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일구는 여성
한국염
당신은 평화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정다운 언어로 평화운동을 말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평화로운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면 평화를 위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자신이 미소짓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미소짓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면 결코 평화운동에 기여할 수 없다." -틱낙한
오늘 우리의 주제는 평화와 생명을 일구는 여성에 대한 것이다. 이 주제는 이론적인 갓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다. 틱낙한의 말처럼 평화와 생명을 일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로워야 한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려면 먼저 마음의 밭인 우리의 몸을 부드럽게, 평화롭게 펴야 한다. 마치 씨앗을 심기 전에 굳은 흙덩이를 잘게 부수어 고르게 펴고 부드럽게 만드는 것처럼.
당신에게 달린 일
한 곡의 노래가 순간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고
한 송이 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다,
한 구루의 나무가 숲의 시작일 수 있고
한 마리의 새가 봄을 알릴 수 있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에 기운을 줄 수 있고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할 수 있다.
한 줄기 햇살이 방을 비출 수 있고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한 법의 웃음이 우울함을 날려버릴 수 있다.
한 걸음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다
한 단어가 모든 기도의 시작이다.
한 가지 희망이 당신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슴이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 수 있고
한사람의 인생이 세상의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린 일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폭력극복 10년 선포
1998년 12월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모인 WCC 제8차 총회는 다음 7년 간 주력할 프로그램을 결정하였다. 여기서 총회 대표들은 폭력극복 10년(Decade to Overcome Violence) 캠페인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는 “WCC는 모든 교회들과 함께 비폭력과 화해를 위해 일하고 비폭력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총회는 특히 새로운 세계화의 맥락에서 다른 국제기구들과 협력하고 갈등 전환과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적절한 접근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총회는 비폭력과 평화 문화 건설을 위해 일하는 세계 모든 사람들, 또 공동체들과 함께 연대할 것을 천명하였다.
폭력극복 10년 캠페인의 목적은 평화 건설을 교회의 주변 문제에서 중심 문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또한 평화 문화 건설을 위해 일하는 교회들간의 연대와 이해를 더욱 강화시켜야 하며 이를 위한 폭력극복 10년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 직접적인 폭력, 구조적인 폭력, 가정폭력, 공동체 안에서의 폭력, 국제사회에서의 폭력 등 모든 형태의 폭력을 언급한다. 폭력에 대한 세계 각 지역의 분석과 폭력극복을 위한 방법들을 배운다.
∙ 교회들에게 폭력 극복을 촉구한다. 폭력의 신학적 정당화를 폐지시키고 화해와 비폭력의 영성을 새롭게 확인한다.
∙ 지배와 경쟁이 아닌 협력에 기초한 공동체 내 공동안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한다.
∙ 공동체 내의 다른 종교와 협력하기 위해 그리고 다원사회에서 종교와 인종 문제를 남용하는 교회들에 도전하기 위해 다른 종교로부터 평화건설에 대한 영성을 배우고 자료들을 얻는다.
∙ 세계의 군사문화에 도전한다. 특히 소형 무기의 확산에 도전한다.
1.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폭력상
폭력에 신음하는 일상들
공중전화를 좀 짧게 쓰라고 말한 아주머니가
기분 나쁘다며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말세라고 신문마다 떠들었다.
외제 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소각로에서 태워 죽인 연쇄 살인 범 지존파 사건일어났을 때,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라고 놀랬다.
카드 빚 때문에 여성 5명을 납치하여 죽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 값이 너무 싸다고 난리였다.
학생 4명 중 1명이 왕따를 당하고
돈을 가져오라고 협박하고 부모에게 알리지 못하게
가위로 혀를 자른 사건이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왕따와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눈에 거슬린다고
급우를 성폭행하게 내어주고
친구를 유인해 직업소개소에다
500만원에 팔아넘기려다 구속된 여고생의 모습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지요.
일본군'위안부'할머니의 소리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지요.
열 일곱 꽃다운 나이/친구들과 나물 캐러 가는 길목에서/일본군에 잡혀
이름도 모르는 곳에 끌려가/일본군의 정액 받이 노릇한 나날들,
하루에도 몇십명 씩 일본군이 내 몸을 침범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을 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절규한 나날들,
아기를 지운다고,/일본군이 마취도 없이 배를 가르던 날,/제 몸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참히 살육당한 아기를 생각하며/내 친구는 몸부림을 쳤지요.
해방이 되었다고 하네요/정조를 잃은 우리를 누가 받아줄까요?
더럽혀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친구들이 절벽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지요.
그 절별 이름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지요.
모진 목숨 죽지 못해/ 만신창이 된 몸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끝내 창피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숨어살던 나날,/ 네, 정신대라고 불리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우리네는/그렇게 처절하게 수모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베트남 여성의 소리
그래요, 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우리 민족을 공산군에게서 해방시킨다고,
베트공을 뿌리 뽑아 자유를 수호해 준다며/
한국군과 미국군이 폭탄과 탱크로/고엽제를 뿌려가며 마을을 짓밟았지요.
마을의 처녀들을 강간하고/증거를 없앤다고 시체를 불태웠지요.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실상을 모른 채/ 정말로 수호천사인줄 알고
한국군을 사랑해 결혼하고 살림을 차렸습니다.
미국이 전쟁을 포기해서 전쟁이 끝나자/내 사랑하는 님은 귀국을 해버렸네요.
내 배 속의 아기를 어찌할꺼나?/아버지 없는 아기를 낳고 보니,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을 때/나는 아이에게 대답해줄 말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를 짓밟은 한국군의 자식이라는 이유로/온갖 천대를 받으며 살고 있는 내 자식,
전쟁의 후유증치고는 정말로 웃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엽제 후유증, 무기로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
폭음의 공포 속에 정신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강간당한 상처로 매춘녀가 된 여동생,
아버지 없는 아이들/ 우리 ‘라이 한’의 삶은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나요?
누가 우리의 가슴에서 가시를 뽑아줄까요?
분단으로 고통당하는 여성의 소리
네,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남들이 갈라놓은 땅덩어리에서
한 민족이 서로 총 뿌리를 겨눈 전장/사상의 자유 찾아 떠난 피난길에서
남편은 행방불명되고/아들 아이 하나/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습니다.
휴전이 됐다지만 조국은 분단되고/ 고향에 돌아갈 엄두도 못 낸 채/ 남은 딸 하나 먹여 살리느라/남의 밭 김매주기, 시장거리 좌판에서 콩나물 팔기로 등골이 휘어졌습니다.
후레자식 소리 듣기 싫어 자식 종아리 때리며,/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기지촌에서 양갈보되었다는/ 조카 딸년 만나 /부등켜안고 울면서도
두 입 풀칠하기도 어려워 거두지도 못했습니다.
이산가족 찾기 한다기에/혹시 잃은 남편 찾을 수 있을까/
텔레비전 앞에서 밤을 새우기 몇 날,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쏟았습니다.
어느날, 미군의 전쟁 연습터가 된 매향리에 살고 있는/ 38따라지 친구에게 걸려 온 전화,
미그기 폭격 소리에 경기하던 어린 손녀 귀가 먹고/
포탄 갖고 놀던 손녀 친구는 손이 잘려나갔답니다.
군사분계선에 숨겨진 지뢰를 밟아/ 군대 간 아들 친구 죽었다는 소식 듣던 날,
내 딸의 얼굴은 하얗게 빛을 바랬습니다.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한 부시/ 북한을 ‘악의 축’이라/ 공격대상에 넣었다는 소리 듣고
행여 한반도에서 전쟁 다시 일어날까/ 늙은이의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지나간 50년의 빛 바랜 삶 끔찍한데/ 또 전쟁이라니/도대체 이 전쟁 놀음은 언제 끝납니까?
아프카니스탄 여성의 소리
그래요,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무덤 속처럼 그렇게 암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버려진 아프카니스탄의 땅,
9․11테러의 보복이라며
미군들이 퍼붓는 포탄을 피해
파카스탄 국경으로 피난을 떠났지요.
먹지 못해 말라붙은 내 빈 젖을 빨다 지친
두 살 난 딸아이는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채
점점 쪼그라들었습니다.
남편과 11살된 아들아이는 전쟁터로 나가
소식 끊긴지 오래고,
난민에게 주는 구호품을 얻으러 갔던 15살 먹은 딸은
몸을 바치라는 배급원의 요구를 거절해서 식량도 못타고 돌아왔습니다.
어제 저녁, 마침내 내 두 살 짜리 딸이 죽어버렸습니다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제 구실 하기 어려운 터
오히려 잘되었는지도 모르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어딘지도 모르는 폐허의 한 모퉁이에
딸의 주검을 묻었습니다.
아니, 나는 딸을 땅에 묻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에 묻었습니다.
화제참사로 죽은 매춘여성을 애도하며
나 갈래, 나 들어갈래
내 딸이 타죽은 그 방에 나 들어갈래
출입금지! 노란 금줄잡고
소복입은 어머니는 그렇게 넋놓았다.
문짝만한 쪽방
지옥의 혀처럼 타오르는 불길 속
시커멓게 연기는 번지고,
사는 길은 철창대신 합판으로 막아놓은 2층 창문
몸으로라도 부수어 살아보려,,
좁은 계단 가까스레 기어오르니
이승과 저승을 가로막는 지옥의 문하나 버티고 있네.
밖에서 잠겨 열리지 않는 문,
아이고 어머니! 문고리잡고 계단에 쓰려져
가물거리는 정신에 마지막 부여잡은 엄마 얼굴
연기 속에 잃어버리고
엄마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꾸역꾸역 목구멍에 밀려드는 연기
토해낼 겨를 없어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네
발바닥 살점이 타들어가고 코가 문들어져도 모른 채
독가스에 질식되어 그렇게 숨이 졌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지!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행복하다는 다른 가족 조사들으며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내 딸 불쌍해서 어찌할 꺼나
억울하게 죽은 내 딸 어찌할 꺼나
군산개복동화재참사희생자 합동 여성장 영결식장
산다는게 힘들어, 가슴 한 구석이 텅비어 있어
이 좁은 공간 너무 답답해, 부모가 보고 싶어 자유가 그리워
공원에서 친구랑 아이스크림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싶어
아, 비둘기야 내게 날개가 있으면 좋으련만!
미쳐 타버리지 못한 일기장 속에 남긴 말들으며
울음소리조차 삼켜버린 영결식장에서
우리 모두 눈물만 떨구었다.
취업각서, 현금보관서, 빚보증서, 현대판 노예문서 족쇄된 채,
옷가게에 미장원에 동행하는
족보에도 없는 삼촌 무서워 도망도 못했거늘,
죽어서야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24살 어린 딸들,
내 동갑 딸 얼굴 겹쳐 올라 몸을 떨었네
좋은 세상 가소서, 극랑왕생하소서, 하나님 품에 안기소서
이 세상에서의 한일랑 너울너울 씻어버리소서
살풀이 베가르는 소리에 가슴에이네
14명 꽃다운 영정 보며 떠오르는 이사야 53장 말씀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딸들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매춘녀라 얼굴을 돌렸고
딸들이 더럽다고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들을 귀하게 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타락해서, 성을 밝혀서, 돈을 좋아해서 그러니
고난을 당해도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불에 타죽은 것은
여성의 몸을 노리개로 보는 가부장주의 허물 때문이고
그들이 상처를 받은 것은
생명을 잉태할 어머니 여성의 몸을
돈 버는 기계로 삼는 이 사회의 악함 때문이다.
그들이 희생을 당함으로, 우리 딸들이 보호를 받았고
그들이 불에 타 죽음으로 우리 누이가 자유를 누렸다.
하나님께서 이 가부장사회의 죄 값을
그들에게 대신 지우셨다.
군산에서 감금되어 불타 죽은 14명의 딸들은
우리의 죄를 짊어진 고난받는 종이다.
고난을 당한 후에 생명의 빛을 본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고난이 열매맺어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여성들이 인신매매의 올가미에서 구해질 것이다.
그들은 가부장사회가 받아야할 짐을 대신 짊어졌고,
여성들을 성매매의 사슬에서 구하고자 중재자가 되었다.“
남자만 호주라니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이룬 가정인데,
엄마 아빠, 딸 아들이 한 식구인데,
남자만 우리집의 호주가 될 수 있다네요.
결혼 안한 우리 선생님
팔십이 되어도 조카네집 호적에 올려있고
우리 할머니의 호주는 세 살 난 손자녀석이지요.,
어느날 친구가 눈이 부어 울면서 하는 말,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바람 펴 다른 여자에게서 난 아이가 나타나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자기 집 호주가 되었다네요.
자기가 낳은 딸이 버젓이 있는데, 그게 말이 되냐며
억울하다고 입술을 깨물더라고요.
호주도 될 수 없는 딸을 낳을 필요가 있느냐,
아들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 땅의 남아선호사상
씨중심 이데올로기 때문에
해마다 3만 여명의 여자아이가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태중에서 소리없이 살해를 당한다네요.
세계에서 한국에만 존재하는 호주제는
일제가 식민지를 쉽게 다스리려 만든 제도라는데
일본에서조차 폐지한 호주제를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라고 우기는 사람들
남자 핏줄만 핏줄인가요?
여자도 남자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데,.
평화를 일구는 여성들의 자세
여성은 단지 전쟁에서 무고한 피해자로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길은 없는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사기 4-5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쟁에 임하는 여성들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사기 4장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었는데, 예언자 드보라가 바락과 함께 적장인 야빈의 근대 장관 시스라를 물리치고 야빈을 굴복시킨 이야기다. 이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전쟁 이야기에는 3명의 여성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지도자로서의 드보라요, 둘째는 일상적 삶을 사는 평범한 주부 야엘이요, 셋째는 시스라의 어머니 이야기다.
첫째는 드보라다. 드보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보통 때는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오랜 세월 민족이 가나안 군대의 침입을 받자 돌연히 일어나서 지휘자가 되어 바락을 이끌고 군대를 통솔해서 승리로 이끈다. 이 전쟁에서 드보라는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명실상부한 지휘자로서 전쟁의 작전을 짜고, 장수를 지휘하는 역할을 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 때 주목할 것은 드보라가 자신을 민족의 어머니로 자처했다는 것이다. “민족의 어머니, 나 드보라가 일어서기 이 민족은 죽어있었다.(사사기 5:7)”. 드보라는 자신을 민족의 어머니로 칭하면서, 자신이 일어남으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여성이 단지 전쟁의 소극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됨을 알게 된다. 여성의 적극적인 역할을 말한다고 해서 전쟁을 찬양하는 논리는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은 ‘가나안의 침략으로 20년동안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억압을 당해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있었고, 그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이 들었다’는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민족이 억압을 당하고, 민족이 고난을 당할 때, 민족의 해방을 위해 나선 전쟁이기에 그 전쟁은 해방과 주권 회복, 생존을 위한 항전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드보라가 이끈 전쟁 후 40년 동안이나 전쟁이 없이 이스라엘이 평화를 누렸다고 한다.
두 번 째 여자는 야엘이다. 야엘 역시 주부였다. 야엘은 전장에서 살아남아 도망쳐 온 적장 시스라가 물을 달라고 하자, 물 대신에 엉킨 우유를 주어 잠들게 한 후 말뚝을 관자놀이에 박아 죽임으로 이스라엘을 완전 승리로 이끈 여성이다. 야엘은 남편이 가나안 왕 야빈 친구였기 때문에 전쟁의 괴로움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락을 구하지 않고, 고난받는 민족 편에 시스라를 죽이는 모험을 하였다. 만일 적장인 시스라가 살아남았다면, 이스라엘은 평화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드보라가 야엘의 역할을 예언했을 정도로 지혜가 뛰어나고 의식있는 여자였다. 드보라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 사실을 미루어 드보라와 야엘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드보라의 지위 하에 일어난 항전은 드보라와 야엘 두 여성 간의 연대로 승리를 한다. 지휘자로서의 여성과 일상의 삶의 자리에 있는 여성이 어떻게 전쟁을 극복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연결고리를 맺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런 연대가 있어야 평화가 가능해진다.
세 번째 여자는 시스라의 어머니다. 사사기 5장 28절 이하에 소개되는 이 여성은 시스라의 어머니로 나올 뿐 이름도 없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아들을 기다리며 넋두리한다.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두 처녀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곧,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사사기 5:30)”
이 시스라의 어머니는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하나도 없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전리품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전쟁으로 죽어 간 사람들이나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피해 등은 전혀 안중에 없다. 전쟁에서 약탈은 당연한 것이고, 승리자가 여자를 성노리개로 취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보상일 뿐, 극히 당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전쟁으로 인한 참사를 의례 그런 것으로 간주한다. 전시 하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약탈은 인권침해가 아니라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관행일 뿐이다. 전시 하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나 약탈을 범죄로 보지 못하고,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은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여성들만 있다면 평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화의 영성으로 보고 듣고 말하게 하소서
온 우주에 구원의 꽃을 피우고자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주신 주님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죽어가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죽음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외치던 바디메오의 기도처럼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손이 눈에 닿았는데도,
사람을 사람답게 보지 못하고, 죽어있는 나무로 본 소경처럼
생명을 물질로 보는 무딘 감수성이 아니라
생명을 하나님으로 볼 줄 아는 감수성을 높이기 원합니다.
마음의 유리창을 말끔히 닦아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생명들의 환희와
죽어 가는 생명들의 아픔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 잃었던 귀를 찾아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우성소리와
폐허가 된 땅들의 소리 없는 신음소리를 듣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봄 햇볕이 얼음을 녹이듯,
평화의 영성으로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입을 열어주소서.
사람들 입에 들어갈 식량으로 무기를,
생명이 싹틀 땅을 지뢰밭으로 만들면서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입으로 평화를 외치는
이 불의한 세상에 대해 “아니오” 외치게 하소서.
우리 삶이 죽음을 넘는, 생명의 영성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이 글은 2005년 기장여교역자회 총회에서 한 발제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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