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 할 때 개죽음과 거룩한 죽음으로 나눕니다. 개죽음이란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죽는 경우이고, 거룩한 죽음이란 남을 위해 죽는 경우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거룩한 죽음 보다는 개죽음의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예기치 못한 수재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소방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고 감금되다시피 살다가 불에 타죽는 경우, 요즈음 세간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는 연쇄살인범의 마수에 걸려서 재수 없게 죽은 사람, 순간적으로 찌른 칼에 맞아죽는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도저도 아닌 죽음이 있습니다. 병으로 죽거나 교통사고로 비명황사하거나 심장마비 등으로 순식간에 삶을 하직하는 죽음 등, 여러 가지 죽음에 있습니다.
거룩한 죽음을 제외하고 이러한 죽음을 예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자신의 죽음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보통은 자기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심지어 병원에서 암으로 앞으로 얼마 못 산다고 선고 받는 사람들조차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려고만 애쓰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정말로 허망하게 죽습니다.
불가의 선승들에게는 오도송과 열반송을 읊는 전통이 있습니다. 오도송이란 출가 이후 수행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기쁨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한 노래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회개하고 새 삶을 살게 될 때 기뻐하는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열반송이란 죽음을 맞을 때 한 생애를 통해 지닌 깨달음을 읊는 시인데, 몸을 벗고 새로운 세계를 고요하게 맞아들이는 감사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송은 집에서 죽는 사람들의 유언과는 격이 다릅니다. 유언은 미완의 과거에 대한 정리차원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깊게 남아 있고 들어주는 이가 있어야 하지만 열반송은 듣는 이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고 맞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해탈은 불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고행이 아닌 기쁨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란 “내 인생이 알고 보니까 내 것이 아닌데 내가 집착하며 살아왔구나”, “나를 버리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구나” 하는 깨달음에 다름 아닙니다. 지금 내가 있는 것은 내가 잘나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 은총에 감격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남에게 은총을 베풀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순간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나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게 됨을 뜻합니다.
깨달음이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어디에서 살아왔던가를 아는 사건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주소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이 불러주는 내 이름, 내 몸과 재산, 직업과 전공이 자기 자리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그 본연의 자리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본연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우리의 삶이란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그의 죽음은 그의 삶을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눅 23:46),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했고, 스데반은 “주 예수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행 7:60)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본문 앞에서 사람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이를 갈았습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고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짤막한 한 마디가 그 분들의 삶을 함축한 열반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다 이루었다”하고 열반송을 읊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삶에, 나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요새 저는 요가를 배웁니다만, 그 요가에서는 요가를 잘 하겠다고 지나치게 열심을 내는 것도 욕심이고 집착이라고 하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의 사람과 비교하면서 기를 쓰는 내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욕심을 버려야 되는 일에도 욕심을 내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와 죽음은 번개처럼 옵니다. 그 번개 같은 죽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삼차원의 공간과 시간의 유한 속에 속지 않고 영원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매일의 삶에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고 그 날을 충실히 삶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언제 불러 가실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졸지 말고 깨어 있어라!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날그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단지 그날 하루를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총의 하루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고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사람은 그날 만나는 사람에게 분노를 품을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사람에게 쌓아두려고 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내 삶에 집착하지 않는데, 욕심을 낼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죽을 때에 할 말이 “ 다 이루었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라는 기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말이 “내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매일 최선을 다하면 사십시오. 이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2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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