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대한 한 단상
한국염
어떤 교회 여집사가 몸이 아파서 교회 예배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친한 교인한테 사정이야기를 하며 교회에 나갈 수 없노라고 했다. 그다음 말이 기가 막혔다. 그 여집사가 당부하기를 “ㅎ집사에게는 제발 자기가 아파서 교회에 못나온다는 말을 하지 말라달라고”고 하더란다. ㅎ집사는 소위 기도를 많이 해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졌다. 자기는 성령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람을 척 보면 그 사람이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안다는 것이다. 누가 아프다거나 집 안에 문제가 생기면 예수를 잘못 믿어 벌을 받아 그렇다고 서슴치 않고 단언한다. 그러니 교인들이 섣불리 이 ㅎ집사 앞에서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 없다. 믿음이 부족한 증거가 되니까. 나도 그 ㅎ집사를 하는데 나만 보면 “한선생 기도 열심히 해. 성령받아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날 그 여집사가 나를 찾아왔다. ㅎ집사 말이 “자기는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다녀보았자 헛일이라고 하니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을 믿느냐? 예수를 구주로 믿느냐?”고 물었더나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됐다.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한 뒤에 더 안심시키기 위해 ㅂ마태복음 16장 베드로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예수께서 ”너에게 알려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 이야기를. 그리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이 여인이 돌아간 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도대체 성령이 뭐길래!
신학적으로 ‘성령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은 잘못된 물음이라고 한다. 성령은 ‘인격’이지 ‘무엇이다’라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존재와 활동은 삼위일체론 적인 틀 속에서 이래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교회사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 예수께로부터 오는 예수의 영 그자체요, 교회를 탄생시킨 교회의 어머니라고 볼 수 있다. 신학적으로 성령은 삼위일체론적 인격제다. 그러므로 물질화시킬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를 보면 성령은 마치 화약고 같다. ‘엑스폴로 74’, ‘성령폭팔대성화’, 등 성령을 마치 다이나마이트처럼 취급한다. 기도나 설교시에는 “성령님이여 오소서, 이 자리에 강림하소서.”라고 인격적으로 ‘님’자를 붙이면서 반대로 성령을 휴대용품처럼 취급한다. 성령을 강조하는 곳일수록 인격과는 거리가 멀고 물질화되어 있다. ㅎ집사처럼 성령을 상표로 내거는 사람일수록 이기적이고 비공동체적이다.
도대체 성령은 누구인가? 성령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서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는지, 성령이 임하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관심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관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느냐로 평가한다. ‘하나님이나 예수가 어떤 분이냐?’하는 것도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셧는가?, 그분의 삶을 보고 ’아, 예수는 그런 분이구나‘하고 받아들인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그 성령이 어떤 일을 하느냐를 본 다음 성령은 그런 분이구나 하고 믿는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당신이 오실 그이니까/“하고 묻자 ”내가 하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일이 그 존재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은 어떤 일을 하는가?
1. 성령은 ‘살림’의 영이다.
성령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권정생님 동화가 생각난다. 토끼 한 마리가 배가 고파 풀을 뜯어먹으려다가 풀이 불쌍해서 결국 “하나님 나는 어쩌지요?” 하고 굶어죽게 된다. 죽어가는 토끼 위에 눈물이 떨어지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내용이다. 왜 이 이야기가 성령과 결부되었을까? 폴의 생명을 존중한 토끼가 결국 풀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 정황을 가슴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연민’이 성령의 이미지로 귀결된 것이다.
생명과 하나님의 연민, 그리고 성령! 구약에서 입김, 숨결, 비림, 영혼 등을 의미하는 루아흐(Ruah )라는 말로 표현된 성령 즉, 하나님의 영운 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뜻한다. 하나님의 기운은 세상에 생명을 주신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창조자 성령은 한번 창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살리는 영이다.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죽은 뼈에 생기를 불어 넣어 소생케 하신다. 절망상태에 있는 죽은 뼈조차 당신의 영을 불어넣음으로 새롭게 하신다. 성령은 ‘살림’의 영이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 살림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도처에 죽음의 세력이 깔려있다. 핵과 세균전, 초현대적 무기과학 앞에서 인류는 죽음의 공포위기를 맞고 있다. 각종 오염으로 죽은 뼈가 되어 간다. 물은 폐수로 죽은 물이 되어버리고 하늘은 미세먼지로 죽음의 잿빛 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열대림의 남발로 숲은 더 이상 생명이 깃드는 곳이 아니라 죽음을 따먹은 숲으로 변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가? 살상과 폭력, 마구잡이 자연개발로 인한 이상기후 등 자연의 보복 앞에서 어머니 대지와 더불어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세력 앞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생명의 영, 살림의 영인 성령’의 간구다. 인간에게 강간당해 죽어가는 어머니 대지를 회복하기 위한 ‘살림의 영’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다.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하와가 정복당한 그날로부터 인류의 생명 경시사상이 시작되었을 터! 생명의 영인 성령을 맞아들이는 행위는 곧바로 생명의 담지자인 여성의 존중과 결부된다. 생명의 담지자 여성을 무시하면서 생명의 영을 믿는다는 것은 허구다.
2. 성령은 자유하게 하고 해방하는 영이다.
예수는 첫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뜨임을,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
성령은 사람을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킨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성령은 자유하신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이 임재한 사람은 옛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자유롭게 산다. 해방은 예수의 영 표본이다.
그런데도 성령을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운동의 중심부에 놓인 여성들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산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은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해방의 영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침묵하고 남자에게 복종하도록 강요되어 살고 있다. 이렇게 복종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상황에서 초대교회 여성의 자류한 영성이 메말라 가고 있다. 민중 해방을 지향하는 민중신학이나 민중교회에서조차 정치척 경제적으로 억눌린 계층의 해방을 대변할 뿐 성을 이류로 속박당하는 여성의 해방은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있다.
오순절 성령사건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다. 왜 하필 이 중요한 성령감림사건이 여인의 집에서 일어났는가를 교회는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뿐만 아니라 오순절 성령사건이 생긴 그곳에 함께 한 여인들의 이름을 성서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여인들이 성령을 받아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정통교회라고 하는데서 여인들은 주변세력으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여인들은 교회 밖으로 눈을 돌려 산기도로, 기도원으로 몰려가고 있다. 한국교회 현실에서 자유의 영, 해방의 영, 성령의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3.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이다.
성령의 특징은 하나 되게 하는 것이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 “성령도 하나요, 그리스도도 하나요,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설득하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 갈라진 적대세력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다 하나”라고 선언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는 것과 차별은 다르다.
예수가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 되게 하신 것처럼 갈라진 것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외치며 교회일치운동을 벌인다. 이는 다분히 100개 이상으로 갈라진 한국교회의 일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실상 교파의 일치분일까? 경상도인이 많은 교회는 전라도 출신 목사를 초빙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어느 교회에서 한 목사를 초빙하려고 했다가 그 목사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교회는 함경도 출신들이 주류였다. 소위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함을 외치는 교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극심한 차별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다. 교회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내세우며 일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 하나라는 평등공동체를 향한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요엘서 2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어주신다. 성령이 임재하는 곳에 차별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도 성령을 강조하다 못해 폭팔을 갈구하는 한국교회에서 여성안수를 금지하고 설령 안수제가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청빙에 인색하고 부교역자는 되어도 담임을 거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밤중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어떤 것일까? 예수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의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선함, 총성, 온유, 절제’다.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들이다. 성령의 열매 속성들을 자세히 보면 소위 여성적인 것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성적인 특성, 생명을 보호하고 감싸는 여성적 요소가 성령의 열매 모습이다. 이는 성령의 히브리말 루아흐가 ‘여성명서’라는 것과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서 성령이 여성적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열거한 성령의 모습, 즉 사람의 영, 자유와 해방의 영, 하나되게 하는 영의 모습은 남성성 보다는 여성성에 훨씬 가깝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적 성령을 설명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잠언 8장에 근거해서 성령의 근원을 소피아 즉, 여성적 속성을 가진 지혜의 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우리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에서 우리 중 하나가 바로 소피아 성령이라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최대과제는 교회갱신이다. 뜻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그 교회는 여성적 본질을 갖고 있는 성령의 침 모습을 인지해야 한다. 성령의 참 모습을 인지한 교회는 더 이상 남성중심적 교회구조가 아니라 남녀평등적 구조로 변화해야 한다. 성령은 교회를 낳게 한 교회의 어머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어머니 성령의 여성성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하리라. 그럴 때만이 성령 안에 머무르는 교회가 될 것이다.
나는 또 하나의 여성 이야기로 이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 여인은 사마리아 여인이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 현재에도 남편 아닌 다는 남자와 사는 여인,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갈급했던 여인, 6명의 남자들로부터 생명감이나 해방감, 평등감이나 자유함을 느끼지 못해 전전하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이 마침내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다. 드디어는 물동이를 버려둔 채 예수의 증언자가 된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여성의 영성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오늘날 많은 여인들이 성령의 단비를 갈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성령의 참 역사인 살림의 영, 해방과 자유의 영, 하나 되게 하는 영, 새롭게 하는 영의 실체를 무시하고 현상적인 모습에만 집착한다면 사마리아 여인을 목마르게 했던 남편들처럼 버림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19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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