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요즈음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는 선덕여왕이라고 한다. 그 선덕 여왕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삼국유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김유신에게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맏이는 보희고, 둘째는 문희다. 그런데 하루는 보희가 꿈을 꾼다. 자기가 서산에 올라가서 오줌을 싸니 서라벌 장안이 모두 잠기는 꿈이다.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동생 문희는 언니에게 그 꿈을 팔라고 한다. 자기가 꾼 꿈이 망측하다고만 생각한 언니 보희는 동생 문희에게 비단치마 한폭에 그 꿈을 팔아버린다. 영특한 문희는 언니의 꿈이 예사 꿈이 아닌 것을 알고 꿈을 사들였고, 자기 꿈의 가치를 모른 언니 보희는 비단치마에 현혹되어 꿈을 팔았다. 삼국유사는 꿈을 사들인 문희가 결국 김유신의 치밀한 작전에 의해 김춘추의 부인이되고 마침내 김춘추가 왕이 됨에 따라 왕후가 되었다고 전한다. 만일 언니 보희가 자기 꿈의 가치를 알았다면 결코 꿈을 팔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 한 폭에 눈이 멀어 왕후가 될 꿈을 팔아버린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5장의 이야기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란성 쌍둥이로서 전혀 다른 생김새와 성격을 갖고 태어났다. 에서는 야성적이었고 야곱은 내성적이고 온순했다. 에서가 사냥을 좋아했다면 야곱은 가사 일을 더 좋아했다. 하루는 에서가 사냥을 갔다 와서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는데, 그 죽을 보고 더 허기가 진 에서는 야곱에게 죽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야곱은 죽을 그냥 주지 않고 배고픈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현이 가진 장자권을 팔라고 하였다. 그런데 허기가 진 에서는 뒷일은 생각지 않고 우선 배고픈 김에 “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의 명분을 팔았다.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파느냐? 하고 에서를 비웃겠지만 실상 여기서 에서는 우리들의 전형이기도 하다.
에서가 장자권을 판 것은 우연히 나온 것은 아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장자권을 파는 제도가 있었다. 장자가 아닌 아들이 장자에게 땅이나 가축, 돈을 갖고 장자권을 살 수 있었다. 장자권을 갖고 있는 집의 재산이 얼마냐에 따라 장자권의 값이 달라졌다. 에서가 겨우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을 보면 당시 에서의 아버지 이삭은 재산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이삭은 여기저기 양떼를 끌고 떠돌아다니던 유목민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쫒겨 다닌 처지였기 때문에 에서가 장자권을 팔 무렵에는 매우 생활이 힘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장자권이 있어봐야 상속받을 재산도 없을 텐데..하는 계산에서 장자권을 팔았을 수도 있다. 아무튼 형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팔았고, 이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장자권이 있으면 유산을 배분할 때 다른 자식보다 두 배를 더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장자권의 또 다른 권리는 부모로부터 특별하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장자권을 가진 자식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하늘을 내려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장자권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창세기에서 보듯이 장자권은 단순히 유산상속이라는 물질을 넘어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영적 가치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권이 갖고 있는 물질적 측면에만 관심했을 뿐, 영적인 가치는 소홀히 여겼다. 성서는 이를 담담히 소개하고 있다. “에서는 맏아들의 권리를 가별게 여겼다(34).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장자권을 가볍게 판 에서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들인 야곱의 태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왜 한 사람은 장자권을 팔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들였냐? 그것은 전적으로 가치관의 문제, 세상을 보는 눈의 문제다. 에서와 야곱을 비교해보자.
첫째, 에서는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다. 당장의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파는 에서에게는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미래에 올 어떤 것, 불확실한 미래보다 눈 앞의 현실적 이익에 급급하다. 그러나 야곱은 현재 눈앞의 자기 것을 포기하며, 장차 올 미래를 준비한다.
둘째 에서는 물질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장자권이 갖고 있는 하늘의 복이라는 영적인 가치를 소홀히 취급한다. 그러나 야곱은 물질적 가치 넘어에 있는 영적인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긴다. 무엇이 귀한 것이고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 가치기준을 아는 사람이다. 야곱이 하늘의 복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했는지, 후에 에서와 만나기 위해 얍복 나루터를 건너기 전 천사와 씨름하면서 복을 빌어줄 때까지 천사를 놓아주지 않았고, 마침내 복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야곱은 장자권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복이라는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겼고 그 결과 장자로서의 위치와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
셋째, 에서는 장자권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야곱은 장자권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야곱은 장자권을 샀고, 나중에 아버지에게 하늘의 복을 비는 축복을 받았다.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하늘의 복을 받는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자.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에서같은 사람인가? 야곱같은 사람인가?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살아가는가? 아니면 미래적인데 가치를 두는가? 여러분의 가치기준은 어디에 있으며, 삶의 자세는 어떠한가?
에서처럼 소중한 장자권의 가치를 모르고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경계하신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돼지 앞에 진주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에서처럼 소종한 것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해서 잃어버리지는 않는가? 우리가 돼지 앞에 던진 진주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에서는 팥죽 한 그룻에 장자권을 판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바울은 반대로 예수의 복음 때문에 에서가 소중히 여겼던 가치들, 자기에게 이롭고 이익이 되었던 가치들을 모조리 버린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그리스도적 가치를 위해 자기가 자랑으로 삼던 가말리엘 문하라는 학식, 출세가 보장되던 자리, 로마 시민이라는 권력과 명예가 보장되던 자기가 추구하던 세상적 가치들을 모두 똥처럼 여기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목표를 향해 다름질 쳤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선택하도록 질문을 던지신다. 에서 같은 삶이냐? 야곱 같은 삶이냐? 양자 사이에 타협은 없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여러분이 선택해야 할 가치관, 달려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200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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