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제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한국소금 2016. 4. 29. 15:40

제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성서본문: 룻기 22-13

한국염목사/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대표

 

지금 한국에는 두 종류의 이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국인이주민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이탈주민입니다. 외국인 이주민의 경우 2012년 말로 한국에는 약 150만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가 54%이고 결혼이주여성들이 14%, 유학생이 7%, 난민이 0.2% 정도입니다. 157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고 127개국의 사람들과 국제결혼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함께 살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다문화사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외국인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편견과 배타주의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은 잘 대해주고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우리와 조상이 같은 중국동포나 고려인들에게도 차별을 합니다.

한국사회를 다문화사회라고 하는데는 특히 국제결혼과 관계가 있습니다. 해마다 우리 국민 결혼 중 10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상황이고 2050년이 되면 5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해 국민의 20%가 다문화가족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통해 한국에 이주한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에서 매우 힘들게 살아갑니다. 한국 가족과 이웃의 이해와 배려로 잘 사는 결혼이주여성들도 있지만,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 한국에 온 상당수의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인의 편견과 무시 때문에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가 달라 한국살이가 힘든데 인종차별과 가부장적 가족문화로 인권침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2010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의하면 40%에 달하는 이주여성들이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인격무시 때문에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외국인 이주민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한국에 와 사는 또 다른 이주민들이 있습니다. 바로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어 온 북한이탈주민들입니다. 2012년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은 23천명이라고 합니다. 이들 중 70%16천 명가량이 여성들입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은 이탈해서 한국에 오기까지 굶주림과 체포의 위협, 열악한 환경 등의 역경을 겪습니다. 여기에 여성들은 성폭력과 인신매매의 이중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온 북한 이탈주민들 역시 남한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언제 우리가 오라고 했냐? 왜 와서 우리 사회를 뒤숭숭하게 만드느냐? 하고 모진 말과 더불어 무시당하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외국인이주민과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해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이주민이 존엄한 존재로서 존중받는 풍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차별받고 냉대받는 북한이탈주민들을 목숨을 걸고 경계를 넘어 우리 날개 아래로 피신해온 하나님의 가족으로 품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이주민과 북한 이탈주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이며, 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세기 1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뜻하고 있는 바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유엔인권선언 제1조의 기초가 된 사상입니다. 이 창조선언이 우리의 신명이 되어야 합니다. 타인이 나와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성적, 문화적으로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차별하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도둑질이나 강도질, 거짓말 하거나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것, 탐욕과 교만 같은 것만 죄라고 생각하고 이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26절에 근거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역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슬리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둘째 이주민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328절이 갖고 있는 중요성은 원래는 이 말씀이 초대교회 세례의식에서 행한 신앙고백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징표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갈라디아 328절의 말씀 즉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하는 신앙고백을 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교인이라면 초대교회의 전통처럼 이 말씀을 우리 신앙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당신 안에서 하나이듯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주민을 차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종이나 자유인이 당신 안에서 하나이듯 잘 사는 나라 사람이나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사람이나 다 차별 없이 대하겠습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당신 안에서 하나이듯 우리의 이웃으로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을, 북한이탈여성들을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겠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을 하고 그 신앙고백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주민을 돌보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의무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약자보호법이 있고 그 약자보호법 가운데 나그네 보호법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법과 십일조 법, 첫 열매를 드리는 법을 통해 이주민 보호를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 이삭 남기는 전통을 통해서 외국인 나그네의 생계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그 공동체에서 가장 힘이 없는 이주민, 과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이들의 보호와 하나님의 복은 서로 직결되어 있습니다. 약자 편에 서계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이들이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남겨놓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소외된 이주민을 보호할 것을 법으로 규정해 놓은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레위기 2535절에서는 가난한 동족을 돌보기를 나그네 돌보듯 하라는 말로 하나님이 이주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드러냅니다. 가난한 동족을 보호하듯이 이주민을 돌보아주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자기 동족을 이주민처럼 잘 대우하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은 이주민 보호에 관심합니다.

 

넷째, 이주민에에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주민에게 용기를 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룻기를 통해 그 모습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룻기는 우리 땅에 살고 있는 이주민, 특히 이주여성들을 어떻게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됩니다. 룻기 2장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생계를 위해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갑니다. 그 밭의 주인 보아스는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허락합니다. 이삭줍기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남자 일꾼들이 괴롭히지 않도록 조처도 취합니다. 물은 매우 귀한 것인데 물도 마시라고 합니다. 식사 때가 되자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보아스가 룻을 함께 음식을 먹도록 초청했다는 것은 더 이상 룻이 타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한 공동체에 속한 일원임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이런 보아스의 배려에 대해 룻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저는 한낱 이방여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이에 대해 보아스는 댁은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댁이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넉넉히 갚아주실 것이오.“

보아스의 말을 듣고 룻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습니다.(룻기 2:13)” 룻의 말처럼 이주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일은 이주민에게 힘을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도 바로 보아스가 했듯이 이주여성을 보살피고 배려하고 우리 이웃으로서 한 공동체 식구로 대하는 것입니다. 외국인이주여성들과 북한이탈이주여성들은 부모와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사이로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보아스의 말처럼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 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보호한다면 룻이 그랬듯이 당신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우리가 큰 용기와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하는 이주여성들의 고백이 울릴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한 나그네보호와 용기를 주는 행동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보아스의 친절에 용기를 얻은 룻은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을 해서 룻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급기야는 인류를 구원한 메시야 예수의 조상이 됩니다. 보아스가 이주민에게 베푼 친절이 구원의 역사를 가져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주민에게 베푼 친절이 이 나라에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는 기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라는 말로서 우리 역시 이주민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두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이주민입니다. 같은 이주민을 보살피고 한 가족으로 품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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