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족”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혹은 ’어머니‘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들은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혈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만들어진 공동체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자기의 자녀로 받아주시고,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어머니)라고 부르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한 어버이로 모신 한 가족이 된다. 이러한 공동체를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을 어버이로 모심으로써 우리는 ‘하나이신 하나님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에베소서에는 성령이 우리 모두를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셨다고 말하고 있다(엡4,3).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 이라고 말하고 있다.(엡4,4∼6) 그런데 이 하나님은 만유(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
우리는 때로는 이미지를 상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받는다. 상상해보라. 성령이 우리 모두를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셨다고 말하고 있다.(엡4,3) 하나님의 큰 두 팔을 벌리고 계신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가 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리는 한 공동체,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같이 있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우리가 축복기도를 나눌 때의 이미지를 상상해보자. 우리 모두가 양팔을 벌려 손을 잡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두 손을 벌려 우리와 손을 잡고 있다. 하나님의 따듯한 기운이 우리의 손을 통해 전해진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안쓰러운 마음이 전해진다. 옆 사람의 고통스런 마음, 옆 사람의 기쁨에 겨운 마음이 느껴지고,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어 고민하는 것도 느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해 미운마음이 들지만 미워하지 못하는 아픔도 느껴지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마음도 느껴진다. 에베소서 4,6에 “하나님은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모인 전체가 하나님을 구성하는 전체는 아니지만(하나님은 만유위에 계시고) 손을 잡고 있는 우리를 통하여, 손을 잡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심이,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이미지를 그려보자.
국악에서 ‘줄꼬기’하는 장면을 연상해보셔도 좋다. 하나의 깃대에 여러 갈래의 줄이 걸려있다. 우리가 그 줄을 잡는 순간 우리는 ‘줄꼬기’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가 줄꼬기에 참여할 때 저 반대쪽에서 줄을 잡은 사람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줄을 통하여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 줄이 엄마와 아이를 연결해주는 ‘탯줄’로 상상해보자. 하나님(엄마)을 통하여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다른 아이의 아픔이 탯줄을 통하여 느껴지고, 나도 동시에 맘이 아파진다. 나의 기쁨이 탯줄을 통하여 전달되고 그것을 받은 아이의 기쁨이 느껴진다. 에베소서에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엡4,4∼6) 하신 것처럼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아이임이 느껴지는가? 하나님의 태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이다.
내가 좀 전에 “하나님을 어버이로 모심으로써 우리는 하나이신 하나님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라고 말한 것은 모두 이런 뜻이다. 우리 한명 한명이 하나님을 어버이로 모심으로써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지고, 하나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아프리카에서 목마른 사람의 심정이 느껴지고, 팔레스타인의 가자에서 포탕에 자식을 잃은 사람의 비통함이 느껴지고, 용산에서 불에 죽은 철거민의 아픔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 하나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이런 소통과 마음의 전달이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만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존재와 소통하고 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아쉽게도 슬픔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한계 때문이다. 자비의 마음은 자궁이 떨림같이 아이를 가졌을 때의 기쁨과 아이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슬픔이 다같이 느껴지는 것이라고 영성가들은 말한다. 그런데 저는 유독 슬픔에 민감하고, 고통만을 말할 때가 많다. 아마 제가 상처받은 게 많아서 상처에 너무 민감한 게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여러분들은 슬픔과 고통뿐만 아니라 기쁨과 감사에도 민감해지기를 바란다. 하나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기쁨도 느끼길 바라고, 나의 손을 잡고 있는 만유의 존재로 인한 지지감도 느끼길 바라고, 꽃샘추위에 고생을 했어도 서늘한 봄날 이겨내고 초여름 예쁜 꽃을 피어낸 봉숭아 뿌듯함도 느끼길 바란다. 우리 주변에는 기쁨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선생님께 칭찬받아 한껏 뿌듯해진 초등학생 아이의 기쁜 마음도 느끼길 바라고, 아프다던 친구가 훨훨 털고 일어난 모습에 기뻐하는 사람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몸 안에서 이러한 기쁨이 여러분 마음에 희망을 주는 자양분이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한 몸으로 사는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하나님 가족의 대표적인 표현체는 ‘교회’다. 하나님을 어버이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같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이런 기쁨을 같이 느끼고 감사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의 다른 표현이다. 교회를 통하여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소통되고, 넘치기를 기도하자. 예배를 중심에 두고, 여러분의 삶의 기쁨과 아픔을 같이 나누기를 원한다. 이러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자궁 안에 있는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소통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교회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시간을 내시기 바랍니다. 같이 예배드리고, 같이 기도해주고, 찬양하고 노래하는 가운데 기쁨을 같이 나누기를 바란다. 올 한해 교회를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몸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이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시작을 기뻐하고, 삶을 같이 나누는 날이다. 하나님의 몸에 참여하는 우리는 매주일이 설 명절이다. 하나님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기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설명절의 기쁨이 오늘, 그리고 매주일 우리들의 예배 속에 넘치기를 기도하자.
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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