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전쟁으로 고난 받는 여성을 애도하며

한국소금 2018. 3. 4. 18:07

  

한국-재일한국-일본 NCC 교류연대 성서연구

 

전쟁으로 고난 받는 여성을 애도하며

한국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장

 

* 몸으로 읽는 성서연구

 

진행

 

1. 전시하 여성폭력으로 희생당한 생존자의 소리

*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소리를 묵상 중에 한 사람이 읽는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소리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지요.

열일곱 꽃다운 나이

친구들과 나물 캐러 가는 길목에서

일본군에 잡혀 이름도 모르는 곳에 끌려가

일본군의 정액받이 노릇한 나날들,

하루에도 몇 십 명 씩 일본군이 내 몸을 침범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을 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절규한 나날들,

아기를 지운다고,

일본군이 마취도 없이 배를 가르던 날,

제 몸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참히 살육당한 아기를 생각하며

내 친구는 몸부림을 쳤지요.

해방이 되었다고 하네요.

정조를 잃은 우리를 누가 받아줄까요?

더럽혀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친구들이 절벽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지요.

그 절별 이름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지요.

모진 목숨 죽지 못해

만신창이 된 몸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끝내 창피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숨어살던 나날,

, 정신대라고 불리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우리네는

그렇게 처절하게 수모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2. 그룹토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성서에서 전쟁과 여성의 관계를 찾아보고 터의가 끝나면 함께 모여 논의한 사항들을 공유한다.

한 그룹은 사사기 1921-21: 25를 읽고 전쟁의 속성과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다음은 그 본문과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서로 비교해보자. 다음으로 할머니들의 유럽의회 공청회 증언 자료를 읽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a. 레위인의 첩이 왜 살해되었는가?

b. 레위인은 왜 첩의 시체를 조각내서 12지파에게 보냈는가?

c. 베냐민 전쟁은 왜 일어났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d. 이스라엘 한 부족이 없어지게 될 위기에 처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e. 레위인의 첩의 고난을 통해 전쟁과 여성의 고난,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연결하여 살펴보자.

 

다른 그룹은 사사기 4: 1- 5 : 31을 읽고 전쟁에 임하는 세 여성의 태도를 분석해본다음 기독여성들이 전쟁을 극복하는 일,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하여 취해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찾아보자.

a. 드보라는 어떤 사람인가?

b. 드보라는 어떻게 전쟁에 임하게 되었고, 누구를 통해 전쟁에 이기게 되었는가?

드보라는 오늘날 어떤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가?

c. 야엘은 왜 남편과 우호관계에 있는 시스라를 죽였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드보라와 야엘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d. 본문에 나타난 시스라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며, 오늘날 어떤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 는가?

e. 정의와 평화를 위한 여성들의 역할,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바람직한 기독여 성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3. 성서와 삶과의 만남

 

1)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고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제2차 세계 대전 때일 본제국주의가 아시아 여성 10-20만명을 국가제도로 기획, 입안하여 강제 연행, 납치하여 일본군 성노예로 만든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잔악한 범죄다.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일본정부가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저지른 일본군위안부 범죄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며 다음의 7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범죄인정, 진상유명, 국회결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에 기록하고 교육,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처벌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고난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문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성차별, 계급 차별, 민족 차별 내지 인종차별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고난의 현장으로서,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피해를 첨예하게 드러내 준다. 전쟁은 여성을 피난민으로, 성폭력 피해자로, 성노예매매 현장으로 내 몰고, 가정폭력과 환경파괴로 인한 어려움, 생계부담 등 이외에도 군사문화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겪는다.

여성이 일으키지도 않은 전쟁에 의해, 여성의 삶은 뿌리 뽑혀진다. 지금도 아프카니스탄을 비롯해 전쟁 또는 무력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 인명 살상과 재산 파괴, 환경파괴, 공포 확산 등의 전반적인 참화로 무력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곳이 고통을 받는다. 그 중에도 여성은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전쟁이 주는 고통을 몸으로 겪어내야 한다. 남성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가족 부양의 책임은 여성에게 떠맡겨지며, 전쟁 피난민이 되어 유리걸식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피난민이 된 여성들은 대개의 경우 성폭행의 위험 속에 놓여 있다. 최근 우리를 경악케 한 아프카니스탄 난민 소녀들에 대한 식량구조요원의 성 상납 요구행위는 여성이 전쟁에 얼마나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는가를 잘 드러낸 준다.

 

더욱 비참한 것은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한 전시 하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이다. 전쟁이라는 명분하에 적군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은 책임조차 물어지지 않으며 장려되기까지 한다. 때로는 강간이 프로그램으로까지 이용된다.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보스니아에서 저지른 조직적인 강간, 방글라데시, 르완다 등지에서 일어난 전시하의 강간, 세계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나 내란에서 반대 편 또는 아군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강간과 강간 후의 살생 등은 전쟁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화되며, 여성에게 참혹해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러한 전시 하의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여성들은 일생동안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강간 이외에도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성매매가 행해진다. 대개의 경우 전시 하에서 또는 군 주둔 주변에서 성매매에 동원되는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볼모로 한 소녀들로, 농촌여성이나 도시 빈민 여성들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도 가난한 집 여성을 일차 대상으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다.

 

설사 전쟁 중에 무사했다 하더라도 전쟁이 끝나면, 그 후유증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여성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삶의 터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이 당하는 고통은 감내한다고 치자. 전쟁에 동원되어 돌아 온 남성들의 경우 전쟁의 폭력성이 몸에 배어 있어 그 폭력성으로 인해 가정에서 평화가 깨어진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전제로 해서 정당화되는 군대는 군사문화를 조장하여 군대에 안가는 여성을 차별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군대는 남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 가치관을 조장한다. 국가 경제적으로는 군사비 지출로 인해 국민 복지가 저당 잡히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전쟁이 있고, 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가 있는 한,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고난은 끝이 없고, 평화는 물론 남녀 평등한 사회는 요원해진다.

기독교가 말하는 평화는 전쟁의 반대로서의 평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 곳곳에서 평화는 공평, 정의와 쌍둥이로 표현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시편 8510절에 보면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 맞춘다.“라고 말하고 있어 정의와 평화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였던 할머니들은 20071130일 실시된 유럽의회 공청회 석상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한국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전쟁 때문에 이렇게 내 몸이 망가진 것이다, 전쟁이 없었으면 내가 왜 이런 고초를 겪었겠느냐. 이 문제는 나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후세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정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이 힘든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는 힘들지만, 내 이야기를 알려야 하고, 일본이 어떤 일을 했고,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여러분들이 힘을 합해서 이 문제를 일본정부가 인정하고 진실을 밝히고,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네덜란드 피해자 앨렌 할머니는 우리는 위안부가 아니라 성노예였다며, 일본정부가 여성들에게 위안부라 붙인 것을 규탄하였다. 17살에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일본군이 소녀들을 뽑아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도 끌려가 3개월 동안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했다고 밝혔다. 이어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의다!”라고 증언하였다.

필리핀의 메넨 할머니는 열세 살 때 일본군인 두 명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자기를 끌고 갔으며 낮에는 빨래와 청소, 요리를 해야 했고 저녁에는 일본군인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다.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일본정부로부터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인 배상이라며, 그것을 일본정부가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 증언에서 보듯이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정의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이 일본정부에게 전쟁을 수행하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끌고 간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국가적으로 배상하는 것, 역사교과서에 수록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알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는 역사의 정의를 촉구하는 것이요, 이 요구가 실현되는 일에 나서는 것 역시 정의에 동참하는 것이다.

 

2) 성서를 통해 본 여성들의 고난과 전쟁

 

사사기 19장에서 21장을 보면 전쟁의 속성을 잘 알 수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레위인이 여행 중에 자기를 성폭력 하려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자기 대신에 첩을 내어 주었다. 이 기브아 사람들이 그 첩을 밤 새워 윤간을 하였다. 그 첩은 간신히 남편이 있는 곳에 돌아 와 문지방에 쓰러져 죽었다. 남편은 아침에 첩이 죽은 것을 보고 시체를 말에 싣고 자기고향에 돌아와 첩의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각 부족에게 보내었다. 이스라엘 회증이 미스바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고 그 일을 행한 기브아 사람들을 죽이기로 하고, 내놓으라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이스라엘과 기브아의 베냐민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베냐민 사람들을 죽였고 그 일대의 성읍을 모두 불살랐다.

이 일을 끝내고 이들은 미스바에 모여 자기들이 아무도 딸을 베내민 지파와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기억났다. 한 지파가 멸종할 것을 걱정한 이들은 길르앗의 야베스 주민이 미스바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핑계로 야베스 주민을 처녀만 남겨 놓고 다 몰살하였다. 이 처녀들을 납치해서 베냐닌 족속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그러고도 여자의 수가 모자라자 시로에서 춤추고 있는 처녀들을 납치해서 베냐민 지파에게 주어 결혼케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첫째, 전쟁은 남성의 자존심을 위해서, 또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통치권력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참혹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은 바로 레위인의 첩이었다. 그 여자는 남편 대신에 물건처럼 기브아 사람들에게 던져져 윤간을 당해 죽었다. 그러나 레위인은 그 여자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짐승에게 하듯이 시체를 열두 조각내었다. 첩에게 가해진 테러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한 보복으로 첩의 시체를 동강내었다. 이 이야기의 어느 곳에도 레위인의 첩이 당한 고난에 대한 애도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둘째로, 전쟁은 정의가 아니라 권력을 위한 힘겨루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범인들을 내어놓으라고 하자 힘이 센 힘이 센 용사를 많이 갖고 있는 베냐민 자손들이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어주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오히려 자신들의 힘을 믿고 전쟁을 택한 것이다. 옳고 그름보다는 힘을 기반으로 일어난 것이 전쟁이며, 전쟁은 권력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 전쟁의 발단이 된, 레위인을 성폭행하려던 기브아인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앞뒤의 문맥을 보면, 기브아인들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 가 아니라 외방인을 겁주기 위한 장치에서 성폭행을 하려던 의도가 짓다. 첩을 내어놓은 것으로 레위인의 힘겨루기는 꺽였다. 실제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행의 대부분이 이를 통해 상대방의 힘을 꺾으려는, 권력장악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일상에서의 남성들의 권력장악의 욕망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 전쟁의 결과는 여성들의 수난이다.

베냐민 지파의 불응으로 일어난 전쟁의 결과, 베냐민지파가 전쟁에 지고 멸종당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자 주민들은 다 죽이고, 순결이데올로기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처녀들만 남겨놓고 끌어다가 베냐민 지파에게 신부 감으로 준다. 말은 결혼이지만, 씨받이인 셈이다. 적과 강제 동침을 해서 아이를 낳으며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여성의 수난을 당연시하고 있다. 마치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 여자들에게 행한 작전에 의한 강간과 강제임신처럼. 전쟁은 여성을 제물로 삼고 고난으로 떨어뜨린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일단 전쟁이 끝나면, 남성들은 같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들의 안위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한 남자 종족의 대가 끝날 것만 문제가 되지, 그 전쟁으로 몰살당한 여성들의 수난이나 납치를 당하는 여성들의 고난과 한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전쟁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오직 여성들의 몫일뿐이다.

 

넷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사사기의 경우 전쟁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사사 입다의 딸의 수난을 비롯해서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고난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전쟁이 불의한 것이며 그로 인해서 여성의 삶이 얼마나 고통에 처해지는 가를 고발하고 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켜 한 부족을 싹쓸이 해 놓고는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또는 하나님이 한 지파를 비게 하셨다는 말로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대로 하였다.“ 비록 왕이 없어서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레위인의 첩 이야기에서부터 부족전쟁에 이르는 이야기, 이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고난 이야기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해서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의 역사를 보면,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구약성서에서도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면서 그 전쟁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거룩한 전쟁(성전)이라고 합리화한다. 성서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이 많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알라의 뜻에 의한 성전이라고 한다. 중동 지역에 묻힌 석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도 부시는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정의를 수행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신의 이름을 빙자했을 뿐이지, 인간들의 불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불의로 인한 여성의 희생과 고난, 남성들의 힘겨루기에 의한 전쟁으로 수난당하는 여성들의 고통과 한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3) 전쟁을 대하는 여성들의 태도

그러면 여성들은 단순히 전쟁의 희생자로서 피동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사기 4-5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쟁에 임하는 여성들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사기 4장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었는데, 예언자 드보라가 바락과 함께 적장인 야빈의 근대 장관 시스라를 물리치고 야빈을 굴복시킨 이야기다. 이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전쟁 이야기에는 3명의 여성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는 드보라 같은 경우다.

드보라는 주부 사사로서 남성인 바락을 불러 시스라와 맞서 싸우도록 촉구한다. 이 전쟁에서 드보라는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명실상부한 지휘자로서 전쟁의 작전을 짜고, 장수를 지휘하는 역할을 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전쟁이 끝난 다음 부른 노래에서 드보라는 지신을 민족의 어머니로 칭하면서, 자신이 일어남으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여성이 단지 전쟁의 소극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됨을 알게 된다. 여성의 적극적인 역할을 말한다고 해서 전쟁을 찬양하는 논리는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은 가나안의 침략으로 20년동안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억압을 당해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있었고, 그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이 들었다는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민족이 억압을 당하고, 민족이 고난을 당할 때, 민족의 해방을 위해 나선 전쟁이기에 그 전쟁은 해방과 주권 회복, 생존을 위한 항전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드보라는 단순히 폭력적인 전쟁의 수행자가 아니라 자기 민족을 적의 폭력에서 구해내고자 항전에 임했고, 그 결과 드보라로 인해 40년 동안 그 땅에 전쟁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결국 드보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의 반대로서의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평화를 만드는 일에 지도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두 번 째 여자는 야엘의 경우다.

야엘은 전장에서 살아남아 도망쳐 온 적장 시스라가 물을 달라고 하자, 물 대신에 엉킨 우유를 주어 잠들게 한 후 말뚝을 관자놀이에 박아 죽임으로 이스라엘을 완전 승리로 이끈 여성이다. 어떤 이들은 야엘이 남편과 친한 시스라를 죽였다는 것, 또 귀에 말뚝을 박아 죽였다는 것 때문에 야엘의 잔인성을 문제 삼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분명 야엘은 끔찍하게 시스라를 죽였다. 그러나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야엘로서는 시스라를 죽일 수 있는 길이 눈에 뜨이는 말뚝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걸 사용한 것이다. 만일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시스라의 손에서 수많은 생명이 무참히 살해되었을 것이고, 시스라가 제거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평화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엘의 말뚝은 잔인하게 보면서 시스라가 가진 칼의 폭력성에는 둔감하다. 마치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이나 돌을 보고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 학생들에게 쏘아대는 최루탄이나 백골단들의 쇠파이프가 갖고 있는 더 큰 폭력성에는 입 다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야엘이 남편과 친밀관계에 있는 적장 시스라를 죽였다는 것은 개인적 관계보다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리가 야엘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안위나 사적 관계보다 민족의 평화와 공적인 관계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엘은 이미 드보라가 전쟁을 지휘하면서 야엘의 역할을 예언했을 정도로 지혜가 뛰어나 여자로 여겨진다. 드보라는 전쟁에 이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야엘을 가장 복받을 여인으로 칭찬한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어난 드보라의 지위 하에 일어난 항전은 드보라와 야엘 두 여성 간의 연대로 승리를 한다.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지휘자로서의 여성과 일상의 삶의 자리에 있는 여성이 어떻게 전쟁을 극복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연결고리를 맺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세 번째 여자는 시스라 같은 경우다.

사사기 528절 이하에 소개되는 이 여성은 시스라의 어머니로 나올 뿐 이름도 없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아들을 기다리며 넋두리한다.

그들이 어찌 약탈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용사마다 한두 처녀를 차지하였을 것이다.

시스라가 약탈한 것은 채색한 옷감,

, 수놓아 채색한 옷감이거나,

약탈한 사람의 목에 걸칠 수놓은 두 벌의 옷감일 것이다.(사사기 5:30)”

 

자식을 전쟁에 보낸 어머니들은 하나 같이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고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당연히 이 본문에서 시스라의 어머니는 비록 자기 아들이 장수라 하더라도 그 아들의 생사에 관심하며 걱정하는 말을 해야 옳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시스라의 어머니는 전장에 나가 아들의 생사 보다 전리품에 더 관심하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시스라의 어머니는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하나도 없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전리품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전쟁으로 죽어 간 사람들이나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피해 등은 전혀 안중에 없다. 전쟁에서 약탈은 당연한 것이고, 승리자가 여자를 성노리개로 취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보상일 뿐, 극히 당연한 것이다. 자국의 이익, 내 자식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상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전쟁으로 인한 참사를 의례 그런 것으로 간주한다. 전시 하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약탈은 인권침해가 아니라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관행일 뿐이다. 자국이 전쟁으로 얻게 될 물질적인 이익 때문에 약한 나라를 침공하고, 그 나라 국민들의 평화를 깨드리는 일을 해도 방조하거나 지지하는 여성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시스라의 어머니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여성은 단지 전쟁에서 무고한 피해자로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여성이 될 것인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아시아에서 행해졌고, 또 행해지고 있는 불의에 대해 아니요! 하며 과감히 나설 수 있는가? 아시아의 평화, 세계 평화를 위해서 드보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고, 야엘처럼 연대의 끈을 이을 수 없는가? 아니면,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전쟁에서의 피해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안주할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3. 정리 기도

 

아모스 524절을 함께 읽고 나서 옆 사람과 손을 잡고 격려의 기도를 한다.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랑과 진실이 만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춥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려는 사람들,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피조물의 고난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사람들,

고통 받는 이들과 자매애를 나누며 평화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정의와 평화, 창조 보전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고,

새 하늘, 새 땅, 새 날을 열어가려는

그대들과 그대들이 모인 공동체 위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영원히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