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두 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한국소금 2019. 3. 26. 16:05

두 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이야기 하나: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를 어떻게 만날 수 있나?

 

톨스토이의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글이 있다. 어느 마을에 마틴 아브제이치라는 구두수선공이 있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다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포자기 하고 살아가다가 한 순례자를 만나게 된다. 그 순례자의 권고로 성경을 읽으면서 마틴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어느날 저녁 일을 끝내고 밤늦게까지 성경을 읽었다.. 누가복음 6장을 일고 있었다. “나보고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치 않느냐? 내말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 그렇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 그리고 7장을 읽어나갔다. 죄인이라고 불리는 한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붓고 발을 머리털로 닦자 바리새인이 비판한 아야기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마틴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할까? 하고 생각에 잠기다가 잠이 들었다. 그때 마탄은 누군가가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다. ”마틴아, 내일 창 너머로 길을 내다 보아라. 내가 올 터이니..“

 

다음 날 마틴은 난로에 불을 피고 아침부터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밖을 내다보니 옆집 가게 주인이 인정상 저택관리인으로 데리고 있는 한 늙은 퇴역군인이 청소를 하고 있엇다. 추운 날씨에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그 노인이 안스러워 자기 구두 수선소에 불려 들여 뜨거운 차를 대접했다. 그 퇴역군인은 덕분에 마음도 따뜻해졌다고 하며 일어서 나갔다.

한 길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어두워지는데 원 여자 하나가 다 헤진 신을 신고 얇고 초라한 옷차림에 간난 아기까지 데리고 벽에 기대어 떨고 있엇다. 아이는 계속 칭얼대었다. 마틴은 이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빵과 스프를 데워서 주었다. 어느 집 식모로 가려고 하는데, 아기가 있어 힘들다고 하였다. 마틴은 집을 뒤져 낡은 외투를 꺼내 아기를 감싸라고 하고, 전당포에 맡긴 목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약간의 돈을 주었다. 여자가 나가자 마틴은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하면서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눈 여겨 볼만한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사과장수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 할머니가 사과광주리를 어깨에 매려는 순간 한 사내아이가 사과 한 개를 집어 들고 도망가려고 하다 할머니에게 잡혔다. 아이는 도망치려고 하고 할머니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이가 대들자 할머니는 아이를 경찰에 끌고 가겠다고 하여 실랑이가 벌어졌다. 마틴은 나가서 할머니에게는 아이를 용서하여 주리고 하고, 아이에게는 자기가 할머니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였다. 아이는 울면서 사과를 하였다. 할머니는 그렇게 하면 아 이 버릇이 나빠진다고 고집하다가 자기 손자를 생각하고 아이를 용서하였다. 할머니가 사과부대를 메고 가려고 하자 아이가 자기가 메고 가겠다고 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떠났다. 이 모습을 보고 수선소로 돌아온 마틴이 램프에 불을 켜고 성경을 펼쳤다.

 

그때 조용히 소리가 들렸다.“ 마틴, 마틴, 너는 나를 모르겠니?..네가 오늘 만난 사람이 나다. ” 그러자 퇴역군인, 갓난 아기를 안은 여인, 사과장수 할머니와 소년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틴은 너무 기뻐 성경이 펼쳐진 곳을 읽기 시작했다. “ 마태복음 25장의 말씀,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으니...그리고 끝부분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틴은 깨달앗다. 확실히 구세주가 마틴을 찾아왔고 마틴은 구세주를 대접했다는 것을 ..

 

톨스토이의 사랑이 깃든 곳에라는 글은 우리에게 많는 점을 시사해준다.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기다린다고 모든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아기 예수는 특별한 존재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틴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 이웃에 있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힘없고, 가난하고 헐벗은 자로 오신다. 우리가 이름만큼 유명한 예수를 만나기 원한다면, 그 예수는 만날 수 없다..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도움을 주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이웃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지극히

 

이야기 둘: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기다림 이야기

 

우리가 두 번째로 읽은 본문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둘째 이들이 먼 곳에 가서 갖고 간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급기야는 돼지치기로 들어갔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혐오해서 먹지도 않는 고기이니만큼 둘째 아들이 돼지치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인생중에도 막바지 인생에 접어들었음을 상징한다. 자기 인생이 이토록 곤궁하게 되자 그제서야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가득한데 타국에서 배고파 죽게된 자기의 처지를 돌아보고는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집에 돌아가 자기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써주십시오.”

 

언뜻보면 이 이야기는 돌아온 아들에 초점이 맞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부터 아버지는 동구 밖에 나가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먼 발치에서 보이자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입 맞춘다. 미운 감정보다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잔치를 연다. 여기서 측은이란 단순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다. 성서의 어원을 살피면 측은함을 나타내는 성서의 어원은 자궁 또는 태.”에서 찾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생각하는 그 상태가 마치 <자궁이 떨리듯>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는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에 가깝다. 엄마가 자식을 자긍에 품고 기르면서 그 자식을 애타게 사랑하듯 그런 연민으로 아들을 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집 나간 아들을 기다렸다가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대림절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대림절이란 이 땅에,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이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의 계절이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자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우리를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기다림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 사건인 것이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하도 애타서 이 땅으로 우리를 찾아 나선 사건이 바로 크리스마스다.

 

많은 사람들이 대림절에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은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 대림절이기도 하다..

 

2008년 대림절에 우리의 일상에서 부딪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사랑을 베풂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를 만나자. 또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대림절에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를 하자.

 

2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