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신학

여성의 시각에서 본 죄, 성차별주의

한국소금 2018. 2. 16. 15:17


 

할머니 한 분이 며느리의 인도로 교회에 다니다 드디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며느리는 친절하게 시어머니에게 세례문답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답하도록 가르쳤다. “저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이 주구 죄를 위해 돌아가셨느냐고 하면 내 죄 때문이라고 대답하세요.”

목사님이 물었다. “할머니,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요?” 할머니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하였다. “”누구 때문이긴? 다 우리 며느리 죄 때문이지요.“

이쯤 되면 하나님도 웃으실 법한데 정말 이것이 웃고 말 소리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여, 우리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정말로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죄인이라고 할 때 그 죄는 어떤 것인가?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 라는 문제는 신학의 핵심주제였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논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파악할 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의 문제가 놓여져 있었다. 죄늬 본질이 무엇인지, 죄인으로서 인간의 모습이 어던한 것인지가 전제되었다. 기독교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에덴동산에서 잘 살게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학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였다.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으며,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런 교리에 따라 일반적으로 죄는 크게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순종이라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입장을 망각하고 자만하여 불순종의 죄를 법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덕문은 교만 대신 겸손하고 불순종 대신 순종하는 것으로 가르쳐왔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니요라는 외침이 들려오고 있다. 이렇게 죄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여성의 경험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자만이나 교만이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상 남성에게 억눌려 계속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하고 포기만 하고 살아온 여성에게 자만이 죄로 성립되는가? 오히려 하나님 형상대로의 자기완성을 위해 살지 못하는 게 죄가 아니가? 하는 질문이다.

또 한편에서는 성차별주의 그 자체를 원조의 산물로 보는 입장이 있다. 19878월 독일 카셀 지방에서 여성해방신학 여름대학이 열렸다. 이 대학의 주제는 여성신학 입장에서 본 죄책과 힘이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죄에 대한 고찰을 하면서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성차별주의 그 자체를 원죄로 본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가부장주의, 군사주의, 남북착취구조, 계급차별 등 모든 차별주의를 사회구조악으로 보면서 이를 죄의 본질적인 문제로 다루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나 불순종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만 씌어 오던 원죄의 개념이 성차별주의라는 구체적인 정의로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이 성차별의 구조적 죄에서 여성은 희생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라는 강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무엇이 이런 폭탄 같은 선언을 하게 했는가? 무엇이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의 경험에서 죄의 문제를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는가? 그것은 기독교 3천년의 역사가 여성을 죄의 기원으로 보면서 여성에게 타락의 책임을 전가하였고, 여성을 부정하고 열등한 전재로 규정하여 차별하고 억압해왔으며, 이런 가부장적 기독교 죄성의 본질을 뒤늦게나마 여성들이 파악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한 기독교

 

여성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한 기독교는 과연 여성과 죄를 어떻게 연관시켜왔으며 억압해왔는가? 창세기 126절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으로서의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등한 입장에 서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창조되었다는 창세가 2장의 창조이야기를 근거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가설이 세워진다. 이 창조 이야기 위에 창세기 3장의 타락이야기가 덧붙여져 여성을 억악하는 근거로 이용되어 왔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어 아담도 먹었는데 그로 인해 죄가 이 땅에 들어왔으며 인간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형벌이라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더하고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요, 남자는 노동하는 소고를 해야 하는 것이며 인간 모두 불멸의 존재에서 죽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타락 이야기를 근거로 기독교역사는 여성이 죄악을 이 땅에 가져온 장본인이라 하여 여성의 예속을 정당화시켜왔다.

여성을 악의 기원으로 삼은 이 이론은 히브리 사상이나 복음서에서는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발전시민 사람은 바로 바울이다. 바울은 옛 아담과 새 아담으로서 그리스도의 관계를 말하면서 로마서 512절에서 아담의 조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의 이름을 빌린 디모데후서 214절에서 여자는 순종하면서 배우십시오.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히 해야 합니다.”라고 여서자의 순종을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의 이 문구는 화와는 유혹자로, 아담이 무죄임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해석되어 왔다.

이 디모데후서 사상을 이어받은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지옥의 문입니다. 여러분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여러분은 사탄도 두려워 공격하지 못한 아담을 설득시킨 여자들입니다...여러분의 거역으로 말미암아 받을 것은 죽음뿐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어야 했습니다.(August Bebel, Die Frau und der Socialismus, p.85)

타락이야기의 이러한 해석으로 기독교역사는 이 세상의 악을 여성의 책임으로 전가시켰으며 그 벌로 여성의 예속과 억압을 강화시켰다. 자율성을 주장하는 여성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타락이야기를 확대 해석하여 여성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자제력이 부족하여 사찬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논리 하에 일백만 명의 여자들이 마녀로 처형당해 죽었다.

역사상에서 여성의 예속은 열등한 여성이 받는 당연한 죄 값이었다. 메리 비즈너의 루터와 여성이란 책에 의하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루터는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은 형벌로서 해산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원죄 때문에 여성에게 지워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성은 타락 후 본래의 평등성을 상실하였다. 타락된 역사 속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은 신성한 심판의 표시로 이에 불평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트집 잡고 거약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지려고 하는 것은 반역, 즉 하나님의 속죄 명령을 거스리는 죄악으로 규정하였다. 착한 아내, 순종하는 아내로 사는 것이 여자가 속죄 받는 길이었다. 착하고 순종하는 겸손한 여인상이 여성에게 부과된 덕목이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본 죄-성차별주의

 

이제까지 우리는 창세기 3장의 타락이야기를 근거로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교리는 과연 옳은 것인가? 전통 신학자들이 주장해 왔듯이 타락이야기가 사실이고 또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당하고 억압당하는 것이 타락으로 인한 벌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이들에게 있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타락의 질서를 창조질서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여성은 아직도 타락의 질서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바울까지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해서 세워진 기독교에 성차별이 있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것은 반 기독교적이 아닌가?” 성차별이란 죄의 산물이다. 특별히 책임회피의 결과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본문 주석을 통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그 자리에 아담이 함께 있었음을 제시한다. 하와가 아담을 유혹했다는 말도 없다. 옆에서 뱀과 하와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아담은 선악과를 받아먹었다. 그래도 아담이 무죄한가? 하나님이 숨어있는 아담을 찾으시고 왜 명령을 어겼느냐고 묻자 아담은 말한다. “ 당신이 만들어 내게 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셨을 때 아담은 바로 회개를 하지 않고 여자에게 책임전가를 한다. 여자에게 책임전가를 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 책임의 기원은 하나님께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관의 근본적인 관계가 개어진다. 아담이 책임전가를 했을 때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 결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타락의 질서가 형성된다.

그러면 성서를 엄밀히 보자. “네가 남편을 지배하고 싶겠지만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역사에서 언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던가? 여성이 지배하려는 욕망을 일으킬 겨를도 없이 남자들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타락의 질서를 정당화해왔다. 타락설화에 의하면 성차별은 아담의 책임전가 결과다. 그리고 기독교는 아담의 책임회치 내자 책임전가의 역사를 계속하며 여성을 억압해왔다. ? 남성이 지배하는 힘을 갖기 위해서. 따라서 성차별은 고의적인 죄이며 책임질 줄 모르는 남성 집단의 이기주의적 죄악성 그 자체다.

성차별주의가 원죄의 산물이라고 할 때, 또 하나 큰 문제는 성차별주의적 인간이 갖고 있는 폭력성 문제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린다는 질서 후에 생긴 일은 가인과 아벨의 형제살인 이야기다. 힘센 가인이 약한 동생을 죽인다. 이 이야기는 성차별 때문에 야기되는 질서는 강자에 의해 약자가 억압당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힘에 의해 질서가 재편된다. 일단 이렇게 힘에 의한 질서가 형성되면 그 폭력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라멕의 노래(ㅊㅇ시기 5:23-25)에서 보듯이 폭력이 대형화되고 집단화된다. 라멕은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로 시작되는 노래를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죽여 버린다고 위협하면서 아내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다. 이 노래에서 보듯이 폭력의 일차적인 희생자는 언제나 여성이며 경고의 대상도 여성들이다. 결국 성차별주의는 폭력과 결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성차별주의가 죄악이라고 평가될 때 이제까지 모든 가부장적 세계의 가치관이 문제가 된다. 하나님처럼 여성을 누르던 남성의 권위 그 자체가 죄인으로 심판대에 서게 된다.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여성의 존엄성과 완전한 자아실현을 방해한 남성들의 횡포 역시 죄로 규정된다. 더욱이 여성을 남성을 위한 대상물로 보고 여성의 육체에 공격을 가하거나 여성을 상품화한 행위도 죄악으로 간주된다. 이제까지 여성들의 미덕으로 조장되어 온 여성의 수동성, 자기부정, 자기희생, 포기 등은 덕목이 아니라 여성이 벗어나야 할 가치로 재편성된다. 따라서 여성의 죄는 자기답게 살지 못하는 것,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를 파괴하도록 버려두고 악에 대항하여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성차별주의가 원죄의 만물이라고 하는 것은 성차별주의가 갖고 있는 폭력성 때문이다. 성차별주의적 인간은 모든 관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폭력 구조 안에서 이루려 한다. 이런 힘의 질서에 따라 인종차별, 제국주의, 군사주의, 자연착취 등 억압과 차별의 위계체계가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차별 질서가 바로 가부장제 얼굴이다. 그리고 이 가부장제 맨 밑바닥에는 성차별주의가 깔려있다. 그래서 여성신학에서는 성차별주의를 원죄의 만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회개로 가는 길

 

그러면 성차별주의가 죄악이라고 할 때 죄는 회개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기독교애서 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책임의 문제를 가리기 위해 모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성차별주의에 희생되어 온 여성과 그 혜택을 누린 남성에게 똑같은 죄의 책침이 있는가? 이제까지 가부장제 역사는 남성의 결정에 의해 움직여왔다. 따라서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일궈 온 가부장제가 악의 소산임을 인정하고 힘을 중심으로 한 기독권을 초기하는 것이 회개하는 길이다. 곧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서애서 가부장제 폭력과 손을 끊는 것이다.

그러면 여성에게 책임이 없는가? 여성은 억압에도 분노할 줄 모른 것을 회개해야 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 외치며 성차별적 가부장제 구조를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폭력을 무기로 남을 억압하려 하는 구조적 죄로서의 가부장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일을 하는 데는 같이 억압당한 여성들의 자재적 연대가 중요하다. 그리고 가부장제 폭력 고리와 손을 끊으려는 남성들과 함께 파트너쉽을 이루어나감으로써 창조질서를 외복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회개로 가는 길이다.

199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