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청암하늘 뜻 나누기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1.

한국소금 2022. 9. 24. 22:41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악에 서 구하소서.1

누가 4: 1-13

 

시험에 들게 마시고

 

45년전 어느 날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당신하고 상의할 일이 있는데....“

 

그때 남편은 기독교계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언론검열이 심하던 때였다. 이미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서 양식 있는 언론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다가 대량으로 해직당하기도 했다. 남편이 쓴 기사가 종종 문제가 되어 신문 제작을 몇 번이나 다시 한 일도 있었다. 산업선교 소식이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두둔하는 기사를 써서 남편은 안기부의 요주의 리스트에 올랐고 다른 일간지에서도 다루지 않는 인혁당 문제를 기사로 내어 인혁당 가족들이 그 신문을 오려가지고 다니다 보니 해고대상이었다. 그러나 신문사 사장은 차마 남편을 자르지 못했다. 그랬는데 신문사의 경영이 어려워지고 다른 기업으로 넘어갔다. 그 기업이 바로 명성그룹이었다. 드디어 산업선교를 두둔하고 NCC를 비호한 것이 문제가 되어 편집차장이던 정지강목사와 함께 해고대상에 올랐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기 싫으면 다시는 그런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그때 나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있을 때였다. 한 가장의 가장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당장 생계가 걱정되었다. 혼자라면 망설일게 뭐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망설일게 뭐 있어요? 해고당하면 당하는 거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다행히 작은 집이라도 있으니 취직이 안 되면 집 팔아 전세살고 그래도 안 되면 월세집에 살면 되는 거지.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남편은 각서 쓰기를 거부했고 급기야 해고당했다. 이 일은 교계유일의 해직사건이었고 남편의 뜻에 동조한 기자들이 함께 항의 사표를 써서 5명이 함께 해직 당했다. 그때 남아있던 다른 사람들은 계속 승진을 해서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남편은 1년반 동안 실업자 생활을 해야 했는데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너무 어려울 때는 정의가 밥 먹여주나? ”하는 후회 아닌 후회도 하였다. 특히 교계 유일의 해직사건인데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해직사태에 대해서는 발 벗고 나서던 종로5가 기독교 운동권 인사들이 나 몰라라 할 때는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기도 했다. “이 다 누구 때문인데, 자기들 비호하다가 짤렸는데,,, 하는 원망도 했었다. 자기 소신 대로 해놓고 왜 남을 원망했을까? 지금 와서 보면 이것 역시 하나의 시험에 넘어간 것이었다. 왜 해직기자 대접을 해주지 않느냐 하는, 명예에 집착했던 것이다. 비록 물질의 시험에는 넘어가지 않았지만 명예라는 시험에는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마옵시고...”하는 기도를 드릴 때 명예라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하고 덧붙인다.

 

모든 인간은 시험을 당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태복음 4: 1-11, 마가복음 4:13, 누가복음 41-13절에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기사가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청원하라고 하셨다. 공동번역에는 유혹이라고 번역되어있다. 인간이 가장 빠지기 쉬운 시험이 무엇일까? 우리는 그 대답을 예수가 당한 시험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는 악마(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당한다. 첫째는 빵의 유혹이다. 사십 일을 금식한 예수에게 사탄은 돌로 빵을 만들라고 유혹한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 이상 큰 유혹이 어디 있는가?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이 시험을 이긴다. 빵의 문제는 모든 물질적인 유혹 중에 가장 절실한 것으로서 빵의 유혹이란 물질의 유혹을 뜻한다.

 

인간이 걸리기 쉬운 두 번째 시험은 명예의 유혹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라고 유혹한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떠받쳐 다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터이니 얼마나 영광스럽느냐는 것이다. 명예에 연연하는 것도 시험에 드는 것이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욕에 빠지는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산에 데리고 가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는 성경말씀으로 이 유혹을 물리친다. 권력이란 결국 악마의 유혹의 도구인 것이다. 17년전 오늘 일어났던 광주사건은 이 악마의 권력을 미끼로 한 유혹에 걸려든 일당들이 일으킨 학살사건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매일 물질, 명예, 권력의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하는 기도를 하도록 가르치셨다.

 

시험과 유혹의 사이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하는 기도는 사람의 본성과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어기고 졸던 제자들에게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도다.”하고 탄식했듯이,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라고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자신들의 희망을 배반하는 유혹에 늘상 빠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를 유혹하는 그 유혹에서 벗어나면 이전보다 크게 성장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시험에 빠지면 인생이 망하지만 시험을 이겨내면 새로운 삶으로 나가게 된다. 이렇듯 시험이란 위기와 기회를 통시에 갖고 있는데 일생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시험을 당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하는 기도에서 시험이란 헬라어 원어는 페이라모스라는 단어로 씌어 있다. 이 페이라모스라는 말은 두가지 뜻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시험이란 뜻과 다른 하나는 유혹이라는 뜻이다. 한 단어 안에 두 가지 뜻,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둘 다 갖고 있다. 영어를 보면 그 뜻이 명확히 들어나는데, ‘TEST'’TEMTATION‘이란 단어다. TEST란 시험해 본다, 훈련한다 라는 뜻을 갖고 있고 TEMTATION이란 유혹이란 뜻이다. 시험이나 훈련은 사람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혹이란 사람을 망하게 하고 더 타락시키는 것으로서 부정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들게 하지 마옵시고하는 말은 그리로 인도하지 마옵시고하는 뜻이다.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소서!‘하는 간구다.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를 보면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한다고? 시험은 사탄이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기도다. 그러나 이 말의 참 뜻은 사탄이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려고 하는데 그 사탄의 인도를 따르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것이다. 시험이라는 말이 TEST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사실상 우리 인간들은 시험을 당하면 그 시험을 통해 자기를 연단시키고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면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하기 보다는 사탄의 함정인 유혹에 빠져 자기 인생과 영혼을 망치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하는 기도는 모든 인간이 시험에 빠질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 성서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시험에 빠진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떤 이는 그 시험을 잘 통과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인물들은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저버린다. 이렇게 성서가 시험을 견디는 이들과 시험에 빠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의 인물을 통해서 시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받는 요셉의 이야기는 인간이 매 순간 시험과 유혹 앞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송봉모신부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글에서 어두운 밤길이라는 신앙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우리 인생길에거 어두운 밤을 치춰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두운 밤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걸어가는 도중에 넘어졌다면

즉시 일어나 다시 걷도록 용기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어두움을 치워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며 걸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청해야 한다.

 

예수께서 시험빋으시는 이야기에도 나오듯이 시험은 하나님이 하시는게 아니라 사탄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욥기는 사탄이 욥을 어떻게 시험에 빠지게 하려고 했으며, 욥은 어떻게 그 시험을 이겨냈는가 하는 이야기다. 욥기는 사탄은 인간을 파괴시키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가 신뢰하는 인간을 사탄이 시험하도록 허락한 경우의 이야기다. 욥은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자식도 많고 재산도 많았다. 이 욥의 모습이 좋은 부자모델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욥은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었고, 사탄 앞에서까지 하나님이 욥을 칭찬한다. “욥처럼 정직하고 흠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자 사탄은 욥이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 축복을 거두어가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다.” 라고 도전한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시험해보도록 허락하고 사탄이 욥을 가혹하게 시험하는 것으로 욥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탄은 맨 먼저 욥의 자식들과 재산들을 몰살하는 시험을 한다. 그래도 하나님을 저주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자 욥의 몸에 악성 종기가 나게 하여 얼마나 상태가 괴롭던지 옹기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는 상태가 되었다. 욥의 아내가 나서서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키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라고 말한다. 그래도 욥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누리는 복을 받았으면 벌도 재앙도 못받을게 무엇이냐고 반문하며 시험에 빠지지 않았다.

 

욥기 3장부터 37장까지의 이야기는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욥을 치신 하나님에 대해 변론하는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욥은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시험을 이겨내면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시리라는 희망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욥은 단지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저 받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현실의 고난을 수용한다. 그래서 욥기는 시험을 당하는 욥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의인이 받는 고난의 물음에 대한 것이기도 한다. 사탄은 욥의 비극을 통해서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를 짓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비극이라는 시험을 통해서 사탄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 높고 깊게 쌓아갔다. 고난받는 욥의 이야기는 시험을 이겨냈기 때문에 더 큰 축복의 삶을 받은 아름다운 결말로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그 보상이 고통을 이겨낸 값으로 볼 수 있는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물질에 대한 보상은 물질로 대치될 수 있지만, 잃는 자식은 영원히 가슴에 남지, 새로운 자식으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욥이 받은 시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시험을 이겨내니 더 큰 보상을 받았다, 그러니 시험을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어떻게 극복해내느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읽지 않으면 그 보상 역시 우리에게 시험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시험에는 사탄의 파괴적 측면과 하나님의 단련이라는 의미, 두 가지가 동시에 들어있다.

 

괴테는 욥기를 모티브로 하여 파우스트라는 유명한 작품을 써냈다. 유명한 과학자 파우스트는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파우스트를 유혹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 내기를 건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농간에 빠져서 지식의 허무, 삶의 허무함을 깨달아 자살하려고 한다. 이때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자신이 파우스트의 노예로서 봉사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즐거운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대신, 만일 어느 한 순간에 멈추어라, 너는 너무도 아름답다.”라고 감탄하면서 삶의 휴식을 원하게 되면, 영혼을 영원히 악마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는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여러 욕망을 성취한다. 그러나 욕망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욕망 때문에 영혼을 판 것을 후회한다. 생의 쾌락을 위해 시공을 초월하면서 이것저것 다 해보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해보았지만 그는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인생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자기 욕망의 달성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땀흘리며 땅을 개간하는 일을 통해서 였다. 땅 없는 사람들을 위한 땅을 개간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통해서 파우스트는 세상이 아름답다. 나는 내 삶의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말을 함으로 생을 마감한다파우스트의 결론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는  파멸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레첸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천상으로 인도된다

 

욥과 달리 파우스트는 자기 육체적 욕망을 위해 영혼을 파는 사탄의 시험에 떨어지고 만다. 파우스트는 과학자로서 이미 명성과 부를 갖고 있었기에 이미 늙은 그에게 없는 젊음의 회복이라는 것이 파우스트에게는 유혹이 되었다. 이 파우스트의 모습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욕망의 추구를 위해 시험에 빠지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만일 사탄이 우리 앞에 와서 파우스트에게 한 것처럼 현세의 행복을 위해서 영혼을 팔 것을 요구한다면 과연 그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을까?

 

파우스트처럼 우리 인간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수없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욥이 될 것이냐, 아니면 파우스트가 될 것이냐? 사탄의 유혹에 빠져 멸망할 것이냐, 아니면 유혹에 이겨내 한 단계 높게 성장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시험은 시험 당하는 사람의 결단에 따라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타락과 멸망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면제시켜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시험에, 유혹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그 유혹으로 인도되지 않도록 지켜주십사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우리는 모두 시험과 유혹 사이에 서 있다. 우리가 세상의 삶에서 유혹을 받을 때, 유혹에 흔들릴 때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시험을 이겨내도록 기도하자.

 

고통의 빛깔

 

우리에게

상처와 위기를 다를 수 있는

능력과 은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승리를 얻는다는 것은

선택의 자유를 훈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이 비록 우리를 아프게 할지라도

우리는 그 고통의 빛깔을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

상처와 고통을

믿음으로 대면함으로써

삶을 풍요롭고 아름다눈 빛깔로 배합라고

또 그렇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손 봉모-

 

2022.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