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민중목회와 여성목회 사이에서

한국소금 2018. 3. 4. 17:57

 

일어나 마리아의 찬가를 노래하여라!

한국염

 

1. 내 삶의 전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9년에 신학교에 가보니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 여목사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력이 없어서 여성목사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건방지게도 내가 최초의 여목사가 되어야겠는 생각했었다. 제도에 막혀 여성이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왜 여자가 목사가 못되는지를 알아보았더니 세 가지 이유였다.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남자니 여저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되어있고 여자가 가르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 때문이란다. 다른 이유는 예수가 남자 제자만 선택했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예수의 제자가 남자뿐이기 때문이라면 예수의 제자는 유대인인데 그럼 왜 유대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한국남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안수를 안주려고 별 이유를 다 끌어다 댄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님이 아버지라서 여자가 목사가 못된다니,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화가 났다. 그나저나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는 들어왔는데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니 신학교에 계속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당시 여자로서 교수를 하시던 이우정 선생님을 보면서 기왕 들어온 학교,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되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학교에 남았다. 그런 어느날 기장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여목사 안수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 말에 솔깃해서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이때부터 전국연합회사무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1974, “세계여성의 해를 일년 앞 둔 해에 우리 교단에서 간신히 여목사제도가 통과되었는데 통과 이유 또한 가관이었다. 당시 우리 교단 헌법에는 목사 안수 조건으로 “30세 이상된 자라는 자격규정이 있었는데, 를 사람으로 바꾸게 되었다. 사람으로 바꾸다 보니 이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로 해석해서 통과가 되었다. 그때까지 여자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나보다.

 

내 눈으로 어머니 하나님을 발견하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 일생에서 잘한 것이 있다면 한신을 다닌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한신에서 내 일생의 두 나침반을 만나게 된다. 두 분의 삶의 모델을 만났는데 하나는 이우정선생님이요, 다른 한분은 문동환교수님이었다. 이우정선생님을 보면서 여성으로서의 지도자상을 꿈꾸었고, 문동환교수님으로부터 억압과 차별, 이에 대한 정의의 항거, 세상을 뱐혁시키야 할 과제 등을 배웠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삶을 그 두 분들을 보면서 체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우리학교의 분위기였다. 비록 교단은 가부장적으로 여성의 길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한신은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였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했지만 교수님과 학생들 사이에 권위주의로 인한 위계질서는 없었다. 진보적 신학사상을 배우는 가운데 남녀 차별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 없이 지내던 동료들이 교회에 나가서 목사가 되면 목에 깁스를 하고 뻣뻣한 권위주의적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알다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신학교에 남은 나는 하나님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북에서 탈출하여 임진강을 건너려할 때 배를 탔는데,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원이 내가 자다가 깨어 울면 어떻게 하느냐고 아버지에게 닦달을 하자 아버지는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살아있는 나를 임진강에 던지려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느냐고,당신들은 배타고 건너라, 나는 이 아이와 함께 다른 길을 알아보겠다. 하고 배에서 내였다. 우리 아버지는 그 배를 타고 갔고. 어머니는 초겨을 임진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나를 업고 그 찬물을 건넜다. 이남에 와서 어머니는 꿈에 왠 젊은이가 나타나 내가 예수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깨었는데, 그때 교회에서 치는 새벽 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나도 어머니를 따라 골수 예수쟁이가 되었다. 열신히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했다. 그랬는데 이 임진강 이야기를 안 이후부터 도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는 순간에 임진강에서 나를 버리려고 했던 얼굴도 모르는 그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은혜가 될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고, 아버지는 남자니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와 친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하나도 은혜가 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도 그 배안의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버리려고 했는데, 그 때 나는 아버지의 외동 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도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여성신학이 들어오기도 전인데, 나는 그냥 하나님, 하고 기도를 했고, 하나님과 친밀감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니 고역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 때 구약통독이라는 과목이 생겼다. 교수님은 그냥 통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명깊게 읽은 구절을 두 구절씩 밑줄을 쳐서 내게 했다. 그러니 성경을 꼬박꼬박 읽을 수밖에. 이렇게 읽어가는 중에 이사야서 46장을 읽게 되었다.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남은 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고 하겠느냐?”(3-5).

이 구절을 읽는데, 문득 내 앞에 나를 업고 임진강 찬물을 건너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고, 하나님의 모습이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 떠오르면서 내 안에 뜨거운 감동이 일었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모습의 발견,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나님 어머니의 모습을 찾고 나서 나는 그동안 의무로 읽던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비로소 누구의 주입이 아닌 내 눈으로 성서를 읽기 시작했고, 성서 곳곳에서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모습들이 읽혀지면서 은혜가 되었다. 여성의 눈으로 성서읽기와 신학하기가 내 목회의 중요한 현장이 되고 있다.

이런 내 개인사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눈으로, 여성인 여러분의 경험을 갖고 성서를 읽을 때, 성서는 여러분의 것이 되고 여러분에게 힘이 될 수 있음을 증언하게 위해서다.

변혁의 힘을 준 마리아의 노래

나는 교회여성운동가로서, 교회목회자로서, 그리고 이주여성운동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 내 여성목회의 길이다. 내가 이런 길을 걷게 된, 목회에 신학적 전거가 된 것은 바로 누가복은 146절 이하의 마리아의 찬가다.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삶에서 울려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회의 비전이다.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이 노래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마리아를 임신한 것을 알고 부른 노래로서 교회에서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함은..”하고 시작했다고 해서 마그니피캇이라고 부른다. 이 노래는 이제껏 나의 삶과 신학과 신앙을 지탱하는 큰 원천이 되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탄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마리아는 당시 여성에게 씌워졌던, 아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조라는 굴레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해방의 새날을 노래한다. 저주스러울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축복의 상황으로 변모시킨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을 꺾으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신다.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며 부요한 자를 내치신다.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는 분으로, 현재의 지배질서를 역전시키는 분으로 노래한다. 마리아는 이 노래에서 자신을 고난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여긴다. 구체적으로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성, 정치적으로 눌려 지내는 힘없는 백성,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해방을 노래한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해방의 노래 속에서 여성의 해방을 우선적으로 선포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째 이유로 하나님께서 종처럼 천대받고 있는 자신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들 인권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문제도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여성의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얘기 한다. 억압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 여성의 구원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받는 여서의 해방이 일차적으로 들려 져야 할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 마리아의 노래가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마리아가 소위 여성이기에 당하는 성의 불이익을 뛰어 넘어 해방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서 처녀로 임신했다든지, 정조관념 따위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의 가부장 질서 하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가치관을 깨뜨려버린다.

다음으로 나는 마리아의 노래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임산부인 엘리사벳이 같은 임산부인 마리아에게 해 주는 격려, 그 격려를 받고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는 자매정신의 좋은 본보기다.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격려를 해주는 일,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 주는 일, 이런 자매애와 연대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매애와 연대는 고난을 극복할 힘을 준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연대하듯 연대성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찌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여성해방을 위해 여성끼리의 연대는 특히 중요하다.

 

2.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시작한 여성 민중목회 현장

 

이 땅에서 눌린 자들의 표상인 민중과 여성의 인간성회복을 지향하는 민중목회, 여성목회야말로 바람직한 목회라는 생각으로 나는 민중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공동목회를 하고 있다.

우리는 소위 민중 목회자로서 막차를 탄 사람들이다. 목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리는 민중목회자가 되려면 삶의 여건도 그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로 이사왔다. 세놓았던 공장을 내보내고 그 공장을 베니다판으로 칸을 막아 한 칸은 낮에는 교회 사무실로 쓰고 밤에는 중학생인 아들의 잠자리로 사용했다. 다른 한쪽은 남편과 나, 딸의 침실 겸 살림집이었다. 우리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여교역자들이 우리 집에 들렸다가 많은 힘을 얻고 간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실상 나는 그곳에서 사는 게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은 판잣집에 사는 우리 처지를 가슴아파 했지만 교인들과 탁아방 자모들은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교인들과 주민들이 목회자인 우리와 자신들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걸 통해서 깨달은 것은 민중목회란 민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목회방향은 우리가 계획했다기보다는 우리 교회가 몸담고 있는 이 지역적 필요에 의해 정해졌다. 텍스트나 교리의 형성이 주변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듯이 우리의 목회도 우리 한국의 상황, 구체적으로 우리 교인들인 민중과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창신동의 상황과 관계가 있다. 그러면 창신동은 과연 어떤 곳인가? 창신동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구, 불량주택, 가내공장 등 세 가지가 많은 3() 지역이라고.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는 창신동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정신에 입각하여 지역주민을 위한 선교활동을 실시하였다. 창립 당시부터 우리 교회의 표어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표어에 맞추어 우리 교회가 벌인 선교활동의 대표적인 것이 초창기의 재건대(넝마주의)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배공동체였고, 그후 종로5가를 중심으로 노동야학을 운영했으며, 창신동에 와서는 저소득, 한부모 가정의 자녀를 위한 탁아방과 공부방 활동을 벌였다. 부모들이 일 나간 자리에 방치된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함은 물론 거리에서 방치되었다. 또 적은 수입으로 인해 어린 아기를 먼지 구덩이인 작업장에 함께 데리고 가서 일하는 부모들, 이런 삶 속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이곳에서 탁아방과 공부방을 시작했다. 초창기 청암탁아방은 만 20개월부터 4세까지 오전 8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전임교사와 자원 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돌보았다. 우리가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두 명의 탁아방 아이가 재래식 화장실에 빠져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돈이 없으니까 잡일은 교인들이 거들고 아는 기술자에게 부탁하여 무료로 일을 맡겼다.

그 다음 해 여름,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다. 그 어린이들 중의 많은 수가 한글을 제대로 못쓰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6학년 어린이도 있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 이 동네의 아이들은 저소득층의 부모가 맞벌이를 하러 공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와도 마땅히 공부할 곳도 없다. 아이들은 자연히 방치된 채 길에서 헤매기 마련이다. 또 이들은 잘못된 학교교육의 희생자들이다. 요즈음 학교에서는 일 학년에 들어가면 한글 기초를 가르치지 않는다. 극성스러운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글을 가르쳐 많은 어린이들이 한글을 익혀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글을 안다는 전제로 공부를 가르치기 때문에 고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우리는 이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학교를 시작했다. 대학생 자원 봉사자를 모집하여 어린이들에게 숙제와 한글, 산수 등 기본적인 공부를 가르쳤다.

청암공부방은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치 못하는 아이들, 오락실이나 어른들의 퇴폐문화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오후 2시부터 7시까지(초등학생), 7시부터 9시까지(중학생)을 돌보았다. IMF 이후에는 공부방에서 결식아동을 위한 식사를 제공했는데, 지금은 청암공부방이 지역아동센터로 정부의 인가를 받아 운영되고 있다.

 

민중의 개념에서 이주민 선교를 시작하다.

1995년 한국교회에서 선포한 희년의 해에 우리는 교회당을 새로 마련했다. 힘겹게 이층 짜리 개인 주택을 한 채 사서 이사를 했다. 일단 우리 교회 건물이 생긴 것이다. 한 층에 20평짜리 건물로서 1층은 평일에는 공부방을 하고 주일에는 외국인노동자 한국어교실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외국인노동자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주차장이었던 곳을 개조해 예배처소를 만들었다.

우리가 외국인노동자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96년 성남의 한 양말공장에서 공장주의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국 한족 8명이 공장을 도망쳐 우리 교회로 오게 된 것이 동기가 되었다. 이들과 한 달가량 지나면서 우리는 평소에 하던 질문인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 받는 민중이 누구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바로 외국인노동자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워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외국인노동자선교를 하면서 내 눈에 이게 아닌데!’하는 의문이 생겼다. 서울센터에 외국인노동자들이 드나드는데, 남자도 드나들고 여자도 있었다. 그런데 여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이 점은 서울센터 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주노동자 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단체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대개의 센터들이 쉼터를 하는데 여성들을 위한 쉼터는 없었다. 정말로 쉼터가 필요한 사람들은 여성들인데도 말이다. 남편과 의논하고 성인지적 관점에서 외국인여성문제를 다루는 이주여성센터를 따로 만들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의 집이었고, 이것은 후에 이주여성인권센터로 확장되었다. 이주여성을 위한 선교활동을 본격화한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땅의 민중이 외국인노동자라면, 그 외국인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민중이 이주여성이라는 인지 때문이었다. 이 이주여성 선교는 민중으로서의 이주여성, 여성으로서의 민중성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오늘날 한국에는 약 1백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이주여성은 약 30만 명가량 된다. 이 이주여성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과 계급차별, 성차별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들을 섬기는 것이 민중목회와 여성목회 현장으로서의 나의 중요한 목회현장이 되고 있는데, 이주여성 목회를 하면서 나는 이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본회퍼의 말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청암교회 현장에서는 철처하게 여성목회자로서 여성목회의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 그것을 나는 페미니스트 목회라고 부른다.

 

. 페미니스트목회 현장

 

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공동목회를 시작하고

 

처음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회법상으로 나의 남편이었다. 당회가 없는 교회는 미조직교회라 해서 한 명밖에 안수를 받을 수 없었다. 나는 10년 전에 이미 목사고시에 합격하여 준목이 되어 있었는데 남편이 먼저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교회가 목회자로 초청한 사람은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공동목회를 한다는 정신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사실 남편과 나의 공동목회는 부부가 하나는 목회자로, 하나는 사모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목회선상에서 파트너쉽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하나의 실험대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동역자로서 목회 전반에 걸쳐 공동으로 해 나갔다. 교회의 운영은 물론 설교와 목회상담 등의 일을 나누어 하였다. 그 결과 우리 교인들 역시 나와 남편의 역할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왔다. 1996년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를 설립하며서 남편이 소장 일을 맡고 내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었다. 준목이 된지 16년만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것이다. 내가 남자였다면 벌써 오래 전에 목사가 되었을 텐데, 결혼을 하고 민중교회에서 일하다 보니 목사가 될 수 없었고 겨우 남편이 일할 목회지를 찾은 후에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목회선상에서 동등한 동역자로 일함과 동시에 우리는 삶에서 진실한 동반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삶을 보고 감동을 받아야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하는 인권운동가나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경우 남녀평등의식은 갖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인식은 남녀평등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목회와 운동을 무기로 부인의 희생을 간과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가사와 육아 등 모든 면에서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평등한 부부로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평등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 부부의 이런 모습은 새로 결혼한 부부들에게는 한 이정표가 되고 교인들에게는 자극제가 되는 듯하다.

 

2. 평등과 나눔의 예배

우리는 교회에서 성차별적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설교 시에는 가부장적 본문을 사용하지 않음은 물론 예배문에서 성차별이든 인종차별이든 간에 모든 차별적인 용어를 평등적인 용어로 수정하여 사용한다. 남편도 성차별적 언어를 안쓰려고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 그러나 몸에 배인 가부장적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설교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러 놓고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면 한 목사한테 혼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도 되시고 어머니도 되시는 분이지요하고 해명하는 일도 있다. 우리 교회 설교시에 자주 인용되는 용어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두가지 면에서 강조하는데 하나는 민중인 우리 교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강조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교인들은 보수적인 신앙의 뿌리가 없이 우리 교회에서 하는 야학을 통해 교인이 된 사람들이라 기성교회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목회 방침에 별로 이의가 없다. 우리 교인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 특히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교인들에게 예배 순서를 분담시켰다. 일반 교회에서는 예배순서를 대부분 교역자와 장로들이 독점을 한다. 대부분의 민중교회가 그렇듯이 우리 교회 역시 목회자가 예배를 독식하지 않고 평신도가 골고루 참여한다. 비록 세련되지 못하고 가끔 실수도 많지만 예배의 사회, 기도, 성경봉독 등을 평신도가 함으로 평신도들의 예배참여도를 높이고 지도력을 키우려 하였다. 예배순서를 분담시키는 것은 교인들의 지도력을 키우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나 여성교회처럼 설교 후에 교인들과 그 설교에 대한 응답을 나누는 일까지는 못하고 있다. 이걸 몇 번 시도하였는데 교인들이 너무 부담을 느껴서 설교시간에 질문을 하고 의견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시도해 보려고 한다.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듣기만 하는, 설교를 교인들과 나누지 못하는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밖에 우리 교회의 예배가 기성교회의 예배와 다를 것은 예배순서가 획일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찬송가 외에 일반교회에서 애창되는 복음성가보다는 의식을 깨우고 공동체성을 키우는 노래들이 불려진다. 또한 성서는 새번역 성서를 읽는다. 이는 새번역성서가 비교적 성포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역이나 공동번역에서 형제들아하고 번역된 부분을 표준새번역은 형제 자매 여러분하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례전에서는 성례전 보다는 애찬식을 주로 한다. 교회법에는 세례교인만 성례전에 참여토록 되어 있어 우리는 모든 교인을 소외시키지 않게 위해 애찬식을 진행, 아기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 교인이 참여하게 한다. .

 

우리 교회의 예배는 예배 후 공동식사를 함께 하는 것까지를 예배로 포괄하고 있다. 이 애찬 준비는 남자와 여자가 한 팀이 되어 준비를 한다. 목사네 가정도 예외가 아니어서 순서에 따라 당번을 해야 하는데 내가 음식준비를 하면 남편이 설거지를 한다. 한 보수교회에 다니던 교인이 우리 교회에 와 보고는 목사가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하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한 일이 있다. 남자가 그것도 감히 목사에게 설거지를 시킨다는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목사가 설거지를 하니까 아무리 가부장적인 남자라도 설거지를 안할 수 없다.

이렇게 교회에서 공동식사 준비를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하다보니 밥 짓는 일은 여성만의 일이라는 편견이 없어지고 이일을 통해서 교인들은 가정생활에서도 가사가 여성의 일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서로 가사 일을 나누어서 하는 데로 발전했다. 그리고 목회자인 우리 자신도 교인과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자칫 빠지기 쉬운 목사로서의 권위의식을 털어버리는 연습을 한다.

한편 우리는 교회의 문제는 전교인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일반교회는 제직회나 세례 교인들로만 구성된 공동 의회를 통해 교회 일을 결정하지만 우리는 전교인회의를 연다.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고 다수결보다는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까지 회의를 한다. 이 전교인회의를 통해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기회가 주어지고 이를 통해 회의하는 연습도 하게 됨으로 직장이나 다른 모임에 가서도 자기 의견을 제시할 줄 알게 된다. 결국 전교인회의는 교회의 민주화와 아울러 교인의 지도력을 키우는 중요한 장이 되고 있다.

 

한편 여남공동체를 지향하는 목회를 위해 나는 남자와 여자의 평등성에 관심하고 특별히 파트너쉽 형성에 관심했다. 파트너쉽 형성을 위해 두 분야에서 노력하였다. 첫째는 내가 남편과 목회선상에서 파트너쉽을 이룬다는 것이요, 둘째는 목회자와 교인간에 파트너쉽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사실 남편과 나의 공동목회는 목회선상에서 어떻게 파트너쉽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대이기도 했다. 내가 목회선상 뿐 아니라 나의 가정의 삶에서도 파트너쉽이 일어나도록 애썼는데 이는 파트너쉽이 목회선상에서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위선이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목회자와 교인간에 파트너쉽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예배순서를 교인들과 분담했다. 예배순서를 분담한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권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 양성의 문제다. 한국교회에서 예배는 권위의 상징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신성한 예식이기 때문에 아무나 맡을 수 없고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성직자와 장로가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권위주의는 예배를 정점으로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특정인에게 독점되어 있는 예배를 일반 평신도와 나눈다는 것은 권위를 나눈다는 것이요, 목회자와 평신도간의 파트너쉽을 이루는 한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예배순서를 나누고 예배의 내용이나 의식에 성차별적 용어나 상차별적 본문을 다루지 않거나 또는 차별적인 본문을 재해석해서 설교하는 것은 교회가 명실공히 평등한 교회공동체가 되는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가부장성은 설교를 포함한 예배의식을 통해 강화되기 때문이다.

한편 남자와 여자, 목회자와 교인이 함께 하는 공동식사 준비는 목사와 평신도간의 권위주의를 깨뜨리는 일을 할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파트너쉽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성역할 분담은 고질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많은 교회에서 여성들이 여전히 교회의 주부 노릇에서 못 벗어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여성들이 결의기구에 참여하고 마가복음 14장에서 처럼 여성들이 한 일을, 여성들이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한 노력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인정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여성의 영성으로 신학을 하고 자율적인 존재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에서 여성의 자율적 영성이 메말라지고, 여성이 2차적인 존재로 차별받는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왜 여성에게 더 이상 복음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리아처럼 나는 천하게 여김을 받는 여성들이 여성들을 돌아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목숨을 걸고 결단해서 일어나는 여성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회 여성들이 일어나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면서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받고 차별없이 사는 세상을 위해 나서야 한다. 나는 지금 우리 교단의 양성평등위원장으로 있다. 교단의 여성들과 함께 교단총회에 헌의하여 한국교회 최초로 양성평등위원회를 제도화하였다. 우리 교단, 나아가서 한국교회가 성평등한 교회가 되는 전초지로서의 비전을 갖고 만든 것이다. 이 위원회에서는 우선 교회 결의기구에 여성참여를 위해 그야말로 투쟁을 하고 있다. 지금의 교회에서 그나마 여성이 숨을 틀 수 가 있는 것은 선배여성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바라는 나의 꿈

 

이 순간 우리 교단과 교회의 가부장적 문화와 구조 하에서

성차별로 인해 교회 여성들이 겪는 고난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그래서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라는 성서의 증언,

창조신앙에 근거한 꿈입니다.

나는 어느 날 우리 교단에서 같은 수의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총대로서 총회 회의장에 마주 앉게 될 날이 오리라는,

개교회 여장로와 남장로가 같은 수로 당회를 구성하며,

남자 목회자와 여성목회자가 공동으로 목회를 하며

여성과 남성이 번갈아가며 총회장과 총무를 하고

교단신학교에 같은 수의 남자교수와 여자교수가 교수회의를 하는 그런 날,

기장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한 마음으로 한 식탁에 들러 앉아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불평등과 차별, 억압과 불의로 기승하던 교회가

평등과 정의와 평화의 지성소로 변하리라는 꿈을,

여성과 청년들이 그들의 성이나 나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들의 인격과 능력에 따라 평가받을 수 있는,

어느 한 성이 결정하고, 다른 성은 결정한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평등하게 함께 결정하고 함께 섬기는

그런 교회로 바뀌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아지고, 험한 길은 평탄해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는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득권 가진 사람은 기득권을 내어놓고,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겸손해져 섬기는 자리로 내려오고,

낮은 자리에 처해있든 사람들은 들어 올려져, 높은 자와 낮은 자 없이

교단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파트너가 되어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일하며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는 그런 꿈입니다.

.

나의 희망과 믿음은 이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나 차별 없이 하나입니다.” 고백하던 것처럼

오늘 우리 교회의 세례식에서도 다시 고백되어져

차별은 폭력이고 죄라는 인식이 강물같이 교회 안에서 흘러

교회 안에서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이 없어질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처럼

이 믿음으로 우리는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바윗돌을 깎아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우리 기장의 불협화음을

평등과 조화의 아름다운 합창곡으로 바꿀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어느 날 우리 교단이 양성 평등한 교단이 되리라는 것을 바라보며

다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교단 모든 노회로부터 평등과 자유의 종이 울려 퍼지고,

교단 총회 정책을 결정하는 거대한 자리로 부터 양성평등의 종이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교단 신학의 산맥으로부터 양성평등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고,

교단의 목회지에서 여성목회자의 영성과 지도력이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교단의 모든 교회와 기관으로부터 성차별적 관행이 철폐되는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 교회에 평등과 평화를 노래하는 메아리가 울려 퍼지게 하십시오.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이 우리를 격려하시기에 죄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마침내 하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그날을 희망하며 나아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