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독여성운동과 나의 삶 이야기

한국소금 2023. 8. 1. 10:23

기독여성운동과 나의 삶 이야기

 

한국염

 

2022 7 7일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기독교 에큐메니컬 여성운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기독교민주화운동 역사정리를 위한 집담회가 열렸다. 이 집담회는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가 주최한 것이다. 주제발제를 한 이문숙 목사는 이 시기 기독여성들의 민주화운동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기독교여성 에큐메니칼 운동은 6080년 민주화 인권운동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쥬류 남성 지도자들의 주변적 존재가 아니라 운동의 주체로 고유한 영토를 개척했다. 기독교여성운동은 가부장제 하에서 강요되어온 수동적 역할을 벗고 민주화운동의 주체로서 의미있는 영역을 구축했다. 민주화 인권운동을 주도해 사회에 위로와 용기를 준 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독교 여성운동을 부수적으로만 취급하거나 그 역사를 아예 간과하는 것은 유감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 역사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다.

 

6080년대 소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민중이고, 민중을 변혁의 담지자요, 주체라고 말한다. 이들은 여성들의 민중성에 대해서는 인지를 못하고, 인지했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민중신학에서 민중이 메시아인가?” 하는 민중 그리스도 담론도 등장하지만 그 담론에 여성 민중의 자리는 없다.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부장적으로 억압과 통제를 받는 대상이며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고 살아온 생존자들이다. 그러기에 여성들이 한 모든 활동은 당사자 운동으로의 의미를 지닌다. 이 글에서 나는 내 삶의 서사시를 통해서 기독여성들이 치열하게 전개했던, 70년대에서 2000년 대 초기까지의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돌아보고자 한다.

 

내가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

 

나는 돌 지나 두 달 만에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임진강을 건너온 전쟁 피난민이다. 전쟁통에 아버지는 죽고, 사고무친 이남에서 어머니가 나를 기르느라 죽도록 고생했지만 나는 무남독녀라서 차별을 모르고 지냈다. 가난 때문에 힘들었지만, 공부를 잘해서 여자라고 무시를 당해 본 일이 없다. 내가 차별을 경험한 것은 어이없게도 신학교에 입학해서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여자 목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무지하게도 능력 없어서 여성목사가 없는 줄 알았다. 최초의 여목사가 되겠다는 건방진 꿈을 안고 한국신학대학(한신)에 입학했다. 신학대학에 입학해보니 여성 목사가 없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목사가 못 되는 이유가 세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고, 아버지는 남자니 남자만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고,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예수가 남자 제자만 선택했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서 때문이라니! 하도 기가 막혀서 신학교를 관둘까 고민하던 차에 이우정이라는 여자 교수가 있는 것을 보고 기왕 들어왔으니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하자, 하고 신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 이우정 선생님을 통해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여신도회)에서 여성 안수를 위해 교단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때부터 내 발로 여신도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다행히 세계여성의 해를 일 년 앞둔 1974년에 우리 교단에서 여목사 제도가 통과되었다. 이런 나의 경험 때문에 나는 교회여성운동과 여성신학운동, 사회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여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내 여정이 시작되었다.

 

1. 70년 대,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다.

 

내가 신학교에 다니던 70년대는 유신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의 시기였다. 신학교 시절에 삼선개헌을 비롯해서 위수령, 유신 등, 한국사의 질곡사들이 진행되었다. 이 무렵에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긴급조치 1호부터 9, 민청학련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들이 터졌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던 많은 목회자와 민주인사들, 학생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연행되거나 구속되었다. 이 민주화 투쟁의 대열 한복판에서 교회 여성들이 있었다. 당시 여신도회 사무실이 기독교회관 301호에 있었는데, 301호실은 구속자 가족들의 아지트였고, 수배자들이 여신도회 사무실에 뛰어들어와서 여신도회의 도움으로 피난처를 구하곤 했다. 여신도회는 구속자 가족들을 돌보고 구속자 석방을 위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석방탄원 활동, 재판 방청, 검은 옷 입기와 검은 리본 달기 등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구속자들을 위한 영치금을 모으고 영치물품을 구치소에 보내는 일, 선교사들을 통해 국내의 상황을 외국에 알리는 창구역할을 하였다.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의 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문익환목사는 ‘301라는 제목으로  왜 이 작은 방에서 하늘의 기도가 쏟아질까?”로 시작되는 기도시를 썼다.

평소에 여신도회를 자주 드나들던 나는 구속자 가족들이 철야농성을 할 때면 여신도회 나선정 총무의 호출을 받고 기독교회관 로비에서 구속자 가족들에게 시위할 때 부르는 노래를 가르쳐주고 리크레이션을 지도하며 같이 밤샘하였다. 일반집회가 금지되던 때라 여신도회는 기도회와 예배를 명분으로 고난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감사예배, 예수 맞이 성탄 예배 등을 통해서 구속자 가족들을 초청하여 격려하였다. 이때 나는 행사장을 꾸미고, 순서짜기, 노래지도 등의 프로그램을 담당했고, 영치금을 모으기 위해 빅토리 숄을 뜨는 작업에도 함께 하였다. 빅토리 숄을 짜서 해외 교회에 보내고 후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급할 때는 하루에 숄 한 벌씩을 짠 적도 있다. 숄을 짤 때 교회여성들은 숄 한 코에 나라의 민주화와 인권회복, 구속자석방을 기도 한 줌을 넣어서 짰고, 이렇게 기도가 담긴 교회여성들의 손길은 구속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의 옥중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여신도회 정식 회원이 되었다. 이 때 여신도회는 교회여성들의 인권화에서 기층여성들의 인권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여신도회가 운영하는, 전태일열사가 죽음으로 지켜내려 했던 청계천 여성노동자 야학교실에서 여성학과 노동학, 문해교육, 생활교육을 가르치는 자원교사로 활동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눈을 떴다. 여기에 여신도회에서 접한 동일방직 사건과 YH 무역회사 사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동일방직의 어린 여공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들의 고난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통찰하게 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여신도회는 교회여성연합회와 같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일선에 뛰어들었다. 동일방직 사건의 경우, 당시 인천산업선교회에서 일하던 조화순 목사를 통해서 사건에 접하게 되었는데, 동일방직 사건을 위해 여신도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임했던지 후에 조화순 목사가 어느 모임에서 이렇게 말하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감리교 목사인데, 나와 동일방직 사건을 위해 싸워준 사람들은 기장 여성들이다.“

 

이렇게 민주화와 인권, 교회여성의 인간화를 위한 운동을 배운 나는 여신도회를 통해서 사회 여성들의 문제에 관심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가족법 개정운동과 기생관광반대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가족법 개정이란 글자 그대로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인 법을 여성들에게도 평등한 법으로 바꾸자는 운동이었다. 가족법개정운동이야말로 민주화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가족법 때문에 피해를 보고 죽은 여성들은 있어도, 가족법 개정에 목숨을 건 여성들이 없었던 것을 보면 가부장적인 가족문화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새삼 느낀다.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1973년에 한국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이 국책사업으로 진행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여성연합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에 반발하여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교회여성연합회는 기생관광을 신정신대문제로 규정하였고, 기생관광 반대운동에 나섰고 정부와 마찰을 빗게 되었다. 70년대 기생관광 반대운동은 1980년대 매매춘관광 철폐운동으로, 90년 이후에는 성매매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나는 한신 선배들이 교회여성연합회와 여신도회에서 하는 교회민주화와 여성인간화 운동, 1979년에 교회의 민주화라는 주제로 열린 여신학사협의회에 자극받아 나도 본격적으로 교회여성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여신도회를 찾아가 간사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간사가 된 후 이곳에서 교회민주화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여신도 의식화 교육과 더불어 여성인간화로 일컬어지던 여성인권운동에 전념하였다.

70년대 후반에 여신도회는 생명문화 창조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 교회여성의 인권운동을 하던 여신도회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가 산업화로 인한 개발과 성장주의의 폐단에 있음을 인식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인권, 민주, 사회정의, 환경을 모두 포괄하는 운동으로서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 건설을 위한 기득권 포기운동이 그 핵심이었다. 이 생명문화창조운동은 후에 생명운동으로 진화되었으며, 한국교회가 전개하는 환경운동과 생명운동의 효시였다.

 

3. 80년대의 기독여성운동

 

여성신학의 태동과 바람

 

70년대 끝 무렵을 여신도회 간사로서 활동하던 나는 80년대에 와서 여성신학운동에 몸담게 되었다. 사회정의와 인권, 민주화 문제에는 관심을 갖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이 정작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민주화와 여성의 인간화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교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이었고, 그 근원에는 가부장적인 신학이 있었다.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의 신학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신학을 하고 성서를 읽는 여성신학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여신학자협의회‘(여신협). 나는 1979년에 열린 여신학사협의회에 참석한데 이어 1980 4 20일 창립된 여신학자협의회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창립 초기부터 홍보위원과 홍보위원장으로, 서기로, 간사로 활동하며 여성신학운동에 동참하였다. 여신학자협의회는 여성신학을 기반으로 가부장적인 교회를 평등 교회로 개혁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교회를 민주화시키고 교회여성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며, 눌려본 여성의 경험으로 눌린 자의 해방을 위해 일하는 것이 목표였다. 여신협은 교회의 가부장적 신학 전통에 도전하며 여성신학을 연구하고, 여성의 눈으로 성서읽기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을 통해 교회 여성들 사이에 여성의 삶과 지위에 대한 통찰과 성찰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여신학자협의회는 창립 초기에는 교회에서의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비롯해서 보편적인 교회여성의 삶의 자리에 관심하였다. 그러나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민주, 민중, 민족>이라는 삼민주의와 민중신학이 여신협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여성들은 여성신학을 통해 여성들 자체가 눌린 자로, 해방이 필요한 존재로 자각하게 되었고, 도시 빈민,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등, 민중여성들의 현장과 여성들의 삶을 보면서 민중여성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기층여성들과 현장신학화 작업을 하고서 여성신학의 주체는 민중여성이라고 선언하고 민중여성의 문제를 여성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민중여성의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기독여민회가 여신협에서 분화되어 생겨났다.

한편 여신협은 초대 회장인 박순경 박사의 영향을 받아 창립 초창기부터 통일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민족통일과 여성신학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정립협의회를 하였고, 분단과 통일문제를 주제로 현장신학화 작업을 하였으며, 분단과 가부장 문화의 연결성, 외세의 극복과 평화의 문제 등, 여신협의 통일 담론은 기독 여성들의 통일운동에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여기서 그동안 사용하던 교회여성이라는 말 대신에 기독여성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은 한국 교회여성운동의 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70년대까지 한국교회여성운동은 교회여성연합회에 의해 이끌어졌다. 198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여성위원회가 신설되면서 교회여성들이 하던 운동은 교회여성운동과 기독여성운동이라는 이중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교회여성연합회가 8개 교단 여신도회의 연합체라면 교회협 여성위원회는 8개교단 여신도회와 여교역자회, 교회여성연합회를 비롯해서 여신협과 기독여민회 등, 진보적인 여성기관들이 참여하고 있어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기독여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여성과 기독여성이라는 말이 교차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의 탄생과 기독여성운동

교회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한국교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교단이 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단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성평등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1977년에 교회여성연합회는 교회협에 여성분과 설치를 요청하였고, 교회협에서는여 이듬해에 여성분과를 설치하였으며, 여성분과는 4년 후인 1982년에 상임위원회가 되었다.

교회협 여성위원회는 발족 후 여성 앞에 놓여있는 교회와 사회의 온갖 성차별적인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성서를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교회가 따라야 할 지침서를 만들어 행동으로 실천하고, WCC 여성위원회, 아시아교회협의회 등, 세계교회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88 4 25-29일 열린 세계한반도평화협의회를 위한 여성협의회, 1990년의 정의평화창조의 보전(JPIC) 여성대회, 교회협이 선포한 ’1995 통일희년, 1988년의 세계교회협의회가 선포한 기독여성 10 등이 교회협 여성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굵직한 행사다. 특히 여성위원회는 1988년 세계교회협의회가 선포한 교회가 여성과 함께 하는 에큐메니칼 10을 이끌어가면서 진보적인 기독여성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기독여성들의 대 사회적인 이슈들이 이 단위에서 논의되고 추동되고 있다. 교회협 여성위원회는 내가 전문위원으로, 위원장으로 25년 이상을 활동한 곳이다.

교회협 여성위원회 발족 후 교회협 총회에서 의사결정기구에서 여성참여 비율을 30%로 하기도 결정하여 여성이 처음으로 총대가 되었으며, 여성목사가 교회협 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후 여성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도록 여성부회장 1인 제도가 신설되었고 내가 첫 여성부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협의 기구개편은 교회협 회원단체인 교단에도 영향을 미쳐 결의기구에 여성참여를 증진하게 되었다.

여성위원회는 교회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성단체들과 연대하여 사회개혁과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해왔다. 사회변혁을 위한 활동은 여성위원회가 독자적으로 하기보다 여성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수행되었다.

 

1984년에 경찰의 여대생 추행사건 대책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여성운동의 연대체 가능성을 본 여성들은 1984 3 8일에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민족, 민주, 민중과 함께 하는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제1회 한국여성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를 계기로 1986년 한국의 진보여성운동을 대표하는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이 결성되었다. 여성연합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 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여민회 등 기독여성단체들과 여성의 전화, 성폭력상담소, 여성민우회 등, 일반 진보 여성단체들이 연합해서 만든 단체다. 기독여성들은 여성연합과 더불어 80년대 후반에 여대생추행대책협의회, 해고된 여성노동자 복직운동, 25세 여성 조기 정년제 철폐운동, KBS-TV 시청료 거부운동,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의 여성문제를 일반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전개하였다.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남영동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기독여성들이 삼베 수건을 쓰고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시위를 한 일은 유명하다.

이 무렵 교회여성연합회를 중심으로 최루탄 추방운동이 전개되었고, 최루탄을 던지는 전투경찰 대원들의 가슴에 꽃을 달아 주는 운동도 진행되었다. 교회 여성지도자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최루탄을 쏘지 말고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라는 기자회견을 연 당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고 쓰러졌고, 이한열의 장례식에 교회여성들은 삼베수건을 쓰고 시청 앞까지 행진하였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610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기독여성들도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직선제개헌을 위한 행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한국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80, 90년대 교회여성들의 반전반핵 평화운동과 통일운동

 

1984년 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에 물꼬를 튼 것은 기장 여신도회와 여신협, 교회여성연합회다. 여신도회는 <생명운동 정책협의회>에서 평화운동, 통일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였다. 여신협은 통일문제 신학화 작업을 한 후 1988 3,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여신학자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을 기초로 88 4월에 여성위원회 주최로 열린 세계기독교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여성협의회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여성위원회는 기독여성 10년을 선포하면서 남북으로 가로막는 분단의 바위돌을 옮길 것을 과제로 천명하였다.

1990년부터 여성위원회는 평화군축을 위해 방위비 삭감을 통한 긴장 완화와 평화 증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에 반전반핵이라는 지표도 설정되었다. 반전 반핵운동은 교회여성연합회가 60년대 말부터 일본에 끌려가 원자폭탄의 피해자가 된 채로 해방 후 국내에 돌아왔으나 그어떤 보상이나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고통당하는 원폭피해자들을 지원하면서 핵 문제에 눈을 떠 시작한 운동이다. 민족애와 인도주의적으로 시작한 원폭피해자 지원이 반핵운동으로 이어졌고, 반핵운동은 곧 공해추방운동과 환경운동으로 확장되었다.

 

4. 90년대 전개된 기독여성운동

 

여성과 함께 연대하는 기독여성 10 운동

 

1987 6월 항쟁 이후 기독여성들은 기독여성 10 운동에 매진하였다. 1988년에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가 여성과 함께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10을 선포하고 앞으로 10년동안 교회들이 여성과 함께 연대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국에서는 <기독여성 10>운동으로 불렀다. 이 기독여성 10년의 주 내용은 교회에서 여성의 참여를 높이는 일,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여성의 공헌을 기리고 치하하는 일, 여성의 영성을 키우고 여성의 눈으로 신학하기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교회협 여성위원회 주최로 1988 4 4일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누가 바윗돌을 옮길 것인가?” 라는 주제로 기독교여성 10 선언대회를 열었다. 기독여성들은 가부장사회의 틀을 탈피하지 못하고 여전히 성차별적인 한국교회를 평등교회로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기간에 교회결의기구에 여성참여 비율을 높이는 운동을 한 결과 차별적인 안수제도가 이 기간에 폭넓게 개선되었으며, 성차별 조항이 일부 개정되었다. 획기적인 일은 한국에서 제일 큰 교단인 예수교장로회 통합측에서 여성안수제도가 통과되어 많은 수의 여장로와 여목사를 배출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협 총회에서 성차별적 관행들을 없애기 위한 교회가 여성과 함께 하는 지침서가 채택되었다.

이 시기 기독여성들은 정의,평화,창조의 보전을 위한 활동도 괄목할 만하다. 매매춘여성 인권운동, ‘일본군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활동, 반핵 평화운동, 군축운동, 방위비를 삭감해서 여성복지에 쓰기 운동, 보안법철폐운동과 장기수돕기, 윤금이 살해사건으로 촉발된 주한미군범죄대책활동과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 공해추방운동과 환경운동, 민중여성의 생존권 보장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95통일희년의 비젼과 평화통일운동

 

90년대 여성들의 통일운동에서 괄목할 만한 것은 1991년 서울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분단 이후 최초로 민간차원의 남북여성 만남이 이루어졌고, 북에서 온 최옥희 전도사와 기독여성들의 만남도 있었다. 이 토론회는 도꾜, 서울, 평양 세 곳에서 진행되었으며, 이 토론회에 기독여성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는데, 나는 서울토론회만 참석하였다.

1988년 한국교회는 해방 50, 분단 50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한다. 기독여성들은 22개 기독여성단체들이 초교파로 연합하여 ‘95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를 조직,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통일운동에 나섰다. 95년에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꿈으로 끝난 미완의 통일희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통일을 해야 하며, 어떤 통일이어야 하는지를 각인시키는 데는 많은 공헌을 하였다. 교회여성들에게 반공 컴플렉스를 많이 희석시키게 했다는 점에서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님의 말처럼 통일은 되었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겠다.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대협 활동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였다. 정대협은 종교단체가 아닌 민간단체이지만 그 시작은 교회여성연합회로부터 비롯되었다. 정대협이 만들어지기 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처음 거론한 것은 교회여성들이다. 30년전 당시 교회여성연합회 교회와 사회위원회 위원이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이효재 선생이 정신대문제를 연구하던 이화여자대학교 윤정옥 선생을 교회여성연합회에 소개하였다. 이후 윤정옥선생과 교회여성연합회 사회위원 김혜원, 김신실이 1988 2월에 일본군위안부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에 실태조사를 다녀왔다. 1988년 교회여성연합 주관으로 4 20-23일 제주에서 열린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에서 일본군 위안부 실태조사 보고를 통해 정신대문제를 공개적으로 폭로하였다. 1990 9 종군위안부 업무는 일본정부와 무관하고 민간차원에서 행해진 일이라고 한 일본 노동성 관계자의 말이 있은 후 교회연의 추동으로 1990 11 16일 교회여성연합회를 비롯해 37개 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만들었다. 회원단체의 절반이 기독여성단체들이다.

일본이 일본군위안부 존재자체를 거부하자 내가 바로 일본군위안부였다고 신고한 첫 신고자도 바로 동대문감리교회 교인이었던 김학순할머니였다. 김학순할머니의 신고 이후 제2,3의 김학순이 나와 239명의 할머니들이 신고를 했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통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전쟁범죄요, 반인권적인 여성범죄, 전시하 여성인권 범죄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계속적으로 일본국가 차원에서 강제로 한 것이 아니라고 공식인정과 사죄를 거부해왔다. 그리고 2015 한일외교장관합의를 통해서 일본군위안부의 역사 자체를 지우려 하고 있다. 이 한일합의 이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재단법인 정의기억연대’(정의연)로 바뀌었다. 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세워진 초기부터 25년간을 정대협의 실행위원으로, 공동대표로, 정의기억연대의 운영위원장으로 문제의 한 복판에 있었다.

 

5. 2000년대 기독여성운동

 

2000년대 기독여성운동은 크게 교회 내 성폭력추방운동, 호주제 폐지운동, 615 공동선언 실천운동, 4대강 운하건설 반대와 생명의 강 살리기, 제주 해군기지 건설반대와 밀양 송전소건설 반대하는 이들과의 연대 , IMF로 고통당한 KTX승무원과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을 위시란 비정규여성노동자들과의 연대, 북한 어린이 돕기 등이 있다. 물론 교회 민주화 운동은 언제나 중심 과제였다. 여기서는 내가 핵심적으로 활동한 교회 내 성폭력추방운동과 615 여성본부를 통한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교회 내 성폭력추방운동과 호주제 폐지운동

 

1998년 여신협의 총무가 되었다. 여신협 총무 시절에 큰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교회내 성폭력문제 공청회를 열고 교회 내 성폭력추방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회 내 성폭력 공청회 사안이 얼마나 민감하였는지 안기부 종교담당요원이 전화를 해서 공청회를 취소하면 안 되느냐며 후유증을 염려할 정도였다. 안기부 요원이 걱정할 정도로 종교지도자들의 성폭력이 많다는 입증이기도 했다. 5개 중대나 되는 경찰의 보호 아래 2차 교회 내 성폭력 공청회를 여는, 진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 얼굴에 먹칠했다고 남성 목사들로부터 욕을 엄청 먹었다.

공청회 이후 여신협과 교회여성연합회, 교회협 여성위원회가 교회 내 성폭력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성폭력추방운동을 전개하고, 교회협과 각 교단에 교회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을 벌였다. 교회협 2002년 열린 51회 총회에서 <성폭력극복과 예방을 위한 교회선언>이 교회협 문서로 채택되었다. 이후 각 교단들에서 교회 내 성폭력 방지를 위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고, 교회 내 성폭력 공청회와 추방운동은 20년 후 #미투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여신협 총무로서 교회 내 성폭력 추방운동과 더불어 전개한 것은 호주제폐지운동이다. 나는 여신협 총무로서 호주제 폐지를 당시 여신협운동의 중심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이를 위해 2001년 여성위원회, 교회여성연합회, 여신협, 기독여민회가 호주제폐지 기독여성연대를 조직하도록 했고, 여신협이 실무를 맡았다. 나아가서 천주교와 불교, 원불교 등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종교여성연대를 구축하고 호주제 폐지 운동을 추동하였다. 호주제 폐지운동을 범 교단적으로, 범종교적으로 벌였고, 호주제 폐지가 이루어지는데 기여하였다.

 

615 여성본부 결성과 기독여성들의 평화통일운동

 

2002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에서 만나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615 선언>을 선포하였다. 남측과 북측에서 이 선언의 실행을 위한 615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때 남측에도 여성본부도 결성되었는데 나는 당시 교회협 여성위원장 자격으로 종단여성을 대표하여 초대 공동대표가 되었다. 공동대표로서 615 행사에 참여함은 물론, 평양에서 열린 남북여성대회를 비롯해서 수차례 남북여성 만남에 참여하면서 공동선언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615 말고도 캐나다교회의 주선으로 토론토에서 남북교회여성만남에 이우정선생을 비롯해 몇몇의 대표와 참여한 적이 있는데, 북측의 개신교 여성대표와 가톨릭대표를 만났다. 이들 북측 교회 여성대표들과 만남은 615 모임에서도 이어졌다.

교회협 여성위원회 30년 사에 의하면 기독여성들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기독여성의 관점으로 신학와하는 데 주력했고, 대북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통해 남북관계의 틈새를 만들어 가는데 일조,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당기는 평화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나가면서

내가 기독여성운동에 뛰어든 지 어언 50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그래도 사회가 민주화되었고, 인권이 많이 향상된 것 같아 내가 기독여성운동에 참여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인 교회의 벽은 여전히 철옹성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여전히 교회의 민주화와 여성의 인권은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기독 남성들이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 민주화를 위해 나서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들이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헌신한 열정으로 교회의 민주화에 힘을 쏟았다면. 오늘의 교회가 어찌 이 모양이겠는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남성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교회민주화 운동에 참여해서 남녀 모두가 평등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 이 글은 코리안 아쉬람에서 발간한 2022년  제 7호 가을호 <산넘고 물 건너-생명, 평화,통일>에 게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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