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한국염
예수와 바울의 대화
바울: 저는 일생을 당신 사업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 기독교가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에이, 그게 어디 기독교나? 내가 교주인지, 네가 교주인지 모르겠다. 내 말보다 네 말을 더 잘 따르더라.
바울: 아니, 저는 오직 당신에 관해서 전했는데요.
예수: 네가 나에 대해 전하면서 살을 네 맘대로 너무 붙였더구나. 나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만 했는데 너는 엉뚱하게 “여자의 머리는 남자”,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했으니 내가 언제 남자의 머리라고 한 적이 있냐? 그뿐만 이냐?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라고 했으면 일관성이 있어야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가 뭐냐? 네 말 때문에 내 자매들이 교회에서 차별받고 있으니 ....
바울: 그거야 고린도교회에서 여자들이 너무 적극적이라 선교에 지장을 줄까봐 좀 조용하라고 이야기한 것뿐인데요.
예수: 어쨌든 교회지도자들이 입으로는 나는 부르면서 내 말보다는 네 말에 더 권위를 부여하는 것 같아. 특히 네 말을 몇 마디만 골라서 절대 진리로 선포하면서 여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게 도(道)가 텄더라. 도대체 내가 여성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나와 여자들의 관계에 대해 내 말과 행동을 기록한 복음서는 안 읽는지...어떤 자매가 기도하면서 “당신이 남자로 성육신한 것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교회에서 차별받고 억압받는데 그래도 제가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까?” 라고 하소연 하는데 참 답답하더구만.
바울: 제가 세상에 내려가 내 뜻이 왜곡되었다고 설명할까요? 자신 있습니다.
예수: 됐다. 너야 선교를 위해,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적응을 하기 위해 그렇게 애기했겠지만, 너를 핑계 댄 교회지도자들이 순전히 전략인 것 같아. 예를 들어 내 제자가 남성만 이라고 여성 안수를 반대했다는데, 엄밀히 말해보자. 내 제자들은 유대인에다 남자였다. 그런데 왜 유대인도 아닌 사람들이 남자라는 이유로 안수를 받냐? 그리고 내 여성제자들 많다. 나의 자매들이 교권주의자들이 너를 팔아서 여성을 차별하는 그런 신학과 교리를 믿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들은 나를 해방자로 받아들이고 있어. 이게 구원의 의미고. 나를 구주로 믿는 교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면, 여성들에게 내가 과연 그리스도이겠냐?
여성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복음서에 보면 예수와 여인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예수는 하늘나라 비유를 설명할 때 누룩을 넣고 반죽하는 여인, 맷돌질하는 여인,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 등 많은 여인들의 이야기로 하늘나라를 묘사했다. 예수가 여인들을 이야기에 등장시킬 때 그 여인들은 항상 좋게,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의한 재판관을 움직인 과부 이야기(누가 18:2-5), 과부의 엽전 두 푼(마가 12:41) 등 신앙의 모델로 여인들이 등장한다. 예수는 곳곳에서 여인들을 격려하고 일으키셨다, 한 번도 여성에게 꾸지람을 한 일이 없다. 심지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조차 정죄하지 않았다.
반면에 남자들은 종종 불신앙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재산이 아까 와 예수를 따르지 못한 부자 청년을 비롯하여 남자제자들마저 예수께 호된 꾸지람을 듣는다. 베드로는 사탄으로, 유다는 차라리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물로, 도마는 믿음 없는 자로, 아고보와 요한은 권력을 탐하는 자로 비난받는다. 복음서의 여인들은 하늘나라의 전승자요, 신앙의 표상이었다.
예수님은 여성을 지지하고 긍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해방시키셨다. 예수는 당시 유대전통에 들어있는 여성에 대한 많은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여성을 해방시킨 해방자다. 우선 요한복은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보자. 당시에 랍비는 여인과 길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 금기를 깨고 여인과 대화를 하셨다. 더욱이 그 여인은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예수는 이중금기를 깨고 여인과 대화를 하심으로써 이 여인으로 하여금 복음의 첫 전도자가 되게 하셨다. 또한 12년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을 고치셨는데, 이것 역시 금기를 깬 사건이다. 유대 정결법에 의하면 피는 부정해서 피를 흘리는 당사자는 물론 그와 접촉한 사람도 부정해진다고 규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 여인이 접촉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피의 금기를 깨셨다. 뿐만 아니라 금기에 도전하여 자신을 만진 여인을 믿음이 좋다고 격려해주셨다.
어디 그뿐인가? “여자에게 토라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태워버리라‘는 랍지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당시에 여자를 가르치는 것이 금기사항이었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말씀을 전해주셨고, 자기 일을 도와주지 않고 말씀을 듣고 있다고 비난하는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좋은 못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심으로써 여성의 지적 욕구를 지지하고 긍정하셨다. 금기를 깨고 이 금기에서 여성을 풀어주신 예수의 태도는 오늘까지도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차별을 겪고 있는 여성들이 취할 바를 잘 보여준다. 금기와 전통에 도전하는 것! 이것이 예수께서 여성들에게 보여주신 해방의 길이다.
이렇게 금기를 깨고 예수를 해방시킨 예수는 여인으로부터 배우기까지 하신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하자 예수는 “자녀의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모멸차게 거절한다. 어떤 설교자는 이 본문을 예수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이 말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녀의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말에는 예수가 한순간 유대인 남성의 정체성으로 민족차별과 성차별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방인이라도 백부장의 종은 서슴치 않고 고쳐주셨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이 부탁하자 ‘개’라는 모욕적인 말을 썼다. 예수의 이런 태도에 여인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는 말로 예수의 편견을 일깨운다. ”그래, 나는 당신 말대로 당신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이고 여자다. 이방인 여자도 사람이다, 개라고 해도 좋으니 딸을 고쳐 달라.“는 여인의 지적에 예수는 자신이 갖고 있던 편견을 발견하고 태도를 바꾸어 여인의 딸을 고쳐주었다(마가 7:24-28). 예수도 여인의 일깨움에 반성하게 태도를 바꾸는, 여성에게 배우는 장면이다.
누가 참 제자냐? :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주역 여성들
예수는 많은 여인들을 고쳐주시고 자유케 하였다. 그래서 예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르고 섬겼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가 세 번 씩이나 수난 예고를 했음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여인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이해했다. 예수가 잡히기 전날, 한 여인이 예수께 옥합을 깨뜨려 부음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기념한다(마가14장). 아무튼 이 여인이 한 일에 대해 예수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건 후 유다가 예수를 팔았으니 너무 기막힌 대조 아닌가?
이렇게 예수의 장례를 기념한 여인의 이야기를 필두로 예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수난의 현장과 부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남자 제자들이 다 도망간 그 수난의 자리, 십자가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바로 여인들이었다. 당시 십자가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도구였고, 정치범을 처형하는 현장에 함께 한 사람들도 같은 무리로 잡혀 처형당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 도망간 것이다. 이런 현장에 여성들이 함께 했다. 마가는 15장 40-41절에서 이 여인들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면서 이들이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라다녔고 섬기던 여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여인들의 이름은 요한나, 수산나,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아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다.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 때문에 여자들도 도망간 남자 제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여성들이 예수 십자가 고난 현장의 증인이라고 4복음서 모두 증언하고 있다.
복음서기자는 예수 제자직의 중요행동을 “따르고, 섬기는”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고난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이 부활의 목격자가 된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예수 주변의 여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해 묻힌 무덤을 찾아갔다. 그 역시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목숨을 걸고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고,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인들이 예수의 말대로 부활소식을 전했을 때 제자들은 미쳤다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예수를 따르고 섬기고 십자가 고난 그 자리에 함께 했고 부활을 목격하고 증언자가 된 여성들이야말로 예수의 참 제자가 아닌가?
부활의 증인인 여인들은 초대교회가 탄생하는 오순절 그 자리에도 함께 있었다. 더욱이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일어났다고 분명히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교회는 오순절 사건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행전 12장 13절에서 ‘마가의 집’ 이라고 하지 않고 분명이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못밖고 있다. 이렇게 분명이 적혀있는 것도 다르게 가르치니 다른 것은 말해 무엇 하랴! 누가는 이것을 미리 내다보고 마리아의 이름을 밝혀놓았는지도 모른다.
통전적이고 새로운 인간의 표상 예수
중세의 교부들은 예수가 남성으로 성육신한 것을 남성이 더 우월한 성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예수가 남성으로 성육신한 것을 남성의 우월성으로 간주한다면 전혀 반대의 추론도 가능하다. 빌립보 2장 6절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었다. 예수가 남성으로 성육신하셨다는 것은 남성성의 우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하고 섬겨야 할 성의 표상이 남성임을 뜻하는 것이다. 남성의 이미지는 군림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겸손이나 섬김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가 인류를 섬기기 위해 온 것처럼 이제까지 가부장제 역사에서 섬김을 받으며 군림하던 남성들이 이제는 섬기는 종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남성으로 성육신한 것이 아닐까? ‘종’이라는 말도 ‘주의 종’이라고 하면 특별한 감투가 된다. 남성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 하면 교회에서 섬겨야 하는 거룩한 존재로 간주된다. 반면 여성의 경우는 글자 그대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인 교회에서 예수는 죄인인 인간의 몸, 남성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혹시 죄인의 표상이 남자라서가 아닐까?
이렇게 예수를 해석해보는 것은 말장난 인 것 같아도 예수가 남자라는 이유로 남자가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제기에서 비롯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옷을 입었지만 군림하는 남성적 모습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인간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암탉에 비유하며 멸망할 예루살렘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나님을 ‘압바’라고 소개했는데 누가복음 15장에서 그 ‘압바’는 어머니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울기도 하셨다. 그 시대 사람과는 달리 여성에게 적대감이나 혐오감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여성적인 것을 하늘나라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런 예수의 모습은 예수가 남성성과 여성성이 통전된 인간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통전된 예수의 모습이 바로 새 인간의 표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가 모든 인간을 위한 삶의 모델, 즉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수를 양성적인 그리스도로 보는 사상은 초대기독교에서부터 있었다. 교부 제롬이나 중세기 놀위치의 줄리앙은 예수를 어머니로 묘사하여 양육하고 적을 먹여주는 분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론을 ‘양성동체적 기독론’이라고 한다. 한편 ‘양성기독론’과는 달리 구원의 새 차원은 여성적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보고, 장차 올 메시아나 부활의 그리스도는 여성적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그룹도 있다. 양성기독론이나 여성메시아 사상은 모두 남성성만으로는 올바른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데서 연유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너무 여성을 억압해왔기 때문이다. . 여성이 해방되고 남성이 온전한 인간성으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남성 그리스도가 아닌, 여성메시아 출현을 기대한 것이다.
예수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교회에서 차별받는 다면 그 예수는 여성들에게 더 이상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예수가 여성들의 해방자이기 때문에 구원자가 되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는 그렇게 여성들의 해방자로, 구원자로 삶의 모범을 보이셨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보면 ‘진리의 수호’라는 이름하에 기독교이니 저지를 수 있는 거짓 신앙을 경고하고 있다. 호르케라는 수도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절대적 진리를 상대화할 길을 보여준다고 판단한다. 수도사들의 신앙을 보전하기 위해 이 책을 금서로 정하고 책장마다 독을 발라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호르케는 몇 명의 수도사를 죽게 하고도 자신은 진리의 수로를 위한 순교자로 자처한다. 호르케 수도사의 맹목적 신앙에 대해 윌리엄 수도사는 “이런 자가 바로 가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독선적이고 맹목적인 진리 추종이야말로 인간을 현혹시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적그리스도요, 거짓 그리도적 행위라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절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수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은 여성신학을 이단이라 단정하고 여성신학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겠다고 안간힘을 쓴다. 이들은 ‘여성이 남성의 지배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요, 타락의 댓가다. 그리스도가 남성인 것처럼 남성만이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는 거짓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 선포를 경계해야 한다.
19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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