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큰 용기를 얻습니다.”
한국염/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9년에 신학교에 가보니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 여목사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력이 없어서 여성목사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건방지게도 내가 최초의 여목사가 되어야겠는 생각했었다. 제도에 막혀 여성이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왜 여자가 목사가 못되는지를 알아보았더니 세 가지 이유였다.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남자니 여저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되어있고 여자가 가르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 때문이란다. 다른 이유는 예수가 남자 제자만 선택했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예수의 제자가 남자뿐이기 때문이라면 예수의 제자는 유대인인데 그럼 왜 유대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한국남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안수를 안주려고 별 이유를 다 끌어다 댄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님이 아버지라서 여자가 목사가 못된다니,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화가 났다. 그나저나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는 들어왔는데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니 신학교에 계속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당시 여자로서 교수를 하시던 이우정 선생님을 보면서 “기왕 들어온 학교,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되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학교에 남았다. 그런 어느날 기장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여목사 안수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 말에 솔깃해서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이때부터 전국연합회사무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1974년, “세계여성의 해”를 일년 앞 둔 해에 우리 교단에서 간신히 여목사제도가 통과되었는데 통과 이유 또한 가관이었다. 당시 우리 교단 헌법에는 목사 안수 조건으로 “30세 이상된 자”라는 자격규정이 있었는데, 이 ‘놈者’의 者를 사람으로 바꾸게 되었다. 사람으로 바꾸다 보니 이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로 해석해서 통과가 되었다. 그때까지 여자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나보다.
내 눈으로 어머니 하나님을 발견하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 일생에서 잘한 것이 있다면 한신을 다닌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한신에서 내 일생의 두 나침판을 만나게 된다. 두 분의 삶의 모델을 만났는데 하나는 이우정선생님이요, 다른 한분은 문동환교수님이었다. 이우정선생님을 보면서 여성으로서의 지도자상을 꿈꾸었고, 문동환교수님으로부터 억압과 차별, 불의에 대한 정의의 항거, 세상을 변혁시키야 할 과제 등을 배웠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삶을 그 두 분들을 보면서 체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우리학교의 분위기였다. 비록 교단은 가부장적으로 여성의 길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한신은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였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했지만 교수님과 학생들 사이에 권위주의로 인한 위계질서는 없었다. 진보적 신학사상을 배우는 가운데 남녀 차별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 없이 지내던 동료들이 교회에 나가서 목사가 되면 목에 깁스를 하고 뻣뻣한 권위주의적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알다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신학교에 남은 나는 하나님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북에서 탈출하여 임진강을 건너려할 때 배를 탔는데,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원이 내가 자다가 깨어 울면 어떻게 하느냐고 아버지에게 닦달을 하자 아버지는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살아있는 나를 임진강에 던지려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느냐고,당신들은 배타고 건너라, 나는 이 아이와 함께 다른 길을 알아보겠다. 하고 배에서 내였다. 우리 아버지는 그 배를 타고 갔고. 어머니는 초겨을 임진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나를 업고 그 찬물을 건넜다. 이남에 와서 어머니는 꿈에 왠 젊은이가 나타나 “내가 예수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깨었는데, 그때 교회에서 치는 새벽 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나도 어머니를 따라 골수 예수쟁이가 되었다. 열신히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했다. 그랬는데 이 임진강 이야기를 안 이후부터 도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는 순간에 임진강에서 나를 버리려고 했던 얼굴도 모르는 그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은혜가 될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고, 아버지는 남자니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와 친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하나도 은혜가 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도 그 배안의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버리려고 했는데, 그 때 나는 아버지의 외동 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도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여성신학이 들어오기도 전인데, 나는 그냥 하나님, 하고 기도를 했고, 하나님과 친밀감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니 고역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 때 ‘구약통독’이라는 과목이 생겼다. 교수님은 그냥 통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명 깊게 읽은 구절을 두 구절씩 밑줄을 쳐서 내게 했다. 그러니 성경을 꼬박꼬박 읽을 수밖에. 이렇게 읽어가는 중에 이사야서 46장을 읽게 되었다.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남은 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고 하겠느냐?”(3-5).
이 구절을 읽는데, 문득 내 앞에 나를 업고 임진강 찬물을 건너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고, 하나님의 모습이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 떠오르면서 내 안에 뜨거운 감동이 일었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모습의 발견으로,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나님 어머니의 모습을 찾고 나서 나는 그동안 의무로 읽던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비로소 누구의 주입이 아닌 내 눈으로 성서를 읽기 시작했고, 성서 곳곳에서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모습들이 읽혀지면서 은혜가 되었다. 이 경험 이후 여성의 눈으로 성서읽기와 신학하기가 내 목회의 중요한 현장이 되고 있다.
이런 내 개인사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내 경험과 성서가 만날 때 성서가 나의 것이 되고 내게 힘이 될 수 있음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변혁의 힘을 준 마리아의 노래
신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교회여성운동가로서, 교회목회자로서, 그리고 이주여성운동가로서 여성목회의 여정을 걷고 있다. 내가 이런 길을 걷게 된, 목회에 신학적 전거가 된 것은 바로 누가복은 1장 46절 이하의 마리아의 찬가다.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삶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회의 비전이다.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이 노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마리아를 임신한 것을 알고 부른 노래로서 교회에서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함은..”하고 시작했다고 해서 ‘마그니피캇“이라고 부른다. 이 노래는 이제껏 나의 삶과 신학과 신앙을 지탱하는 큰 원천이 되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탄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저주스러울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축복의 상황으로 변모시키는 마리아의 노래!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을 꺾으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굶주린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며 부요한 자를 내치시는 하나님,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는 하나님! 마리아의 노래에 나타난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내 목회의 비전이다. 마리아는 이 노래에서 자신을 고난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여긴다. 구체적으로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성, 정치적으로 눌려 지내는 힘없는 백성,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이들의 해방을 노래하는데, 이 힘없고 가난한 자들과의 일치와 연대가 내 삶의 죄표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째 이유로 하나님께서 종처럼 천대받고 있는 자신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들 인권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문제도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가부장제 억압구조에서 여성해방의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억압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 여성의 구원이 우선되어야 함을, 이 것이 진정 여성에게 기쁜 소식임을 깨달았고, 이 깨달음이 내 여성목회의 지침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시작한 여성 민중목회 현장
우리, 남편과 나는 소위 민중 목회자로서 막차를 탄 사람들이다. 당시 서울의 빈민가의 하나였던 창신동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남편은 나보다 신학공부를 10년이나 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목회자로 초청한 것은 남편이었다. 교회목회는 남편이 전담하고 나는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에서 일하면서 밤과 주말에 교회 일을 했다. 교회에서 동네의 저소득가정과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서 탁아소를 운영했고, 일년 후에는 방과 후에 길거리에 방치되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도 자모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민중목회자가 되려면 삶의 여건도 그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예 산동네로 이사 와서 교회가 세들어 있는 낡은 건물 방 한 칸을 장롱으로 칸을 막아 한 칸은 낮에는 교회 사무실로 쓰고 밤에는 중학생인 아들의 잠자리로 사용했다. 다른 한쪽은 남편과 나, 딸의 침실 겸 살림집이었다. 우리의 주거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지친 여교역자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가 오히려 힘을 얻고 간다고 고백하였다. 이렇게 우리 주거 환경이 산동네 엄마들의 삶의 여건과 같아지자 교인들과 탁아방 자모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교인들과 주민들이 목회자인 우리와 자신들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걸 통해서 깨달은 것은 민중목회란 민중을 위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민중과 여성신학의 개념에서 이주노동자 선교를 시작하다.
1995년 한국교회에서 선포한 희년의 해에 치솟는 교회건물 월세에 시달리던 우리는 힘겹게 이층짜리 개인 주택을 한 채 사서 이사를 했다. 일단 우리 교회 건물이 생긴 것이다. 한 층에 20평짜리 건물로서 1층은 평일에는 공부방을 하고 주일에는 외국인노동자 한국어교실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외국인노동자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주차장이었던 곳을 개조해 예배처소를 만들었다.
나와 남편이 이주민 선교를 즉 외국인노동자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96년 성남의 한 양말공장에서 공장주의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국 한족 8명이 공장을 도망쳐 우리 교회로 오게 된 것이 동기가 되었다. 이들과 한 달가량 지나면서 우리는 평소에 하던 질문인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 받는 민중이 누구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바로 ’외국인노동자‘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워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설립하면서 나에게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 교회여성 지위향상 운운해서 드세다는 이유로 일반 교회에서 나를 청빙하지 않아 81년에 준목인허를 받은지 25년이 되어도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다.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면서 “이제 나도 목사 안수를 받아야 겠으니 당신이 센터 소장을 하고, 교회는 내가 담임을 하자!” 이렇게 해서 간신히 2007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남편의 양보로 교회 목회를 시작했으니 일종의 세습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민중교회 목회야 일반목회자들이 오려고 하지 않는 허허벌판이라 가능했고, 떳떳하기도 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지 1년 후 여신학자협의회(여신협) 총무로 자리를 옮겼다. 임기동안 교회개혁운동, 종교여성해방운동에 주력했고, 교회내 성폭력추방운동에 나섰다. 여성신학 관점에서 호주제 폐지운동이라든지 대사회 여성운동에 지경을 넓혀갔다.
성평등문제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중요한 목표인 바, 언제나 주변을 골치아프게 만들고 있다. 교회협의회 여성위원장 시절에는 세 번역주기도문에 반기를 들어 물의를 일으켰고, 교단의 여성들과 함께 작업을 해 우리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 한국 교회 최초로 양성평등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만들었다. 그 첫 위원장을 맡아 여성참여를 위한 제도변혁에 매진하였다. 성평등 교회로의 변혁은 결코 쉽지 않다. 교단에서 여성 총대 증진을 위한 헌의안을 통과시키려 작업을 하면서 “35년 이상 이 짓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달라지나? 이런 교회에 내가 머물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자조적 질문을 하기도 한다.
교회에서 외국인노동자센터를 만든 후 내 목회활동도 바빠졌다. 주간의 낮에는 여성신학 운동에, 주말과 밤에는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했다. 그런데 남편이 하는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지원하면서 뭔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터에 외국인노동자들이 드나드는데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이 점은 서울센터 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주노동자 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단체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한 예로 대개의 센터들이 쉼터를 하는데 여성들을 위한 쉼터는 없었다. 정말로 쉼터가 절실한 사람들은 여성들인데도 말이다. 이주여성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성폭력 문제라든지, 임출산과 육아 관련문제들에 대한 접근이 없었고, 활동가들에게도 성인지적 관점이 없었다. 남편과 의논해서 외국인여성문제를 다루는 시설을 따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의 집’으로서 한국 최초의 이주여성 전용쉼터였다. 이 쉼터를 중심으로 임출산한 이주여성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과 필리핀 노동자들과 결혼한 한국여성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했다.
2002년 여신협 총무 재임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이주여성과 함께 하는 일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재임을 포기하고 이주여성 활동을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이주여성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이 땅의 민중이 외국인노동자라면, 그 외국인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민중이 이주여성이라는 인지 때문이었다. 나의 이주여성 선교는 민중으로서의 이주여성, 여성으로서의 민중성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2007년 말 일자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가 일 백 만 명을 넘어섰고. 이중 이주여성은 약 30만 명가량 된다. 이 이주여성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과 계급차별, 성차별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들을 섬기는 것이 민중목회와 여성목회 현장으로서의 나의 중요한 목회현장이 되고 있다. 이주여성 목회를 하면서 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강요하지 않는다. 본회퍼의 말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라는 목회를 한다고나 할까?
이주여성 인권센터를 세우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주여성 지원활동을 시작하면서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의 부설기관으로 시작한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집”을 독립시켜서 센터의 이름을 “이주여성인권센터”로 개칭하였다. 시댁적 요청에 때라 하는 일도 조금씩 달라졌다.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집 쉼터에서 처음에는 이주여성노동자들을 만나 이들을 위한 모성보호활동을 주로 했다. 여기서 기지촌에서 일하는 외국인 여성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유흥업 종사 이주여성들의 인권실태를 알게 되었다. 곧 이어 한국남성과 국제결혼해 오는 이주여성을 상담하면서 국제결혼이주여성의 실태를 알게 되었다. 이들의 인권상황이 이주여성노동자들보다 더 심각한 수준임을 인지하면서 결혼이주여성의 인권문제에 매진하게 되었다. 센터 이름을 이주여성인권센터로 바꾸었다. 2005년에 여성부의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여 사단법인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로 발전하면서 전국에 5개 지부가 있다. 지금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하면 이주여성운동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데, 이름에 드러나듯이 우리 센터의 활동은 이주여성 인권보호가 초점이다. 자기 인권을 지키기 위한 한국어교육, 인권침해 당한 여성들의 인권을 찾기 위한 상담을 기본으로 이주여성의 역량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이주여성을 위한 정책마련이 우리 센터의 주 업무다. 정책에 관심하다 보니 정부가 문제를 인지하기 전부터 국제결혼이주여성의 인권문제에 관심하여 활동하면서 2005년 당시 여성부장관을 설득하여 정부 단위 최초로 국제결혼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교육과 모성보호지원사업을 시작하도록 했고, 폭력피해를 당한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쉼터제도화와 각종 인권보호제도와 법안, 결혼이민자지원센터(후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로 바뀜) 설치, 복지지원정책 등, 각종 지원정책을 이끌어냈다.
한편 성인지관점과 다문화주의 관점으로 이주여성의 문제를 다루다 보니 동화주의에 입각한 정부의 입장이나 가족중심의 지원단체들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다문화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 프로젝트도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다문화범람시대를 맞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민족과 인종과 문화를 가진 이들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이슈 파이팅을 하다 보니 이주여성을 한국화하려는 이들과의 갈등은 피할 수가 없다. 또 결혼이주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다 보니 폭력가해남편들에게 원성을 듣기도 한다. 지금도 남편들 모임인 한 단체가 우리 센터 앞에서 규탄집회를 하겠다고 집회신고를 해놓은 상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길을 가고 있다.
당신 때문에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습니다.
내년 2011년이면 내가 이주민 활동을 시작한지 15년이 되고, 이주여성 활동을 해온지 10년을 맞는다. 나는 결코 포교에 목표를 두고 이주민지원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주여성 활동을 해오면서 내가 이정표로 삼고 있는 성서는 3군데가 있다. 하나는 창세기 1장 26정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갈리디아 3장 28절,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다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가 다 하나입니다.’ 하는 고백이요, 마지막 하나는 룻기다. 이주민 안에 하나님의 모습이 들어있다고 할 때 우리가 어떻게 이주민을 차별할 수 있겠는가? 또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이 금지되어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주여성을 차별하며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있어 이주민 선교의 지침은 룻기다. 룻기 중에서도 2장 13-14절의 말씀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습니다.” “와서 함께 음식을 듭시다.” 을 모토로 삼는다. 룻이 나오미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를 하듯 오늘날 한국 땅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을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3D업종이며, 한국인들의 떨어드린 이삭과 같은 일자리다. 또 룻처럼 국제결혼해서 한국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16만 명에 이른다. 이런 나그네에게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약자 보호법에 따라 이삭줍기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물을 마시도록 허용한다. 보아스의 배려에 대해 룻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는 한낱 이방여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힘을 얻습니다.” 보아스는 이렇게 룻을 배려할 뿐만 아니라 식사 때가 되자 음식을 나누어 준다. “이리로 오시오. 음식을 듭시다(2:14). “ 보아스가 룻을 함께 음식을 먹도록 초청했다는 것은 더 이상 룻이 타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한 공동체에 속한 일원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보아스처럼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이주민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해서 음식을 나눔으로 같은 식탁공동체를 일구는 것, 그래서 룻이 했듯이 이주여성들이 ‘당신들의 배려에 이 몸이 큰 힘을 얻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 내 이주여성 활동의 비전이다. 나의 작은 노력 때문에 이주여성들이 “ 내가 큰 힘을 얻습니다.” 하고 용기를 얻고 살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더 기대하리요?
이주여성을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그런 사회에 대한 꿈을 갖고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파울로 코엘료가 인용한 한 수피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밤이 끝나고 날이 밝는 정확한 순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 이방인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 때, 우리가 그를 형제, 자매로 받아들여 모든 갈등이 소멸되는 그 순간이 바로 밤이 끝나고 날이 밝는 순간이다.”
* 이 글은 2010년 이화여대에서 한 설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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