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한국염
우리는 지난주에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할 때 “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는 원래 ‘아빠기도’로 알려져 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예수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하셨는데, 나중에 번역과정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가 되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같으신 분이라는 하나의 상징이다. ‘하늘에 계신’ 이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권위주의적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위계적인 이 세상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분임을 의미한다. “아빠, 아버지”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아빠, 정의의 아버지’로서, 아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며, 연민과 해방을 의미한다. 곧 세상의 악과 고통 한 가운데서 억압받고 고통 받는 자식들과 함께 하는 연민의 하느님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특정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온 인류를 위한 분임을 뜻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혈연중심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온 인류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식전환을 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세계라는 집, 지구라는 집의 주인이다. 어느 집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질문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 즉 그 집의 구성원들은 모두 넉넉하게 갖고 있는가?”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공정하고, 공평하며, 정의롭게 자기 몫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자식과 자식 간에 불평등이 있으면 그 불평등이 집안의 평화를 깨뜨리듯이, 이 세계 구성원들 간에 불평등이 있고, 차별이 있으면 평화가 깨어진다. 기독교인들이 공동체의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며 이 땅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이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이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서로 연속선상에 있으며,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하셨을까? 청암교우들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에 대한 단상을 적어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단 한 사람만 응답을 보냈다. 그 글이 마음에 울림이 와서 소개한다. 내용은 이렇다.
“이름'이라는 게 뭐기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는 기도를 드리는 걸까?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담아낸 그 무엇이다. 내 이름은 '예쁜 꽃'이다. '꽃'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니 근심 걱정이 많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은 차려 입지 못하였다."(눅12:27)말씀이 떠올랐다. 예수께서 비유를 든 이 "꽃"이라는 소재는 유한한 인간의 그 작은 우주 안에서 고민하고 걱정하고 복닥거리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 전우주적이고 전체적인 하나님의 시야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 같다. 그러게.내가 '꽃'인데^^ 왜 걱정과 근심으로 시간을 낭비할까, 순간 스쳐가는 위로의 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김춘수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꽃'이라는 시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갓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무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이 있어야 비로소 그 의미가 그 안에 잘 담긴다. 불안해하거나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다보면 예를 들어, 갑자기 '아. 그래서 지금 슬펐다는 말이로구나' '화가 났다는 말이네' 등등의 생각이 떠오를때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름을 붙혀준게 된것이다. 그러면 그사람은 '아. 나의 이 혼란스럽고 복잡하여 불안한 이 심정이 바로 슬펐다는 다른 말이었구나.'.하면서, 그 '이름붙이기'를 통해 자신과 소통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가 고백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나는 어떤 하나님을 고백할까. 내 안에서 참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기에 충분한 그 이름은 무엇일까. 자주 고민하고 물어야겠다.
이 글처럼 이름은 누가 불러줄 때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마태복음 6:9절에서 온 것이다. 표준새번역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공동번역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모두 그 앞에서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들어 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며”가 원문인데, 당신이 겹쳐서이기도 하고, 당신이라는 말이 낮추는 말로 들려서 뺀 듯하다.’당신‘이라는 우리말이 원래는 높은 존칭인데 잘못 씌어 낮춤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기가 꺼려져 당신을 빼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기도한다. 몇 년 전 보수적 교단에서는 ’당신‘이라는 말 대신에 ’아버지의‘라는 호칭을 넣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여성들은 이렇게 ’당신‘이라는 말 대신에 ’아버지‘ 라고 반복적으로 호칭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부장적 이미지를 고착시킨다고 반대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 당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기도하도록 하지 않고 굳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기도하도록 하셨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름의 의미요, 다른 하나는 ’거룩‘이라는 말의 의미다.
이름의 중요성
이름이란 그 이름을 지니고 있는 자의 전 인격을 대표한다. 이름은 그의 자아와 관계가 있으며, 인격이 집약되어 있다. 우리 일상에서도 보면 이름은 곧 그 사람의 됨됨이와 연결 짓는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당사지의 정체성이나 평판을 드러낸다. 정체성이란 내면에 관한 것이며, 평판이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못된 행동을 할 경우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거나 이름값도 못한다고 비웃음을 당한다. 일본식민지시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혼과 정신을 빼앗을 목적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했다. 이런 일들은 이름을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연결 지어 생각한 때문이다. 실제로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인격을 빼앗긴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 평민 여자들에게 이름이 없었다. 여자들은 하나의 온전한 인격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을 따서 00댁 하고 불리거나 아이의 이름을 따 누구의 어머니로만 불렸다. 이런 이름 없는 여인들에게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이름을 지어준 일이었다. 비록 성경에서 따온 서양식 이름이었지만, 이름을 갖게 됨으로 내가 누구라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누가 누구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지어준 이에 대한 소속감이나 지배권을 나타내기도 한다. 노예주인은 노예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이름은 중요한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인격은 물론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것이다. 인류 최초 인간 아담은 흙에서 나왔다는 뜻을 갖고 있고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런가하면 사람이 변화될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은 직접 나서서 그 사람의 이름을 바꿔주심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아브람‘은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는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모든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사라‘로 바꾸어주었다.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뜻을 가진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꿔주었다. 예수 역시 제자들의 이름을 바꿔주셨다. 시몬이라는 이름을 반석이라는 뜻인 ’게바(베드로)로 바꿔주어 변화를 촉구하셨다. 성서에서 이름이 바뀔 때에는 내 개인의 복을 받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거나 새사람으로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다. 역대상 4:9-10에 보면 ‘고통의 아들’이라는 좋지 않은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자식이라고 ‘야베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야베스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준 이야기가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기독교로 입문하는 영세를 받을 때 본인이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따로 세례명을 짓는다. 그 성인을 닮겠다는 의지가 들어있어 좋은 것 같다. 개신교에도 이런 전통은 살려도 좋았을 것 같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우리기 기도할 때, 과연 그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하나님 호칭은 ‘아빠, 아버지’로 족하다. 그러나 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기도에는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그 이면에는 십계명 중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너희는 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출20:7)는 선언과 관계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유배 이후(BC538)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인 ’여호와‘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경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겨 사용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하나님을 부를 때는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아도나이‘를 대신 사용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성서의 본래 가르침은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을 함부로 이름 짓지 말라, 즉 하나님을 멋대로 규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거스틴 교부는 이를 경계해서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가 성서를 살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호칭만 해도 한 30가지가 넘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느라 이름을 지어 불렀다. 최초로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른 사람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다. 하갈은 주인의 박해를 피해 도망가던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나 도움을 받고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브엘라 해로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전능하신 분(엘 사댜이, 영원하신 분(엘 올람), 위로하시는 분(나함), 의로우신 분(치드켜뉴), 미리준비하시는 분(여호와 이레), 어디든지 계시는 분(여호와 삼마), 승리케 하시는 분(여호와 닛시), 거룩하게 하시는 분(여호와 카두위), 하나님은 평화(여호와 샬롬), 하나님은 치료자(여호와 라파), 여호와 멜렉(하나님은 우리의 왕), 하나님은 반석(여호와 추리) 등등, 모두 자기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불렀고, 이런 호칭은 하나님의 하나의 속성일 뿐이다. 수피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101개다. 여기서 100이란 무한수를 의미한다.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이름 중 대표적인 것은 ‘야훼’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밝히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름 야훼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 현장이다. 오늘의 본문은 모세가 이집트 바로 왕의 박해를 피해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된 후 호렙산에 올라갔다가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다. 가시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는 관경을 보고 다가갔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 나는 이집트에서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내게 하겠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묻는다.”제가 이스라렐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텐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셨다. “나는 ‘야훼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야훼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출애굽기 3장 14절). 이후 우리는 하나님을 야훼 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읽은 야훼 또는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표준 새번역과 개역개정은 야훼를 ’스스로 있는 자‘로 번역했는데, 야훼라는 말은 스스로 있게 하는 자”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여기에 미래형으로 모음을 찍으면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나(I will be who I will be)다.”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 또는 야훼라고 인간에게 밝히신 것은 하나님 자신은 스스로 있는 분이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서도록 하시는 분, 있어야 할 미래를 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삼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스스로 “야훼”라고 이름을 밝히신 현장과 연결하여 보면 야훼라는 이름의 하나님은 압제당한 백성, 종살이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억압에서 해방시켜 스스로 서게 하는 하나님,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 스스로 설 수 있는 곳으로 나가게 하는, 그런 분이다. 출애굽 공동체가 이해한 하나님은 있어야 할 미래를 있게 하시는 분, 우리가 있어야 할 그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에게 이름을 밝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으로 나오지만, 사실상 이집트를 탈출한 사람들, 출애급 공동체는 ’하비루‘라고 부르는, 떠돌이와 노예들의 집합체로서, 다민족 공동체였다. 즉 하나님의 이름 야훼는 구출자, 즉 해방하시는 분이라는 강력한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할 하나님의 이름이다(15절). 이렇게 하나님을 야훼로서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집트 안에서 그들이 겪은 어떤 악한 제제나 억압을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는 재생해서는 안 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구하신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되게 하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영광받게 되는가?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6)고 말씀지만, 요즈음 한국교회는 ’개독교‘라는 이름을 들을 정도로 본연의 맛을 잃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는커녕 더럽히고 있다.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르다’라고 칭찬받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인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온갖 악과 역겨운 일들을 행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세상에서 불의한 일에 앞장섬으로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욕을 먹게 하고 있다.
작년에 읽은 존 도미닉 크로산이 쓴 책 주기도문에 관한 《가장 위대한 기도》라는 책을 읽으며 거룩함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레위기 19장 2절에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인간의 거룩함을 위한 모델이다. 그 하나님이 레위기 19장에 보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의 계명을 주셨는데, 핵심은 하나님이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구원자요, 속량자인 것처럼, 그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인들을 억압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길은 종살이 했던 때를 기억해서 그들 공동체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보호함으로 분배정의를 유지하는 하는가에 달려있다. 크로산에 의하면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안식일의 거룩함과도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노동으로부터 쉬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길은 그날 일을 쉬는데, 집 안에 속한 모든 사람, 주인과 나그네, 종들, 가축 모두가 쉬는 것이다. 모두가 노동에서 쉬는 평등한 날이 안식일이요, 모두 쉴 때 거룩한 안식일이 된다. 크로산의 말처럼, 공평과 공정이 무너진 오늘의 세계에서 분배정의를 실현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공평이 무너지고 공정이 설 자리를 잃고 분배정의가 사라졌다. 자본과 상품이 인간보다 더 우위에 있고,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느냐에 사람의 가치가 매겨진다. 한 사람의 인격이 상품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없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 집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부의 수단으로 집을 점령해서이고, 식량이 절대 부족해서 기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이 독점해서, 인간들이 나누지 않아서 식량위기가 생긴다. 더 갖기 위해 전쟁을 하고, 더 갖기 위해 사람과 자연을 착취한다. 노동으로부터 쉼도 없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요, 이는 결국 인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피조물이 신음하며 하나님이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기도에는 행동이 따른다. 우리는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이 세상에서 분배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고, 사회적 약자들이 억압당하지 않고 살면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 한 모델을 보자.
남미의 가톨릭 신부 로메로는 1970년대 말 산 살바도르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당시 남미는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 계층이 정치, 경제,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민으로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교회는 엘리트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로메로는 민중사이로 들어갔다. 그는 정치적 우익의 부당한 특권과 폭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게릴라 좌익의 폭력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것처럼 억압의 멍에를 부수고, 희망의 씨를 뿌리는 뿌리는 것을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신다”라고 주장하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오두막과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 커피농사를 짓는 사람들, 실종된 사람들과 고문받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말했다. “배고픔과 헐벗음, 가난과 고문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느낀다.” 라고. 그는 단순한 자선행위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왜나면 그것은 사랑의 모습을 정의기 빠져버린 자선활동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79년 크리스마스 이브 설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구유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어린 예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오늘 밤 잠자리로 가야하는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아이들 가운데서, 문간에서 신문을 덮고 잠이 들 가엾은 신문팔이 소년들 가운데서 찾아야 합니다.”
로메로 주교는 정치가들과 메스콤들에 의해 정부전복을 지원했다고 고발되었다. 그는 그 고발내용을 부정하면서 “존재해서는 안될 불의한 질서의 뿌리를 복음이 건드리고 있다고 하여 정부전복적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그 고발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측했고, 1980년 사순절에 미사를 강롢는 중애 암살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비록 로메로는 죽임을 당했지만, 민중들 속에서 로메로는 부활하였고, 부활한 로메로가 벽화마다 나타났다. 로메로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드높여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되살아났다. 로메로 대주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았다.
스스로 있는 자를 닮아 자유로운 모습으로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처럼 살아야 한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그분의 이름처럼 내가 스스로 서고, ‘스스로 있게 하는 자’라는 그분의 이름처럼 압제 당한 자를 스스로 서게 일으켜 세우고, ‘ 있고자, 되고자 하는 나’라는 그분의 이름처럼 나와 이 세계가 그분이 원하시는 세계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서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스스로 서게 할 수 없고,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할 수도 없다. 진정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나’답게 존엄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며, 이 경험으로 사람들을 있어야 할 곳에 있도록, 분배정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이름의 뜻을 음미해 보지도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거나 남을 억누르고 짓누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다.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예수는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인간으로 온전히 서서 이 세계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며 그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평화의 세상이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은 저절로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을 닮아 거룩하게 살 수 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마태 5:48)”고 권면하신다. 함께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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