고 올바른 사랑으로 성숙하게 하소서.

조그만 일에도 감동할 수 있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감당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생활 속에서

당신을 느끼고 만날 수 있을 만큼 감각이 열리고

마침내 우리 삶 자체가 아름다운 감사와 기쁨일 수 있게 하소서.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목사님께

건강과 지혜와 사랑이 더욱 넘치게 하소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나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1997922일 추수감사절 예배시간에 한

우리 교회 한 여교우의 기도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