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우리들의 어머니
한국염
내가 다니는 한 작은 교회
내가 다니는 교회는 매우 작은 민중교회였다. 창신동 산동네를 오르는 중턱에 자리집고 있다. 2년 전가지만 해도 교회간판이 손바닥만했다. 우리 교회에 목회훈령을 하러 온 신학생들이 일주일간의 실습을 마치고 나서 그 기념으로 제법 큰 간판을 선물했다. 학생 한 사람이 널판에 붓글씨로 쓴 다음 그걸 손수 파서 만든 것이다. 어느 교회처럼 예술성은 없지만 우리는 그 간판을 소중히 달고 있다. 그러나 이 간판마저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느낟. 보통 교회처럼 정탑도 없다. 교회 건물도 6.25때 지은 흙벽으로 낡았다. 낡은 대문에 문패도 초라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흙 마당이 있다. 이 마당에 언제나 동네 아이들이 북적댄다.
한쪽에 간이로 지은 작은 건물에서는 가난한 이 동네의 맞벌이 부부를 위해 탁아방을 한다. 10평 남짓 중심 건물인 속칭 본당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오후에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5시부터 9시까지 공부방을 열어 숙제와 학교공부를 도와주며 특별 프로그램을 한다. 주일에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본당 정면에는 어느 교회가 버린 커튼을 얻어 벽을 감싸고 그 위에 오동나무로 만든 가시 십자가를 걸어놓았다. 십자가 앞에는 작은 강대상이 하나 놓여있다. 일주일에 6일을 공부방으로 쓰다 보니 주변이 산만하다. 주일날이 되면 정리를 한다고 해도 어설프기만 하다. 그래도 우리 교인들은 이미 이런데 익숙해져서 개의치 안흔다. 대부분 노동자들이다. 사는 것 자체가 힘들고 불편하게 살다보니 예배당이 깔끔치 못해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오는 손님 교인들은 “이런 데서 어떻게 예배 드리냐“고 놀란다. 지나가다 호기심에 들린 사람은 쑥 기웃거려 보고는 무슨 교회가 이러냐고 한다. 교회면 종탑도 있고 건물도 그럴듯해야 하지 않느냔다. 우리 교회 이름은 청암교회 인데 이 동네서 모르는 사람이 많고 ‘탁아방하는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4년 있다 보니 때론 “아! 그 좋은 일 하는 교회요?” 하는 소리도 듣는다.
우리 교회는 주일날 예배가 공동식사까지 참석해야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공동식사는 남자 한명, 여자 한명 씩 짝을 지어 준비한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준비하고 함께 설거지 한다. 집사가 5명 있는데 모두 투표로 선출한다. 교회에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전교인 회의를 열러 의논한다. 예배는 집사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한다. 헌금은 입국에 놓인 헌금함에 예배 전에 미리 넣는다. 설교는 목사와 담임목사의 부인인 준목이 돌아가면서 설교한다. 우리 목사의 부인은 목사 부임첫날 교인들에게 “사모로서의 역할은 기대하지 말라.”고 선언했고, 교인들은 사모로서가 아니라 깍듯이 준목으로 대한다. 우리 준목은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 갔다가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자 그때부터 여성문제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여성안수가 허용되자 준목고시를 보고 준목이 된지 15년이 되었는데 아직 목사가 아니다.
교회본당을 평일에는 공부방으로 쓴다는 말을 이미 했지만 강대상 앞을 거튼으로 가리고 사용한다. 그런데 개구쟁이들에게는 어두컴컴한 그 커튼 속이 숨바꼭질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놀다보니 커튼을 잡아 뜯고, 그러면 수난당하는 것이 십자가다. 종종 십자가가 땅에 떨어진다.어느날 주일 아침 교회를 청소하던 신학생이 떨어진 십자가를 주워 다시 달았다. 마침 이 신학생이 대표 기도를 하였다.
“주님, 오늘도 당신의 십자가가 또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십자가를 주워 달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아이들에 의해 당신의 십자가가 떨어지는 수난을 당했지만 그 아이들이 당신을 욕되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말로 당신을 욕되게 하는 것은 이 어린이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영화에만 관심하는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아닌가 합니다.....”
“또 떨어졌습니다.”로 시작되는 기도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다. 그 다음 순간 과연 우리 한국교회는 진정한 교회인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약자와 함께 하는 신앙공동체, 교회
얼마전 한국교회를 진단해보는 모임이 있었다. 이구동성으로 한국교회의 과제는 교회갱신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 중 크게 기복주의, 물량주의와 개교회주의, 그리고 비민주성이 지적되었다. 이를 위해 교회민주화와 경제정의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를 갱신해야 한다고 대안이 제시되었다. 경제정의운동이란 교회가 개 교회 중심, 대교회주의에서 벗어나 작은 교회, 소외된 이웃들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요, 교회민주화는 성직자 중심의 교구너주의에서 벗어나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섬기는 교회 체제를 만들어야 하고 특히 남녀 평등한 교회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하면 예배드리는 건물, 예배당을 연상한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크게 세 가지로 정의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코이노니아(친교)적 공동체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의는 구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백했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신앙공동체가 교회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그 자제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 모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할 때 중요한 과제는 그 공동체에서 제일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자를 돌보지 않고 제사만 드리는 것을 가증하다고 하였다. 교회가 하나님 백성의 모임임이라고 할 때 오늘날 교회가 관심해야 할 것은 어디인가?
살아있는 생명공동체,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바꾸어 발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예수와 관련하며 신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특별히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의 “한몸의 지체”와 관련이 있다. 팔과 다리, 발이 서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듯 교회는 서로 일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한 몸의 지체’를 강조하면서 지체의 아픔을 강조했다. 발이 아프면 온 몸이 다 아프듯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같이 일체감을 느끼고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사람 몸의 지제가 천하고 귀한 구별이 있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지체 간에 어떠한 형태든 차별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몸은 살아있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살아있는 몸의 피는 언제나 순환한다. 묵은 피는 버리고 새것을 만들어낸다. 교회가 살아있다는 것은 항상 새로워져야 함을 뜻한다. 몸이 죽으면 굳어지고 피가 응고되듯이 폐쇄적이고 교리와 전통만을 주장하는 경직된 교회는 더 이상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 조직과 교리는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 몇 천 년 전의 가부장적 제도와 문화를 절대화하여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교회, 그 교회는 과연 살아있는 몸일까?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렸는데 공동체의 고통은 무시하고 대형화만 꿈꾸는 교회는 과연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일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공동체다. 생명공동체는 교인수, 건물,예산의 규모로 교회를 평가하지 않는다. 세상가치를 따라 물량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제 교파, 제 교회만을 아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교회일치에 관심한다. 자유케 하려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눌린 자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노력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더 나아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회다. 그리고 늘 새로워지기 위해 애쓴다.
살아있는 교회, 생명공동체는 무엇보다 살리는 일에 앞장선다.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불의한 체제와 맞서 정의를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생태계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교회는 당연히 교회구조를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남성중심, 성직중심, 가진 자 중심의 위계질서를 해방적으로 바꾸고 여성, 청년, 어린이 가난한 자까지 평등하게 참여하는 길을 열어놓는다. 왜냐하면 생명공동체는 생명을 천하보다 중요하게 새악하고 모든 생명을 다 동등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공동체에서는 예배와 설교, 모든 제도들이 다 해방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에 언제나 역동적이다. 흔히 교인들은 세상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 반대다. 예수는 세상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을 위한 존재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할 때 존재의의가 있다. 아니면 맛 잃은 소금처럼 버려질 것이다.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교회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존재방식은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다. 공동체가 겪눈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며 세상을 섬기는 행위, 이것을 코이노니아적 교회라고 한다. 나눔과 섬김을 통해 선교를 하는 코이노니아적 공동체의 모델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소유물을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이끌려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공동체다. 초대교회에서 은사는 권위나 특권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 주어졌다, 이 말은 교회의 모든 제도나 기구는 섬기기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 특권을 주장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섬김의 은사에는 성벼르 빈부, 나이, 인종차별이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평등한 은사공동체로서 어떤 차별이 없었다. 교회에 위계적인 질서가 생겨난 것은 기독교가 국가권력과 밀착하면서부터였다. 섬김의 은사가 다스리는 질서로 변질된 것이다. 오늘날 교직은 섬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권위주의를 위한 것인가? 만일 섬기기 위해 있다면 거기에 왜 성차별이 있어야 하나?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교리는 여성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남성들에 의해 남성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남성중심적 교회를 통해 여성의 자유한 영성은 발달되는데 아니라 오히려 위축된다. 교회에 의해 여성은 복종의 영성만을 갖는다. 물로 ㄴ신앙인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지만 유독 여성에게 복종의 영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복종의 영성은 그리스도 보다는 실상 남성에의 복종으로 이끌려지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여성은 철저히 소외되고 수동적인 존재다. 여성의 자율성이 설 자리가 없다. 자율성이나 결정권은 남성이 행사하고 여성은 봉사와 섬기는 역할만 주어진다.
물론 봉사와 섬김은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존재양식이다. 문제는 교회에서 남성은 섬김을 받고 여성은 섬긴다는데 있다. 교회에서 여성은 자기 영성의 주인이 아니라 남성에 의해 지배당한다. 교회에서 여성은 부엌에서 일하는 존재다. 예배의식에서 여성은 배제되어 있고 설교에ㅔ서 남자는 바람직하고 자율적인 신앙의 모델로 제시되는 반면, 여자는 불신앙적이거나 복종하는 상만 소개된다. 이러한 편견을 통해 여성은 자유한 영성이 아니라 노예의 영성을 갖게 된다. 한국교회에서 여성은 남성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성을 상실한다.
나의 어머니, 나의 교회여!
교회에서 여성은 관연 행복한가? 노예의 행복이 아니라 자율적인 행복말이다. 그 대답은 “아니요”다. 가부장적 교회에서 여성의 온전한 인간됨은 실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에서 여성은 행복할 수 있는가? 그 대안은 어머니교회로서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어머니로 묘사되어 왔다. 어머니가 자녀를 낳고 키우듯 교회는 믿음의 자녀를 낳고 양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 교회는 본질적으로 모성적이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부패한 세상 속에 들어가 세상을 살리는 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모성적이라고 할 때 그 모성은 가부장사회의 이용물로 채색된 부정적 모성원리가 아니라 앞서의 생명공동체적 모성원리를 뜻한다. 교회가 모성원리로 환경운동, 통일운동, 평화운동에 나설 때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모성성은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포함한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모성성이 넘칠 때 교회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상을 회복할 수 있다.
교회의 시작은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교회가 여성의 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여자는 사람 속에 들지 않던 사회에서 왜 성서는 굳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을 밝히고 있는가? 이는 초대교회에서 마리아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의 형태로 존재했다. 이 가정교회의 주인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여자들이었고, 이 여자들은 실질적으로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교회사는 예수의 정신을 가장 잘 살린 교회의 원형을 초대교회로 들고 있다. 그런데 교회사 속에서 여성은 지도자 위치를 빼앗겨버렸다. 오늘날의 교회는 자기 어머니를 학대하는 패륜아처럼 어머니 교회의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어머니 여성을 소외시키면서 교회가 어떻게 어머니의 모습이 될 수 있는가?
나의 어머니, 나의교회여, 성령의 힘으로 자유의 행진을 힘차게 하소서. 억눌린 여성, 차별받는 사람들을 일어나게 하소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소서. 이 땅의 교회들이 진정 교회의 모습을 되찾게 하소서!
19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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