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새 시대를 여는 마리아

한국소금 2018. 2. 16. 15:33

새 시대를 여는 마리아

                                                                                                                                                                                                                                한국염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온다. 성탄절이 되면 웬만한 교회에서 연극이 공연되는데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예수 탄생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무대막이 열리면 중안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진다. 가운데 하양 못을 입은 여인이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가 천사가 오면 놀라 주저앉는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한다.

 

가브리엘: 은혜를 입은 자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그대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 말라. 마리아,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떠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위해하게 되고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마리아;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가브리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 너를 감싸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 저는 주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전개되는 성탄절 이야기에는 분명히 마리아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연극이 막을 내리면 마리아의 존재는 간데없고 아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물론 기독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렇게 연극에서처럼 간단히 처리되고 말 인물에 불과한 것인가?

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를 평생동정녀, 하나님의 모친, 원죄 없이 예수를 잉태했다는 무염시태(無染始胎), 죽은 후 하늘로 승천했다는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 등의 교의를 통해 교회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로 마리아를 공경하고, 예수와 인간의 중재자로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교의 들이 성서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배척당했다. 이후 개신교에서는 마리아를 순종의 모델로만 소개되어 왔다.

이렇게 마리아가 순종의 표본으로 이상화되는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마리아의 노래가 재음미 되었다. 누가복음 146절 이하의 마리아의 노래가 갖고 있는 혁명성이 높이 평가되면서 빈민들의 애창곡이 되었고, 독재자를 위협하는 노래로 부각되었다. 폴란드 농민은 마리아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멕시코 여인들은 마리아가 우리 편에 있으니 우리는 브르조아지를 분쇄하리라하고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며 혁명행진에 참가했다. 제삼세계 여인들에게 마리아의 노래는 해방의 노래로 이해되었고 선호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여는 새 시대의 상징을 이 노래에서 찾았다. 이런 혁명적인 마리아의 노래와 축을 같이 하여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나는 마리아를 여성신학적으로 재조명해보면서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마리아를 제대로 파악할 때 마리아가 낳은 예수의 실체를 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역사를 종결하는 새로운 탄생

신약성서 맨 처음에 보면 예수의 족보가 나온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을 거쳐 예수에 이르는 부계 가장의 족보가 나열되어 있다. 이때 다말, 라합, 밧세바라는 3명의 여성들이 언급되지만 이 족보는 다윗의 혈통을 중심으로 한 남자 가계를 잇는 족보다. 마태복은 11-16절까지 부계혈통 중심으로 예수의 족보가 등장하는데 대해 학자들은 이를 예수가 다윗왕조의 후손으로, 즉 이사야서에 예언된 그 메시야임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그럴 둣 하지만, 느닺없이 18절로부터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말해오던 족보는 갑자기 마리아라는 한 여인의 남편으로 요셉을 소개하고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입신하게 된 사건으로 전환된다. 다윗의 족보는 단절되어버린 채.

왜 마태는 예수 족보에서 다윗의 족보를 소개하다가 성령에 의한 임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바꾸었을까 하는 점과 마리아의 하는 응답의 참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성령에 의한 동정녀 잉태설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는 근거로, 마리아에게서 나심은 예수가 인간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굳이 마태는 왜 가부장 족보를 먼저 소개하고 있는가?

성령에 의한 동정녀 출산이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의 표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부계 혈통적 족보에서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으로의 전환은 단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메시아의 탄생이 남성중심 가부장제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남성중심적인 제도, 가치관, 문화는 새로운 시대에서는 버려야 할 심판의 대상임을 말해준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메시아의 탄생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다. 평화와 정의를 여는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아 탄생은 당연히 가부장제 역사와는 결별해야 한다. 이게 동정녀 탄생의 의미다. 예수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 탄생에는 인간 남자가 배제되어 있다.

 

마리아의 와 주체성

 

마태복음 118절에서 마리아는 마리아가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간단히 언급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할 것에 대해 천사가 예고를 하고 이에 마리아가 뜻대로 하소서.”라고 순명한다. 마리아가 보인 이 순명의 태도는 기독교 2천연사에 계속 신앙인이 보여야 할 믿음의 지표로 제시되어 왔다. 특별히 개신교에서 마리아의 , 저는 주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하소서.” 라는 대답은 복종의 태도, 종으로서의 겸손함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자들의 믿음 표본으로, 특히 여성들의 미덕으로 강조되었다. 이렇듯 마리아의 헌신적이고 순명적인 자세는 문학작품에서도 영원한 여인상으로 제시되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 괴테의 그레첼, 도스토에프스키의 소냐 등 자신을 버림으로써 남성을 구원하는 구원상으로 소개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재자로서의 마리아 숭배를 배격하면서 순종하는 신앙의 모델로만 마리아를 이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가 되기로 응답한 시대적 상황을 파악할 때만이 마리아의 응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며 점령지 백성으로서 비참하게 살았다. 어용왕인 헤롯은 로마의 앞잡이로 유다백성을 억눌렀으며 잘못된 개발정책으로 이스라엘 경제를 완전히 피폐케 하였다. 이러한 헤롯과 로마에 항거해서 곳곳에서 민중저항이 일어났다. 저항이 일어났던 곳은 로마의 잔인한 박해로 잿더미가 되었다. 일부 친 로마 정치세력과 어용종교가를 뺀 그와 백성들은 정치적 폭압과 빈곤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야 했다. 특별히 여인들의 희생이 가중되었다. 남자들이 혁명가로 죽거나 떠돌이가 된 뒤안길에서, 아니면 일자리를 찾아서 그 뒤에 남아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런 암울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다. 예언자를 통해 약속된 그 메시아, 자기 백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정의와 평화로운 통치를 하실 그 메시아를 기다렸다.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 박성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 마리아는 자신이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택함을 받았다는 예고에 접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마리아는 의연히 하고 대답한다. 이런 엄청난 예고를 들었으면 정혼자 요셉과 상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대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율적으로 민중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메시아, 자신이 염원하며 기다리는 그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기로 결단한다. 만일 마리아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민중의 대열에 서있지 않았더라도 하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마리아는 우연히 택함을 받은 게 아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고 부른 마그니피캇으로 알려진 노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 민중과 더불어 정의와 평화로 다스려지는 새 날을 꿈꾸었고, 그 새날을 가져다 줄 메시아를 고대했다. 그래서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목숨을 걸고 기꺼이 대답했다. 마리아의 는 주제적 결단이 있으며, 민족에 대한 대망이 있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다.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이것이 마리아의 에 대한 참된 의미다.

우리는 마리아의 에 앞서 누가가 등장시킨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마리아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메시아의 선구자로 올 세계요한의 탄생예고에 대해 제사장 사가랴는 아내가 늙었다는 생물학적 이유로 의심한다. 그 벌로 벙어리가 된다. 왜 하필이면 누가는 마리아의 앞에 사가랴의 불신앙 이야기를 다루었는가? 목숨을 건 마리아의 결단과 불신앙적 제사장! 예수탄생에 얽힌 이 두 대조적인 이야기는 전적으로 새 날을 기다리는 사람(계층)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믿음의 분깃점이 아닐까?

 

변혁을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는 엘리자벳의 격려를 받고 마그니피캇으로 알려진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사무엘상 21-10절 한나의 노래를 그 권형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못낳던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의 임신은 더할나위없는 축복이었고 찬미의 노래를 부를 만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입장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노래를 이어받아 메시아가 가져 올 해방의 새 날을 노래한다.

내 마음이 주를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독재자들은 마리아의 노래에는 혁명을 일으키는 균이 있다고 믿고 이 노래를 무서워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 노래에는 혁명의 물결이 있다. 한나의 노래가 강자와 약자의 질서를 역전시키고 있듯이 마리아는 현재 지배질서의 역전을 노래한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을 꺾으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신다. 주린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며 부요한 자를 내치신다.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신다. 마리아는 이 노래에서 자신을 고난 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동일시한다. 구체적으로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성, 정치적으로 눌려 지내는 힘없는 백성,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들의 해방을 노래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리아는 해방의 노래에서 여성의 해방을 우선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점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째 이유로 하나님이 종처럼 천대받고 있는 자신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들 인권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문제도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여성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한다. 종처럼 차별받는 여성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 일차적이어야 한다. 민중이 해방된다고 여성이 자연히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 여성의 구원이 우선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 다음으로 마리아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서 시달리는 백성의 해방을 선포한다. 백성을 억압하는 권력자를 내치고 없는 사람들이 기 펴고 살 수 있는 사회,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가 해결되고 부자가 더 이상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사회를 노래한다. 마리아는 이토록 가부장 문화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정치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해방을 노래한다.

마리아는 단순히 꿈만 꾸는 것이 나리라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 해방을 이루고 계심을 종말론적으로 노래한다. 마리아의 노래에 의하면 메시아의 탄생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심판이요, 가진 것 없어 오로지 야훼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이 되는 기쁜 소식이다. 마리아는 자기 뱃속에서 뛰어노는 아이의 움직임을 느끼며 그 아기 메시야는 분명히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중심의 사회,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자를 억압하는 사회를 종식시키는 그런 분이어야 함을 천명한다. 마리아는 해방의 담지자요, 예레미야 3122절에 나오는 새 날의 표징이다.

 

마리아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그저 자궁만 빌려준 생물학적 어머니가 아니라 그 자신이 해발의 반열에 선 새날의 담지자였다. 이런 마리아를 통해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이다. 한국교회는 마리아가 가진 주체적 결단성, 해방의 영성을 상기하면서 성탄의 의미를 재음미해봐야 할 것이다.

                                                                                                19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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