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청암하늘 뜻 나누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국소금 2022. 8. 5. 12:43

1. 청암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해

 

어렸을 때는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분위기였어도 항상 나와 함께 있는 수호천사가 있었던 것 같다. 세밀한 목소리로 말 걸어주는 존재, 그리고 항상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는 존재가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학교다닐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칭찬해주고 업어주시고 하는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고 믿을 수 있었고, 희망을 계속 가질 수 있었다.

40대를 지나 50대를 맞이한 지금은 계속 희망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가지고 있다. 번 아웃이 되기도 했고...지난번에 사업감사를 받으러 갔었는데, 8년간 감사를 맡아주신 변호사님이 뜬금없는 말씀을 해주셨다. "네가 사회에 기여하고 희생한 것에 대해서 보상이 별로 없는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이 좀 있을 것 같다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부름보다 "아버지"라는 부름이 정서적으로 더 친밀하고 생생한 느낌이다. 지금 현재 불러일으켜지는 "아버지"는 내게 중의적 의미- 하나는 '아버지!'하고 외치자마자 마음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맺히는데, 내겐 어머니 못지않게 섬세하고 세심하게 나를 돌보았던 아버지의 경험이 강렬했기 때문. 고집이 세서 엄마를 거부하고 아버지를 감사히 여겼던 나만의 내밀한 히스토리가 있었을지 그런것은 차치하고라도.. 여하간 난 날 먹히고 입히고 가까이 나를 걱정하고 든든히 뒷배가 되주기로 존재하는 분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통해 먼 하나님을 내가까이에서 생생히 고백할수 있겠다.

또 하나는, 다분히 학문적이고 주지화된 느낌을 줄수 있겠지만.. 아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아이에게 세상을 안내하고 보여주는 존재가 아닌가? 발달심리학에서 어머니와 초기 아기는 공생관계.그러니까 융합관계로 일컸는다. 왜냐하면 바로 직전까지 그 둘은 한몸이었으니까 ..바로 이게 생각난거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부름을 입에 읍조리자마자.. 예수께서는 나와 너밖에 없는 또는 나는 너 /너는 나라는 융합을 추구하고 서로 경계 없이 폭력적으로 넘나드는 무경계에의 관계패턴을 벗어나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삼자관계로의 도입을 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부름으로 간접적으로 알려주시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렸을 때 주기도문의 첫 소절을 외울 때의 느낌을 기억한다. 나의 아버지를 상상하며 외웠던 기억. 물론 나의 아버지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소절을 외울 때는 다정하고 품이 큰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손이 커서 아버지 손을 잡고 어디를 갈때면 아버지의 검지 손가락만 잡고 가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소절은 따뜻했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이라고 외우는데 나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이 참 좋다. 우리 하나님.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 우리 아버지보다 더 큰 품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를 더 꼭 안아주는 상상을 하게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는 어렸을 때 정말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 줄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엄격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결코 나와 가까워질 수 없는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과학을 배우면서 하늘에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 같은 하느님은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 대해서 점점 의심이 들게 되었고 이런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신앙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으면 어디에 계실까?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 나의 유년기처럼 당시 성서를 기록했던 사람들의 지식수준에 맞게 표현된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하고 고백해야 할까?

지금 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하느님이 내 마음 속에 임재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고백하고 무언가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하고 있다. 내 속에 임재하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려면 내 생각을 강요하고 내 주장을 많이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할 터인데...

내 마음과 생각에 임재하는 하느님”, 이렇게 고백하면 조금 더 나을 듯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분일까?

내 마음에 임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느님은 없는 분일까?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초대교회 성서기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섭리를 온 몸으로 살아가신 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 나는 예수를 직접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처럼 산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

 

이상의 우리 청암교인들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보면 다행히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긍정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관계,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긍정적인 하나님 아버지 상을 갖게 한 것 같다. 나와 육신의 아버지와의 친밀도가 아버지 하나님 상을 이끌어냄을 볼 수 있다.

 

여러분과 반대로 나는 아버지라는 하나님 상에 대해 반감이 크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북에서 넘어 온 피난민 출신이다. 아버지는 625 난리 통에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자랐고, 내 어머니는 이남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주기도문을 배웠고, 자연스럽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읊조렸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내 아버지가 한 일을 알고나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혐오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넘어올 때 내가 잘 운다고, 그래서 내 울음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하다는 인도자의 말에 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나를 임진강에 던져 버리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비롯해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기도 말이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갔는데,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여성안수를 거부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는데,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남자니까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다. 가뜩이나 아버지에 대해 못마땅한 감정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이 아버지라서 여자인 내가 목사가 못된다니 그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가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나의 어머니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이 굉장한 위로가 되었다. 사고무친의 이남 땅에서 내 어머니에게 힘과 위로가 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었다. 엄마가 기도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면 보통 기도 한 번에 내 아버지 하나님이여!:20번 가량 나왔다. 아버지 하나님이 어머니의 피난처요, 의지 처였다. 내 어머니와 나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하나님 상은 개인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그런데 청암교인들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에는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상이 너무 강해서 하늘에를 패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청암교인들이 마태복음의 하늘에 계신이라는 용어가 후대 마태공동체의 특수상황이 반영된 것임을 아는, 신학적 지식 때문이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통은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교회의 기도로 선택해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2.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직접적으로 부른 곳이 없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어버이와 자식간의 관계로 인식하며서도 하나님은 너무도 거룩해서 자기와는 동떨어진 멋 곳에 계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과감하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가까이 하라고 권면하신다. 주기도문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쳤을 때 그 아버지는 우리가 시아버지를 아버님하면서 어렵게 대하는 그런 용어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아빠라고 사랑스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듯 그런 다정한 뜻을 지민 압바’(예수님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 9-13절과 누가복음 11:2-4 두 곳에 나온다. 초대교회의 교육 자료인 디다케에도 그냥 아버지로 나온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기도문 보다 짧고 함축적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두 기도문이 일치하고 있다. 교회 전통은 마태복음 6: 9 - 13 의 기도문을 택하여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왔다. 그런데 많은 경우 주기도문을 주님이 드린 기도로 오해하고 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드린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는 것은 그 기도의 참뜻을 알고 그대로 살라고 하는 뜻이다. 누가복음 11장에는 그냥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건, 그냥 아버지이건 그 본디 말은 마태, 누가, 디다케 세 곳 모두 아빠, 아버지로 되어 있다. 원래 예수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언어인 아람어 아빠라고 하나님을 칭했는데, 복음이 그리스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아빠라는 아람어에 아버지라는 그리스어가 첨가되어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는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를 아빠 기도라고 불렀다. ‘아버지라는 말 보다 아빠라는 호칭은 훨씬 하나님과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리스어의 아버지라는 용어는 참 아버지라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나님의 호칭을 아빠, 아버지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아빠, 참 아버지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불러야 하는데, “아빠, 아버지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아빠, 정의의 아버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아람어의 배경에서 아빠는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예수의 아빠는 연민과 해방을 의미한다. 곧 세상의 악과 고통 한 가운데서 고통 받는 자식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선함과 자비를 인식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예수의 아빠는 자식들 중에 힘든 자식을 보며 가장 아파하는 어버이처럼, 결코 가부장적인 통치, 곧 억압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가부장적 모습이 아닌, 억압받는 이들의 하나님,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시는 분이다.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이 아버지니까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위대하고 남자가 여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의 가부장적 아버지를 부인하고 어머니와 같은 속성을 지니 그런 분이시다. 오히려 예수는 이 세상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셨다.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집, 형제, 자매, 어머니를 다 버려야 할 것으로 지적하셨고, 이 모든 것을 버리면 형제, 자매 어머니를 다시 얻게 된다고 하셧다. 그러나 다시 얻는 자리에 아버지의 자리는 없다. 왜일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그런 권위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아버지와 다른 분임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이 세상 아버지의 부성을 심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이 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같으신 분이라는 하나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자궁이 떨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아버지도 되고 어머니도 되시는 그런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와 엄마,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기도해도 무방하다.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왜 예수님은 가부장적 이미지를 가진 아버지로 하나님을 부르게 하셨을까? 아버지라는 용어는 성서 전통 안에서 남성 본위적인 용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배타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성서 전반에 걸쳐 포괄적인 용법으로 ,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함축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라고 표현된 곳을 부모라는 뜻으로 읽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때마다 우리가 사랑받고 있는 존재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로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신다.

 

하늘에 계신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태복음에는 19번씩이나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무슨 뜻인가?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 구름 뒤의 하늘이 있고 그 별천지에 신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옛날 사람들처럼 그런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말하는가? 이 말은 하나님이 장소를 초월하여 계신 분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일정한 곳에 매이지 않는 그런 분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말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 초월적인 분,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분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해서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도대체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옳으냐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라고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과 구별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머리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옛 지혜전승에서는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어서 백을 넘는 101번째의 이름을 가지신 분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지어내신 그러한 분으로 우리가 예배드려야 하는 분이며 그분을 닮아 온전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젊은 시절에 하던 생각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생각이 한 걸음 나갔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아빠라고 할 때 나는 어린 시절 정말로 하나님이 하늘 위 궁전에서 사는 줄 알았다. 과학 지식이 늘고, 신학지식이 늘면서 위에서 설명한 그런 뜻으로만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전 지구적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늘이 없는 곳은 없다. 그 하늘 아래에 있는 사람들, 지구에 속한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자연, 숨 쉬는 것들의 하나님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지구적 하나님을 생각하다보니 자연히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창조를 보전하고 지키는 것이 자녀인 내가 할 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 해방자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의미는 이 세상의 아버지와는 다른 하늘 아버지라는 의미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 가족을 지내하고 다스리는 그런 권위를 대표한다. 대부분의 경우 세상 아버지의 이미지는 권위와 굴종이다. 이 가장이 확대된 것이 왕이고 권력자다. 한 집안의 우두머리로서의 아버지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사랑과 자비로 부성을 나타내신다. ‘하늘의 아버지란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 예수는 누가복은 15장의 탕자의 비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셨다. 집나간 아들을 문 밖에서 기다리면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 아들이 돌아오지 끌어안고 우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다사실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모습이라기보다 어머니의 속성에 더 가깝다. 실제로 성서 곳곳에서 하나님을 어머니 같으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호세아 111-4에 보면 하나님은 자식을 팔에 안아키우고 걸음마를 가르쳐고 볼을 비비고 입에 먹을 것을 널어주고 기르는, 어머니 같으신 분이다. 이사여 463-4절에는 자식을 업고 다니는 분으로, 창세기 321절에는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하시면서 벌거벗긴 채 내쫒기는 게 안스러워 옷을 해입히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명기 32:4,10,18을 보면 우리를 낳느라 고생하고 눈동자처 아껴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낸다. 특히 예레미야 31:20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측은히 여기고 불쌍이 여긴다는 말이 나오는데 측은또는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의 본래 뜻은 자궁이 떨린다.’라는 뜻이다. 자궁이 떨릴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해산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분으로,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성서에 그려져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성서는 하나님을 어머니 같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이라는 것도 어머니를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에 참여하는, 그런 하나님 상을 뜻한다.

 

 

우리 아버지

세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다. 정확한 본문은 그냥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아버지다.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라는 말을 잘 쓴다.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 내 학교가 아니라 우리 학교 등등으로 나 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쓴다. 우리 하나님, 이라고 해도 당연히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나 중심인 서양에서는 개인이 말하면서 우리 아버지, 우리 부모 하면 생경하다. 자연히 우리라는 공동체 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진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특정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분이심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기도할 때 내 아버지 하나님을 유달리 찾는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할 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인의 가족개념이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혈연중심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온 인류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식전환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것은 우리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는 말이다. 내가 낳은 자식만 내 자식이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와 사회 모든 어린이들을 내 자녀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첫걸음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를 비롯해서 우리 공동체가 일그러진 것은 결국은 내 자식만하는 가족이기주의에서 비롯된다. 마가복은 331절 이하에 의하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냐?“라고 물으면서 진정한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형제자매요, 부모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새로운 가족관계는 혈연중심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느냐 여부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내 핏줄 중심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나만이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생각은 비기독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서 사람과 사람사이, 교회와 교회 사이, 사회와 국가 사이에 분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자식과 자식 간에 불평등이 있으면 그 불평등이 집안의 평화를 깨뜨리듯이, 이 세계 구성원들 간에 불평등이 있고, 차별이 있으면 평화가 깨어진다. 기독교인들이 공동체의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며 이 땅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여럿 있는데, 언제나 기도 일순위는 가정 함들게 사는 자식이다. 아들 최목사가 목회하던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안 어머니는 우리가 인사를 드리러 가면 어머니도 돈이 넉넉하지 않은데 우리가 드리는 용돈에 윗돈을 얹어 쥐어주셨다. 다른 자식들이 드리는 용돈을 모아서 주시는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돈을 몰래 주는 것보다 형제들이 우리에게 나눔을 베풀기를 원하셨다. 이런 경험을 하며 나는 하나님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 세계 상에 거하는 어려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현제 자매가 되어 어려운 형제 자매들을 보듬어 안고 사는 것이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이지만 공동체적인 기도다.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개인들은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공동체성을 키워나간다. 우리가 공동예배에서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 글은 2022년 청암교회에서 한 하늘뜻 나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