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새 번역 주기도문 사용, 왜 문제인가?

한국소금 2018. 3. 4. 18:01

새 번역 주기도문 사용, 왜 문제인가?

 

주기도문을 새로 번역하자는 요청을 교회협의회가 받았을 때, 교회협 신학위원회는 현대의 신앙인들을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오늘의 언어로 주기도문-사도신경을 재번역하는 일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하고 재번역시, 현재 세계교회 및 교회일치운동의 차원에서 신조가 갖는 의미, 교회별로 다양하게 신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성, 양성평등의 언어사용, 환경문제 등 현대인들이 관심하는 여러 신학적, 신앙적 과제들이 함께 논의되면서 한국교회교인들에게 재번역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200412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기도문-사도신경 특별위원회가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 합의안이라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러나 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를 비롯한 기독여성단체에서는 이 <주기도문 새번역안>에 대해 시대착오적이며 양성평등시대에 역행하는 개악이라고 판단하고 이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이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에서 여성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용어상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과정상의 문제였다. 그 결과 교회협의회에서는 주기도문 특별위원회에서 여성들의 의견을 받아 다시 재논의하도록 실행위원회에서 결의하였으나 특별위원회는 이 작업을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협의회에서는 새번역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문제는 각 교단이 알아서 결정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교회협의회 회원교단에서는 예수교장로회(통합측)만이 새번역 주기도문을 채택하였을 뿐, 당시 우리 교단을 비롯한 다른 교회협의회 회원교단에서는 기존의 주기도문을 계속 사용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우리 교단 교회에서도 새번역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다시금 새 번역이 왜 문제가 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새번역 주기도문의 용어상 문제에 대하여

 

주기도문 새 번역()’의 문제

그런데 한기총 교회협 특위의 주기도문 새 번역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여성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어 원문의 당신의를 모두 아버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6: 9-15)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단 한번 하늘에 계신 아버지’(6: 9)가 호격으로 사용되었고, 그 외에는 모두 2인칭 대명사와 소유대명사를 사용하여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 ‘당신의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주기도 새 번역안에서는 이것들을 모두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한기총 교회협 연구특위는 이러한 번역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하면서, 이것은 결코 성차별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언어가 남성성에 고정되어 사용될 때 일어난 언어의 성차별적 억압의 실상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여성억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버지칭호 문제

언어는 인간의 자기 이해와 세계관을 형성해 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남성 위주의 성차별적 언어와 표상들은 여성을 비웃고 평가절하하며, 남성 의존적 존재로 만들면서 여성을 은폐시키거나 소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페미니스트적 성서해석은 성서 안에 들어있는 가부장적이며 성차별적인 문화유산과 표상들, 남성 중심의 성서 번역의 문제를 크게 문제 삼는다. 특히 메리 데일리는 성서 전통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표상을 문제 삼는다. 그녀는 하늘에 계신 대 () 가부장으로서의 하나님 상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 군림해 왔고, 사람들의 노리에 정착되었으며, 가부장제에 의해 계속 합리화된 아버지하나님의 이 표상은 차츰 이 사회의 형태를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올바르면서도 적합한 것으로 느껴지도록 구조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그의’( his ) 하늘에서 그의’( his) 백성을 다스리는 아버지로 믿음으로써, 이 사회가 남성 위주인 것이 순리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며, 우주의 질서에도 부합되는 것으로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메리 데일리는 만일 하나님이 남성이라면 남성이 곧 하나님이라는 등식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하고 말하면서, 가부장으로서의 하나님 상이 인간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여성을 거세하는 것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메리 데일리의 이러한 우려는 이번에 한기총 교회협 특위가 새롭게 번역한 사도신경의 첫 부분에서 그대로 자행되었다. 기존의 사도신경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되어 있던 순서는 라틴어 원문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한기총 교회협 특위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 순서를 바꾸어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며...’로 바꾸어 놓았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곧 하나님이 된 것이다. 사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가부장적 이미지는 성차별적인 문제만을 야기 시킨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사의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의 권력자들이 에 대한 잔혹행위와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데에도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아버지표상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여성신학자들 중에는 성서 전통 이전의 근동에서는 신이 아버지나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묘사되었음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여성성을 부각시키려는 사람도 있다. 다른 한편 여성신학자들 중에는 성서 전통 안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며 자비를 행하는 자애로운 어머니, 새끼를 날개아래 품어 보호하는 암탉으로 묘사된 본문들 속에서 여성적 모습의 하나님 상을 찾기도 한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의 여성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성서가 말하는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단순히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인격으로만 묘사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한다. 로즈마리 류우터는 하나님을 단순히 우리들의 아버지나 부모의 표상으로만 사용하는 경우, 자립적이지 못하고 언제나 의존적이며 미숙한 아이로서의 태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우려한다. 메리 데일리는 근본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넘어서는 길을 모색하며 하나님을 명사가 아닌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힘으로서의 동사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에 들어있는 아버지표상과, 주기도문의 아버지칭호도 모두 완전히 폐기해 버려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아니,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성서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아버지표상이 전체 본문의 맥락에서 편집사적으로 연결되어 신학적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신학자들이 밝힌 것처럼 성서는 분명히 가부장적 시대의 산물이며 남성 저자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성서 안에는 2000년 전의 팔레스틴의 가부장적 문화유산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안에서 여성에게떡이 되는 자료만을 발췌하거나 여성에게 걸림이 되는 것들을 무조건 삭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자유주의 신학이 목욕물을 버리면서 목욕탕의 아이까지 버리는 오류를 저지른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들어있는 아버지표상들과 주기도문의 아버지칭호의 경우에 역사비판학적 성서 연구 방법과 사회사적 연구를 통해 본문에 들어있는 그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칭호가 오늘의 현실에서 일방적으로 가부장적 아버지 상으로 이해되어 여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용된다면,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조심스럽게 탈 가부장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여성번역팀은 역사비판학적 연구를 선행하여 주기도문의 아버지가 결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님을 밝히고, 또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양성평등적인 언어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나님을 당신으로 호칭하는 문제

주기도문의 그리스어 원문의 당신’( σου )아버지로 바꾼 것에 대해서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한기총 교회협 특위는 몇 분의 국어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기도에서는 하나님께 당신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었다. 우리말 어법에서 당신2인칭의 존댓말이기는 하지만 그 높임의 정도는 아주 낮으며, ‘하오체 정도에서 쓰이는 말이며, 이 하오체는 부부지간이나 친구지간, 또는 손아래 사람이지만 격식을 치러야 할 때 쓰는 말투거나, 두 사람 간에 시비가 붙었을 때도 사용하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지존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에게 하오체에 해당하는 2인칭 대명사 당신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에서 사용된 당신칭호는 우리말 번역에서는 전혀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절대로 하나님을 당신으로 불러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사실 기독교 시인들은 그들의 시에서 하나님을 당신으로 호칭하고 있으며, 구약의 시편의 경우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당신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들에서 현대적 언어 감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이미 자연스럽게 기도 때에 하나님을 당신으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래의 젊은이들을 위한 현대적 언어로 주기도문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 남성 신학자인 정훈택은 주기도문에 대한 자신의 번역 안에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칭호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다.

한편 국어학자들은 우리말 어법에서 당신이라는 말이 재귀대명사 또는 3인칭 대명사로 쓰이는 경우는 2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와는 달리, 극존칭을 뜻한다. 최태영도 이 점을 말하며, 이 경우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호칭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상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른 다음에 사용된 당신의 이름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은 재귀 대명사나 3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볼 때,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주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3인칭을 재귀하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에 들어있는 당신의를 우리말 문법을 운운하면서 무조건 생략해 버리거나 아버지로 바꾸어 놓는 경우, 이것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말하고 있는 신학적 의도를 전적으로 놓치게 된다. 마태에서 예수는 주기도문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서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위선적인 유대인의 기도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구하기 전에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6:7-9). 바로 이 점에서 예수는 산상설교의 청중들에 나의 이름’, ‘나의 나라’, ‘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하며, 하나님이신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을 구하라고 요구한다.

예수께서 수난의 길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마지막 기도도 바로 이렇게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해 달라는 간구였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한다.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ouvc w`j evgw. qe,lw avllV w`j su, )(26: 39, 42). 그런데 우리말 번역들은 모두 이 구절에서도 그리스어 원문에 없는 아버지칭호를 삽입하여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말 번역의 경우 주기도문과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의 기도에 들어있는 아버지칭호는 앞으로 모두 원문에 있는 것처럼 당신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마태가 강조한 신학적 의도가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주기도문을 새로 번역할 경우 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제안한 원칙 현재 세계교회 및 교회일치운동의 차원에서 신조가 갖는 의미, 교회별로 다양하게 신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성, 양성평등의 언어사용, 환경문제 등 현대인들이 관심하는 여러 신학적, 신앙적 과제들이 함께 논의되면서 한국교회교인들에게 재번역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제시되어야 한다.“에 따라 번역되어야 하며, 이 원칙을 벗어난 주기도문 번역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 글은 2006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회보 9월호에 게재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