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봐주어서 다닌 직장?

한국소금 2019. 3. 28. 19:59

봐주어서 다닌 직장?

 

나에게는 아들 한솜이와 딸 꽃솜이 이렇게 두 자녀가 있다. 첫 아이 한솜이가 돌 지마 6개월 만에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살림은 어머니께 맡기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녀석을 등위에 두고 도망치듯 나오면서 꼭 이래야만 되나?”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하였다. 그때마다 얻는 결론은 내 삶을 한솜이에게 묶어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인간 한국염의 길을 걸어야한다는 다짐을 하며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되뇌었다.

이렇게 아침엔 아들놈과 씨름을 하고 하루종일 직장에서 일하다 목초가 되어 돌아오면 녀석의 아빠와 입씨름이 남았다. 여시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 왈,

솜이 엄마, 물좀 갖다 주라!”

냉장고에 있으니 갖다 드슈.”

피곤해서 그런다.”

누군 안 피곤한가? 직장생활 하기는 매일반인데...”

물 한 컵 가지고 뭘 그러니?”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대개의 경우 탁구공 왔다갔다하듯 말이 오가다가 내가 떠다주거나 남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미적거리다 떠다 먹는데 이따금 느닷없는 강타가 들어온다.

, 그러려면 너 직장 그만 둬!”

 

남편은 결혼초부터 애처가로 소문이 나 있았다. 본인 스스로는 공처가라고 하는데 내가 직장생활 하는 데는 살림을 맡아주시는 어머니와 남편의 힘이 컸다. 답십리 뚝방에서 빈민 어린이를 위한 탁아소를 할 때는 몸 약한데 거리가 멀다고 방학동에서 답십리로 이사를 해주었다. 또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일할 때는 한 달의 반을 집을 비울 때가 있어도 군말 않고 잘 견디어 주었다. “여자는 집에서 애 기르고 살림하는 것이 제격이지!” 하고 생각하는 자기 친구들에게도 여자가 집에 매여 있으면 발전이 없고 여자도 자기 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진보적인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즉각 반발이 터졌다. “ 아니 직장을 누가 봐줘서 다니는 건가? 나를 위해서 일하는 거지. 자기가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해?”

사실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우리네 남정네들 이해심에 한계가 있는 걸 모으는 바 아니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한탄이 남편 입에서 나올 때는 살림에 적성이 안맞는 내가 결혼이라는 것 왜 했나 하는 순간적 후회도 일곤 하였다. 부부가 같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남편이 베풀어주는 일종의 특혜처럼 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것은 특혜가 아니라 여자의 권리라고 주장한다면 내가 너무 지나친 요구인가? 여지가 직장 다닐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이 사회!

 

딸 꽃솜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었던 때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내가 아이 키우고 살림을 해야 했다. 적성에 안맞는 살림이다 보니 매일 밥하고빨래하고 청소하는 게 지겹게 느껴졌다. 그때 남편은 무슨 일로 매일 저녁 9시가 넘어야 들어왔고 일요일은 교회 가서 하루종일 있었다. 나날이 고역이었다.

어느 날을 잡아 늦게 들어 온 남편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매일 늦느냐는 물음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렇단다. 그럼 나는 어쩌란 말이냐/ 나도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재미있게 지내고 싶다고 했더니 누가 당신보고 직장 다니지 말랬어?” 하고 되묻는다. 순간 억장이 무너지면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분하고 억울할 수가!

아니 누가 직장을 다니기 싫어 안 다니나? 여자들 취업 길이 바늘구멍만 하고 더욱이 여성기관이 적다 보니 내가 일할 만한 자리가 그리 쉬운가? 거기다 아이는 누가 키우고. 자기가 키울 생각은 꿈에도 만해 봤겠지. 대책은 안 세워놓고 뭐 나보고 직장 다니기 싫어서 안다니는 사람처럼 말을 해? 남자는 하나같이 똑같아!”

그때부터 나는 내 남편은 다른 남자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허구를 깨뜨려버렸다. 본인 말로는 그 말이 그토록 당신 아픈 데를 찔렀는지 몰랐다.” 고 했지만 이때부터 나는 남자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깊은 곳에 있는 가부장적 속성은 똑같다고 결론을 내버렸다. 이 벽은 아직까지도 허물어지지 낳은 채 때때로 진리로서 심증을 굳히게 만든다. 특히 몸이 아프거나 하면 처량하고 쓸쓸하다. 남자들은 몸이 조금만 축나거나 아프면 부인이 음식 신경 쓰고 건강 걱정해 주는데 보통 남편들은 여자가 아프다고 누워 있어도 가지 몰 일 다 보고 다닌다.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부인 건강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니...

 

그래도 나의 남편은 꽤 의식화된 편이다. 살림이란 게 별거 아닌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남편이 살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것은 일년 반 동안의 실업자 생활을 통새서였다. 당시 남편은 크리스챤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용공이라고 하는 산업선교를 두둔하는 글을 써서 안가부에 의해 해고를 당했다. 동료의 주선으로 나는 교계 잡지 편집차장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니 낮 동안의 두 아이 기르는 일과 청소와 빨래는 남편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솜이는 국민학교 1학년에 갓 입학을 해놓았으니 학교 데리고 다니랴, 2살짜리 꽃솜이는 또 얼마나 손이 가는가?

며칠 씨름을 하고 난 남편 왈, “집안 일이 별게 아닌 줄 알았더니 수위 여자 일이란 게 한도 끝도 없더구만!” 실로 대단한 발견이었다. 내친 김에 왜 살림이 여자만의 일이냐?“고 물었더니 사회 통념적으로 그렇다는 것다. 남자들은 참 이상하다. 사회 통념적으로 여자의 일이라는 게 광장히 중요하다고 떠들다가도 막상 그렇게 중요한 일이나 당신 남자들이 하시오.“ 하면 꽁무니를 뺀다. 말은 소중한 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잘 것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실상이다. 국회의원 보고 집에서 애나 보라.“고 핀잔을 주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살림은 소중한 일이지만 여성의 천직이기 때문에 남자가 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자가 할 수 없긴 왜 할 수 없는가? 호텔 주방장이나 일류 요리사 등 소위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데는 다 남자들이 차지하고 앉아서는 가사는 남성의 일이 아니란다. 설령 가사가 남성의 일이 아니라 여성의 일이라 치자. 그러면 가사도 당연히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정해야 하는 게 안난가? 그런데 이 사회는 가사를 직업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직장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하고 있던 때 동회에서 조사가 나와 직업란에 주부라고 써냈다. 그랬더난 주부가 무슨 직업이냐고 한다. 그럼 뭐냐고 물었더니 노는 거란다. 살림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노는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항의했더니 어쨌든 그건 돈으로 계산 안되니까 직업에 들지 않는단다. 이래서 여성운동을 안 할 수 없다. 뒤늦게라고 가족법이 개정되어 여자의 재산 공헌도를 인정받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사회 통념적을로 여자의 일로 치부되고 있는 살림이 단순이 여자만이 알이 아니라 남녀 공동의 일이라는 걸 남편이 인식다게 된 데는 결혼 후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남편의 인식전환은 자기는 가사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데까지로 발전했다. 가사일이 적성에 안맞는 내가 가사를 맡아야 하고 적성에 맞는 남편은 적성 제쳐놓고 직장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남녀의 성역할 고정관념이 빚어내고 있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가사일이 여자만의 일이 아니라 남자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하는 것과 여자가 힘드니까 도와준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요즈음 생명운동, 살림운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나는 이 살림운동에 종사하는 남자들에게 집의 살림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제안한다. 자기는 살림운동, 생명운동 한다고 뛰어다니며 집안 살림은 여자가 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한, 그러한 가치관으로 하는 살림운동은 허구가 아닐까?

 

어느 날 인권운동을 하는 남자 후배가 찾아왔다. 첫마디가 요즈음 여자들 너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부인과 연애 결혼을 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이념이 맞았기 때문이란다. 결혼할 때 둘이는 합의를 한 게 있는데 남자는 인권운동을, 여자는 이제까지 해오던 여성운동을 계속하며 서로 동기지 되기로 했다. 결혼 초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아기를 낳으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아이를 기르느로 라 부인은 여성운동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를 낳으면 서로 분담해서 아이들 돌본다고 합의를 했었는데, 아 사항이 전혀 이행되니 않았다. 남편은 부인이 아기를 낳은 후에도 여전히 늦게 돌아오거나 아예 안 들어 왔다. 아이가 있으면 생활비가 더 드는데 남편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기는 밖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집에 있는 식구가 무얼 먹는지 도무지 관심 밖이었다. 부인은 아기를 돌보면서 짬짬이 원고 교정을 보며 생계를 꾸려갔다.

아기가 3살이 되자 부인은 아기를 탁아소에 맡겼다. 아기를 탁아소에 맡기고 찾아오는 일로 옥신각신하게 되었고 부부싸움이 잡아졌다. 남편은 자기는 중요한 일을 하니까 아이 문제는 의당 여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태도였다. 부인은 부인대로 나도 일을 하는데 둘 사이에 생긴 아이를 여자만 책임져야 하느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극기야 남편은 화가 나서 부인을 따귀로 쳤다. 부인은 기가 막혔다. ‘내가 이런 사람과 결혼했던가?’ 그 다음부터 남편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남편에게 뺨을 맞던 날 그의 부인은 나를 찾아와 자신의 기막힌 사정을 하소연했다. “ 나는 한길을 걷는 평등한 동지인 줄 알았는데, 그가 원하는 것은 뒷바라지 하는 동지였다...”

이미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터에 그 남편의 불평에 화가 났다. 치솟아 오르는 화를 꿈 참고 차분히 말했다. “한 번이라도 이기적인 것은 네 부인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느냐? 넌 왜 네 자신이 부인이 하는 일에 동지가 될 생각은 안하고 부인만 네 뒷바라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부인의 인권은 무시하면서 남성 중심적으로 하는 너의 인권운동이 정말 올바른 자세냐?”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오려두었던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를 건네주었다.

 

이불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에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체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투쟁이 깊어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야 한다.

노동자는 이윤을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이불 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박노해의 시를 묵묵히 읽고 난 후배는 아무 말 않고 돌아갔다. 며칠 후 부인이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매우 밝았다. “언니, 따봉이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남편이 달라졌어? 고마원.”

내용인즉 한 이틀 고민하던 남편이 그후부터는 집에 일찍 들어와 가사 일도 곱고 아이도 돌본단다. 그래서 그건 내 덕이 아니고 박노해 덕이다.”라고 대답했다.

박노해가 이불을 꿰매면서 바늘에 낄린 아픔을 통해서 자신이 부인을 혹사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의 남편이 실업자 생활을 통해서 몸소 살림과 육아를 해보고 여자의 고충을 알게 되었듯이 노동운동, 인권운동, 살림운동, 시민운동 하능 리들이 추상적인 이론만 이야기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살림을 한 번 씩 해보고 나서 그 경험으로 운동을 한다면 훨씬 민주적이고 생명력 있는 운동이 되지 않을까?

 

* 1993. 이 글은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의 52주 여성학 과정에서 논문대신 발표한 나의 이야기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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