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청암하늘 뜻 나누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한국소금 2022. 9. 4. 12:57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1.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탕감해 준 것처럼, 우리의 빚도 탕감해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하는 기도는 개역성경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되어 있고, 공동번역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개정번역과 새 번역은 같은 어감이고, 공동번역에는 느낌이 가볍다죄든 잘못이든, 헬라어 원문 오페일레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개역에는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라고 주석을 붙여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가 아니라 으로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새번역에는 또는 빚진 사람의 빚을 삭쳐 준 것같이라고 주()를 붙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본래의 기도가 빚임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신 또 하나의 본문인 누가복음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11:4)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예수님은 분명 기도에서 빚진 사람을 탕감해준 것처럼, 우리의 빚도 탕감해주소서하고 기도하도록 하셨다. 일용할 양식문제와 빚의 문제는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 다음에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잘못으로 바뀌고, 마태복은 1821의 말씀에 의거해서 로 옮겨갔다. 마태복음 18: 21-35절 말씀은 용서에 관한 내용이다. 베트로가 죄지은 사람을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가?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일곤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고 답하시고, 비유로 드신 것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다. 이 종의 비유에는 죄가 다시 빚으로 바뀌고 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는 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을 왕이 불쌍해서 빚을 삭쳐주었는데, 그렇게 큰 용서를 받은 그 종은 자기에게 겨우 백데나리온밖에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고, 이 소식을 들은 왕이 처음 용서받았던 감옥에 가두게 했다는 이야기다. 한 달란트가 노동자의 15년 품삯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빚의 크기가 상대도 되지 않는 액수다. 백 데나리온이라고 해야 100일치 품삯이니 잘 하면 갚을 수 있는 돈이지만, 만 달란트는 사실상 갚을 수 없는 크기다. 하나님의 용서의 크기와 인간의 용서의 크기를 비유한 것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큰 용서를 받아놓고도, 인간 사이에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비유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탕감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하는 기도는 앞의 기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하는 기도와 맞닿아 있다. 예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렸고, 로마와 로마와 결탁한 권력자들에게 수탈을 당해 땅이나 살림살이를 저당 잡히거나 생계 때문에 빚을 진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에 필요한 양식이 있다면 내일을 위해 빚을 질 필요가 없는데, 당장 오늘 먹을 것이 없다 보니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빚을 지게 되면 나중에는 종이 되거나 자식을 종으로 파는 일이 생긴다본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고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지시대로 모두 똑같이 땅을 나누어가졌기 때문에 빚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생길 것을 대비해서 궁핍한 이웃들에게 손을 뻗으라고 지시하셨고 (신명기 1511), 이스라엘 사회보장법이라고 할 수 있는 약자 보호법을 만들었다. 이 사회보장법이 출애굽기 20-23, 레위기 25, 신명기 22장의 법규에 들어 있다. 그 법에 의하면 이웃의 땅을 저당잡고 종으로 데려왔어도 안식년이 되는 7년 째 되는 해와 안식년을 7번 지난 다음해인 50년 희년에는 땅도, 종으로 부리던 사람도 다 해방시켜 원상복귀 하도록 되어 있다. 당연히 빚도 면제되었다. 일상에서 이웃의 옷을 저당 잡을 경우 속웃은 안되고, 겉 옷을 저당잡더라도 그날 해지기 전에 돌려주도록 되어 있다. 동족 간에는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이런 약자보호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사람들이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받았고, 물건을 담보로 돈을 갚지 못하면 물건을 저당물로 가져가고, 빚 대신에 끌려 온 종을 풀어주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공의가 무너지고 정의가 없는 사회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기에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외쳤다. 예언자들의 의하면 이스라엘이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 종살이 하게 된 것은 안식년과 희년에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를 해장시키라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하는 기도는 문자 그대로의 빚이다. 이 빚을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해석하면 본 뜻에서 멀어진다. 오늘 필요한 양식과 부채가 없는 세상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의 바램이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해당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빚은 허왕되게 부자가 되고자 헛된 꿈을 꿈으로 진 빚이 아니라 그날의 생존을 위해서 진 빚을 의미한다. 성서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사회도 그날에 먹거리가 없어, 생존을 위한 빚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빚 없는 세상은 절실한 필요이지, 상징이나 은유적일 수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빚의 탕감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우선하는 조건부라면, 사랑과 자비가 한없으신 하나님의 이미지와 충돌할 수 있다. 인간의 생존이 달린 문제를 외면하고 기피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 거기서도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는 기도는 이웃의 생존문제를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말라는 경고가 들어있다. 우리가 빚진자를 탕감해준 것같이 우리 죄는 용서하옵시고, 하는 기도에는 글자 그대로 나 개인에게 빚진 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속한 공동체, 나아가서 지구공동체와도 관계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이 진 채무의 규모가 엄청나다. 그 국가가 진 빚으로 인해 국민들이 생존에 시달린다. 개발도상국의 부채문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이다. 실제로 부채탕감 운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고, 지구의 허파인 열대림을 개발하지 않고 보호하는 조건으로 개발도상국의 빚을 탕감하는 나라도 있다지구상에서 필요 이상으로 부를 누리는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께 빚진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소서, 하는 기도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고, 빚 없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시고, 하는 원래 기도를 초대교회 이후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 또는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잘못,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로 바꾸어 기도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어서 본래의 용어 보다는 죄 또는 잘못이라는 용어가 더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드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하는 기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하는 기도는 매우 무서운 기도인 것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못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는 조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태복음 614-15절의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 이은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조건을 달고 있다. 그러니 이 기도를 하기가 겁이 난다. 우리는 늘, 아무 생각 없이 이 기도를 반복하지만, 생각할수록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하는 이 기도는 함부로 쉽게 할 수 없는 기도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못한 어떤 이는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이 대목이 나오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웃으운 이야기 같지만 아무 생각없이 이 기도를 하는 사람 보다는 차라리 이 사람은 양심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가? 이 기도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정말로 이 기도는 조건부 기도인가?

 

이 기도의 참 뜻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배경이 있다. 마태복음 1823절 이하의 악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관리가 주인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고 나서 그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고작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가혹하게 했기 때문에 결국 주인이 괘씸하게 여겨 그 악한 종을 감옥에 넘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바로 그 악한 종처럼 하나님 앞에서 괘씸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의 크나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작은 잘못을 한 사람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용서받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를 말씀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이웃을 향한 태도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관대한 용서를 빌면서 이웃에게는 박절하게 대하는 것은 용서받은 자의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가기 전에 이웃과 화해하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23-25).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이웃과 화해함 없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사실상 우리에게 잘못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쉽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그런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을까? 실제로 주님 가르치신 기도처럼 깊은 용서를 한 사람들도 있다. 손양원목사가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식으로 삼은 이야기, 넬슨 만델라가 자기 인종을 차별하고 학대한 백인들을 용서한 이야기 등, 철천지 원수들을 용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그렇다고 그 용서가 자칫 하면 불의를 조장하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가해자가 죄의식도 없는데 피해자가 쉽게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불의를 조장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잘못을 인정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한다는 것은 김대중 개인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어도 국가의 대통령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의 용서는 진실규명이 있고 그에 의해 처벌 따른 후 용서가 주어져야 한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일본에 진상규명과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죄가 용서받았으니, 자신이, 교회가 잘못을 범해도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십자가의 이름을 빌어 죄를 합리화하는, 그런 값싼 용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가 아니다. 용서에 대한 우리의 간구는 산상수훈의 말씀과 연결시킬 때 제대로 이해가 된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하는 간구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간에 잘못을 인정하고 그 인정을 바탕으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 갈등을 없애고 하나가 되는, 평화로 이어지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전제하에서 나는 오늘 한이 맺힐 정도의 원한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간의 관한 용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용서와 관련된 잘못에 대해 범주를 좁혀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남의 잘못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완악한 탓도 있지만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우리 중심의 잣대 때문이다. 우리는 이중의 잣대를 갖고 있다. 자신에게는 넉넉한 자를, 남에게는 좁은 잣대를 적용한다. 정치계에서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흔한데,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대변하는 것도 우리가 얼마나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장 잘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은 71-5절의 말씀이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잇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지적하고 이를 빼내려고만 든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단적으로 위선자라고 지적하신다. 자기가 큰 죄인인줄 알면 다른 사람의 잘못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쉽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다.

 

누가복음 736-50절에 보면 예수께 향유를 바른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은 용서받은 여인의 이야기다.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울면서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다. 그 여인은 속칭 주변에서 죄인이라고 비난받던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이걸 보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과 상종한다고 비난한다. 단지 그 여인이 죄인으로 손가락받는 여성이었다는 이유로 여인과 예수님을 비난했다. 예수님의 눈에서 보면 여인이나 주인 바리새파인 시몬이나 다 죄인일 따름이다. 둘 다 죄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용서받을 것도 없다는, 그런 교만한 사람이었다. 이런 둘의 상태를 비교해보면 시몬의 경우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보면서 그걸 빼내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인은 자기 눈의 티를 대들보처럼 생각하고 참회하는 행동을 보인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을 더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구원을 선포하신다.

 

예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 나오는 시몬처럼 자기는 경건하고 거룩한 자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정죄하였다. 특히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대들보처럼 본다. 마찬가지로 제 눈에 대들보가 있는 사람들은 남의 티를 대들보처럼 보기 때문에 남을 격려하는 말을 하기 보다는 비난하는 말을 해 남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다 보면 비난이 습관이 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기를 깎아내리게 되고 주변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불평과 불만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부부와 자녀, 동료와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도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자기가 남을 심판하는 그 잣대로 자기도 심판받게 된다.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힌 만큼 우리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다. 나는 바른 말을 잘 하는데, 바른 말이라기 보다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많이 입힌다. 내가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비판하는 자세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게 자칫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함정이다. 나부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비판적인 자세 때문에 상처를 입는지 헤아려보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주어야 할 애정과 사랑, 칭찬과 격려, 신뢰 대신에 심판을 주로 했고, 그로인해서 상처를 입혔다면 그것도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다. 이건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일을 하지 않아서 내가 상처 입는다면 그들이 나에게 빚을 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 하는 기도는 우리에게 비판이 아니라 관용의 마음을 키우도록 촉구하는 기도다.

 

 2002.8.28 청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