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버리는 생명사랑
오염된 낙동강에서 잡히는 잉어는 암수 구별이 불가능할 만큼 중성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지천으로 나던 낙동강 재첩은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유명하던 낙동김은 상표만 남은 채 이미 낙동김이 아닙니다. 낙동강 하구에서 나는 낙동김을 먹는다면 우리는 중금속덩이를 삼키는 꼴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중금속으로 오염된 낙동강 물은 흘러 바다로 갑니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어패류(생선, 조개, 굴, 김, 미역, 다시마, 게 등등)에 중금속이 누적됩니다. 그것을 새도 먹고 우리도 먹습니다. 그것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입니다.
엄마의 젖에서도 태아의 탯줄에서도 환경호르몬이 검출됩니다. 디디티의 영향으로 가덕도 들쥐는 이미 생식기능을 잃었습니다. 먼 미래의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급진적 생태주의자가 협박을 하느냐고 눈을 부라립니다. 또 배부른 소리한다고 나무랍니다. 예, 그렇습니다. 서울 역 노숙자가 이 추운 겨울 죽어나가고, 수많은 실직자들이 어려운 삶을 비관하며 죽어 가는데 배부른 소리 맞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달려왔습니다. 삶의 여유 없이 찬란한 내일을 기약하며 그렇게 달려온 곳이 지금 이곳입니다. 그렇게 달려가다 보면 무릉도원이 우리의 행복을 담보해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땐 허리끈 풀고 행복에 겨워하며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행복하십니까? 행복살이 그만큼 나아지셨습니까?
세계 곳곳에는 기상이변으로 가뭄과 물난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플로리다반도에는 허리케인이 그칠 줄을 모릅니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 고산지대의 설산이 녹아내려 바다의 해수면이 높아져 태평양의 낮은 섬나라는 수몰되고 있습니다. 동남아 지역에는 쓰나미가 인간의 삶터를 흔적도 없이 훑어가버렸습니다.
이게 먼 나라 남의 일일까요? 우리의 해안은 충분히 높습니까? 우리나라의 평야지대와 강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까? 만약에 해수면이 높아지고 해일이 몰아치고 예측하지 못한 폭우가 쏟아진다 해도 우리는 안전할까요?
소의 뼈와 내장을 갈아 사료로 만들어 먹인 비육우는 광우병으로 발작을 하고, 그러한 고기를 먹은 사람들도 이름 모를 병에 걸립니다. 가축의 구제역과 조류독감은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려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느냐’며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도 될까요? 극단적 생태주의자의 협박에 불과한 것일까요?
우리는 지율스님의 외침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감사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율스님은 앞뒤 생각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들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메신저이자 제동장치입니다. 그래도 근시안인 인간들이 애써 무시하니까 그러한 무지를 깨우치고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던져서 우리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스님을 비판합니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요. 타협의 여지없는 외곬수라고요. 저는 스님이 고맙고도 감사할 따름이며, 그러한 용기와 신념에 마음 속 깊이 존경을 표합니다.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시고 많은 국민들이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목숨 걸어 외치는 스님에게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개발과 환경보전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환경보전의 문제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이는 삶의 질이나 사치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빚진 우리들 감사는 못할망정 '미친 중년(?)'이란 욕질일랑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나중에 후회해도 이미 그땐 늦습니다.
지금까지 지율스님의 외침에 무심하였던 종교인, 환경단체, 정치인, 학자들 모두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율스님 앞에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자비를 베풀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저토록 충실한 실천적인 신념가인 지율스님에게 필자 역시 무한한 존경심과 실천에 인색하였던 자신에게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생명에는 대안이 있을 수 없지만, 정책에는 대안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오마이뉴스 김재규기자의 글)
지율스님의 96일째 단식은 인터넷 주요 인기검색어에 올라있을 정도로 세인의 관심을 끕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율스님이 언제 죽는지에 호기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율스님은 죽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생명이 사는 세상을 만들고 그로 인해서 나도 사는 그런 생명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중심으로 모든 잣대를 재려고 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적이고 개발주의적 생태관으로는 도룡롱이 사는 늪지가 있는 천성산 보전을 위해 목숨을 거는 스님을 이해하기 어려울줄 모릅니다. 중생과 나, 벌레와 나를 동일시하는 불교의 가치관이 미물이 단순한 미물이 아니라 내 형제요, 자매요, 친구이기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결심을 하고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고별사의 한 부분입니다. 이 고별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장 13절).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고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예수님처럼, 지금 이순간에 친구인 자연세계를 위해 지율스님의 목숨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조계사에서는 범교단 종교인들이 지율스님의 생명사랑을 위한 자기희생에 몸으로 동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도룡룡살리기”로 상징되는 청성산터널공사 중단을 위해 자기목숨을 내놓은 지율스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그 기도현장에는 참석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모아 지율스님의 생명을 위해 , 이 땅의 생명평화를 위해 기도드려야겠습니다.
2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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