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종려주일에 생각하는 민중의 가능성과 딜레마

한국소금 2019. 3. 25. 16:12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인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군중들과 어린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하고 환영한데서 유래한다. 우리가 종려주일을 지키면서 몇가지 우리 신앙의 자세를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 가다듬어 보자.

첫째는 어린나귀를 바치는 사람에 대한 신앙이야기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분부대로 마을로 들어가서 어린나귀를 풀려고 하자 그 나귀의 주인이 왜 새끼나귀를 푸느냐? 하고 묻는다. 주님께서 쓰실려고 그런다고 하자, 그 나귀의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내어준다. 이 이야기는 그 나귀 주인이 예수님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준다. 주님께서 쓰시려고 한다는 말 한미다로 자신의 것을 스스럼없이 내어줄 수 있는 이 주인에게서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또는 안간관계를 맺으면서 얼마나 따지고 재고하는가? 진정한 신뢰, 신앙관계란 이런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둘째, 참된 지도자 상, 통치자 상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이것은 위엄 있는 말을 타고 입성하는 당시의 군주 상과 매우 대조적이다. 여기서 어린 나귀란 겸손의 상징이다. 세상의 통치자는 군림하기 위해 거창한 기마를 타고 오지만,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겸손하게 오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몰랐다. 그래서 호산나 호산나 하고 만세를 부른다. 예수님을 세상적 권력을 가진 지도자로 왕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렇게 힘 가진 통치자를 원하는 군중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런 지도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평화의 길을 모르는 도시라고 한탄하신. 참된 지도자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통치가 아니라 겸손을 바탕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참된 지도자요, 통치자의 모습이다. 평화를 모르는 백성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의 예루살렘 입성이야기에는 이렇게 겸손한 지도자, 섬기는 자로서의 지도자 모습을 밀알의 비유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스라렐 정치의 회복과 영광을 꿈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은 밀알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은 섬기기 위해 온 지도자임을 각인시칸다.

영광을 받되 그 영광으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자가 영광받을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섬기려는 사람은 나를 따라 오너라.” 섬김과 고난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이 그를 높여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예수에게 인간적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간다. 반대로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겨났으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무서워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성서는 이들이 회당에서 쫒겨날까봐 그랬다고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사람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광은 배치된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들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더 존중하고 따른다. 우리 정치사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최근의 탄핵사태도 그렇다. 아예 백성의 뜻을 자기 멋대로 읽고 탄핵정국을 만든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그게 불의한 줄을 알면서도, 당에서 쫒겨날까봐 탄핵에 임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따른 결과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는 일이다. 올바른 소신을 갖는다는 것, 그 소신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보다 사람이 무서워 소신을 굽히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가 세워지지 않는다. 눈치를 보려면 하나님 눈치를 보자.

 

오늘 읽은 성서의 뒷이야기를 보면 오늘의 세태가 잘 드러나 있다. 무리가 예수를 따르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젠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하고 걱정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자기들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소위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없애려고 하지만, 백성이 예수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지 못했다는 이야기(누가 19:48). 백성의 소리에 지도자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지도자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해도 민중들의 소리를 이길 수는 없음을 증언하고 있다. 민중의 행태가 역사를 가늠하는 줄이 됨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언제나 민중이 옳은 편에 서는 것은 아니다. 민중은 우매하기도 하다. 예수의 처형은 민중의 동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중의 힘을 의식한 유대 지도자들은 민중을 호도해서 결국 민중이 자기들의 편에 서서 예수를 죽이는데 가담하게 만든다. 여기에 민중의 가능성과 딜레마가 있다.


200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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