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서 구하옵소서!”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중 마지막 간구다. 주기도문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하는 찬송에서 시작해서 “악에서 구원하여 주소서!”하는 간구로 끝이 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에 관한 부분과 인간에 관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님에 대한 부분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부분에 와서는 일용할 양식의 간구, 죄의 용서에 대한 간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원해주십사 하는 간구다. 이 인간의 간구에 대한 것을 보면 물질적인 것과 인간관계에 대한 것으로 인간의 삶을 폭넓게 집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하는 기도로 끝나도 될 법한데 굳이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로 끝을 맺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의 삶의 영역이 물질적이고 인간관계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인간들의 삶을 파괴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그 뒤에 악마적인 존재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도록 축복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모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없도록 누군가의 빵을 강탈하는 배후에는 악이 도사리고 있고 악령의 지배를 받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서로 용서하며 살도록 하셨는데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적대하며 사는 것은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악의 세력이 존재하는데, 이 역시 악령의 지배를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되는데, 시험에 넘어가고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 뒤에 악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악의 힘, 악령의 힘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이런 ‘악, 악령이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예수께서 당부하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을 악에서 구해주소서!”하고 기도할 때, 그 주기도문에서 말하고 있는 악은 무엇인가? 이 악은 철학이나 관념적으로 말하는 악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악을 말한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 취급당하는 생명경시풍조, 이웃에서 병원비가 없어 죽어가는데 초등하고 다니는 자식의 생일파티에 1천만원을 쓰면서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 하는 부자들의 막가파식 삶, 관상용 물고기 수족관에 넣는 화학물질을 사람이 먹을 횟감용 활어회 수족관에 넣는 횟집사람들, 아이들 먹을 과자나 음식에 원가를 줄이겠다고 몸에 나쁜 화학물질을 첨가하는 제조사들을 비롯해서 돈을 삶의 최대가치로 삼고 소유욕에 불타올라서 공동체의 안위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힘 때문에, 돈 때문에 힘없는 아이들을 왕따시키고 괴롭힌다. 십대 소년 소녀들이 자신의 급우를 납치해 집단 성폭행 하고 성매매업소에 팔아넘기는 일들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면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요즈음 이런 악한 행동들이 점점 일상화되고 있으며 양심들이 점점 무디어가고 있다.
이런 것들은 개인의 악이라면 구조적인 악도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뜨겁게 일구고 있는 용산참사사건, 미디어 법 개정사건, 강 살리기가 아니라 사대강에 빠져죽을 지경인 사대강 개발 사건, 교육감이 미워서 가난한 학생들의 무료급식 예산을 전면 삭감해버린 경기도교육위원들의 행태, 북한의 어린이들이 굶주리는데 정치적 입장 때문에 기아를 외면하는 반인권적 통일부의 행태 등 구조적인 악이 있다. 이런 구조적인 악 앞에서 한 개인이 정직하다 하더라도 힘을 쓸 수가 없다. 조직논리에 의해 그 사람의 선한 의지는 여지없이 짓밟혀 버린다. 개인의 선은 집단의 악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그래서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비록 인간 개개인이 선하다 하더라도 비도덕인 사회에서는 그 선한 개인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비도덕적인 사회, 구조악이 판치는 사회에서 그 조직에 속한 개인이 조직에 충성을 하면 할수록, 침묵을 지키면 지킬수록 그 집단의 구조악의 힘만 키우게 된다.
이런 구조악의 무서움을 보여준 사건이 역사에서 나치와 그들이 일으킨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이다. 팔레스타인에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학살감행, 석유를 얻기 위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침공,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구조악의 행태들인데, 이렇게 개인적인 악이든, 구조적인 악이든 모든 악행의 뒤에는 악령의 역사 즉 사탄의 활동이 있는 것이다. 이차대전 후 독일 신학자 틸리케는 “시험 뒤에는 시험하는 자가 서 있고, 거짓 뒤에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서 있다. 죽음과 피흘림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서 있다.” 틸리케는 악행 뒤에 악행을 저지르는 악한 인간을 보았고 그 악한 인간 뒤에서 이를 조정하는 사탄의 존재를 본 것이다.
그러면 왜 세상에는 악이 가득하게 되었나? 인간의 넘치는 탐욕과 과오 때문에 세상이 오염되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롬 8:22) 인간의 탐욕과 욕심은 한 개인의 욕심이나 과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끝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구조악을 만들어 간다. 체재를 만들고 이념을 형성하고 국가권력체계를 확고히 한다. 개인이 선하여도 구조가 악하면 악이 횡횡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악을 행하면 그 악은 개인의 악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무대를 마련해주게 된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할 때 그 ‘악’은 단순히 개인의 악이나 구조악을 넘어서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인간이 악한 마음을 품을 때 성서는 그 마음에 사탄이 들어갔다고 설명하다. 예수님께서 바리새파를 향해 너희의 아버지는 악마다!“라고 악행 뒤에 사탄이 있음을 지적하셨다. 예수님에 의하면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사탄의 자식이고 악은 사탄과 연결되어 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자는 악한 자이며, 이 악한 자는 곧 사탄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다. 시편에 의하면 사냥꾼이 짐승을 잡으려고 올무를 놓듯 사탄 역시 올무를 놓아 사람들을 올무에 걸리도록 해서 악을 추종하도록 한다. 이런 올무를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마태복음 4:1-11의 이야기는 사탄이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가를 잘 모여 준다. 처음 예수를 시험한 악의 세력은 물질이다. 두 번째는 명예다. 세 번째는 권력이다. 사탄은 예수를 유혹했던 것처럼 악에 세력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따라서 우리가 ‘악에서 구원해주소서’하고 기도할 때는 우리를 악한 자, 사탄, 사탄의 올무에서 구원해 주소서.“하는 간구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는 비록 약한 우리지만 예수께서 주신 능력을 받아 이 땅에 있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내좆고 선한 세력들을 키워내는 일꾼이 되게 해달라는 간구이기도 하다.
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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