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성폭력

한국소금 2018. 3. 4. 18:12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성폭력*

한국염

 

 

 

기독교가 여성에게 억압의 종교인가, 해방의 종교인가 하는 물음이 계속되고 있다. 그만큼 기독교 안에 성차별적 요소가 많이 있고 성차별 현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 역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가부장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여성을 부정한 존재로, 열등한 존재로 보면서 여성의 남성에의 종속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은 악의 기원으로 혐오의 대상, 악마의 화신으로 매도되었다. 급기야는 중세기의 4세기에 걸친 마녀 학살이라는 대 학살이 여성을 대상으로 자행되었고, 여성은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남성에게 종속되어 왔는데, 이것이 신의 이름으로, 창조의 질서로, 죄의 댓가로 정당화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여성을 부정한 존재, 혐오의 대상으로 본 시기로서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시기요,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 이후로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을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질서로서 정당화하고 강화했던 시기이다.

. 여성 혐오 사상의 역사와 전개 과정

인류 최초의 공동체는 모계사회였다. 이 모계사회에서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 월경이 신비의 대상으로 외경화 되었다. 그러나 BC 1,000년경부터 모권 중심적 신화체계에서 남성 지배적 신화체계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신화가 남성지배체제적 신화로 바뀌면서부터 여성의 성이 낮은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기독교의 창조설화인 창세기 설화는 그나마 고대 근동종교의 모권 중심적 신화의 자취들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자연종교, 풍요의 여신 종교는 공격의 대상이 될 뿐이고, 인간 창조는 철저히 가부장적 신화의 성격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 창조설화에서 유추하여 기독교 역사는 여성의 열등성을 말해 왔으며, 타락설화를 근거로 여성의 종속 정당성을 부여하였고, 여성을 악의 기원으로 만듦으로 여성을 혐오하고 부정하도록 이끌었다. 레위기의 정결법에 나타난 여성의 생명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금기시하므로 여성의 성 자체를 부정시 하였다.

원래 월경은 생명의 피로서 위험스러울 정도로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여 접근을 못하게 했던 것인데 모권이 문화적으로 억압됨에 따라 그 가치가 신성한 것에서 부정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제 여성의 성 자체가 부정시 되고 터부시 된 채 여성은 가계 계승의 도구로서 재산의 하나로서만 그 가치가 인정될 뿐이었다. 이런 상태가 BC 4세기까지 이어진다. BC 3세기경부터는 여성의 성에 대한 부정상과 열등사상을 표출한 유대 전통이 헬레니즘의 이원론과 결합하면서 여성-육체, 남성-영혼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의해 여성의 억압이 더욱 가중된다.

이제 육체를 가진 여성은 곧 악의 화신으로 취급받는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도식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희랍신화, 에녹서, 희년서, 루벤서 등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음욕적인 여자들과 관계함으로써 더럽혀진다고 기록함으로 여성을 악의 화신으로, 악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부정사상은 예수에 의해 일단 금기가 해제된 듯 보인다. 그러나 초대교회 후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는 부정한 자이며 죄를 이 세계에 가져온 자, 남자를 파멸시킨 유혹자로 인식되었다.

 

교부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여, 당신은 누더기와 상복을 입고 당신 자신이 인류를 타락으로 인도한 자임을 참회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여자여! 당신은 지옥으로 가는 문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된 종교가 된 후 금욕주의가 성행하였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서는 인간이 고행을 통하여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영혼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금욕주의에 기반하여 수도원이 생겨났다. 문제는 육체를 벗어나 영원의 세계에 이른다는 구원관에 앞서 남성은 영혼, 여성은 육체라는 도식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마적인 것인데, 여성은 육적인 존재이니 악마적인 것이 된다. 물론 여성이 구원에 이를 수도 있다. 금욕적인 생활로 동정을 유지하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여성들이 수녀가 되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남성 금욕자와 똑같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적 본능이란 본질적으로 높은 지적 성향과 도덕적 덕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 금욕자들은 남성 금욕자보다 더 많은 제한을 받아야 했다.

금욕주의에 의해 여성들이 얼마나 멸시되었는가 하면 가히 폭력적이었다. 수도원 저자들 가운데는 여자를 배설물과 똥으로 본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남자를 가슴과 어깨가 넓게 만드셨다. 엉덩이가 넓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남자는 지혜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오물이 넘쳐 나오는 곳은 작다. 그러나 여자는 오물이 나오는 길이 넓다. 그래서 여자들은 오물은 많고 지혜는 적게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6세기에 열린 마콘공의회에서는 여자가 과연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에 관해 토론을 했는데 불과 한표 차이로 여성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기독교의 여성 혐오 사상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여성세계(Frau Welt)라는 그림을 보자. 이 상은 스트라스 부르크 대성당에 있는데, 앞에서 보면 우아한 옷을 입고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뒷면에는 온갖 지옥의 파충류들에게 먹히고 있는 추한 육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상은 중세시대에 여성을 육체와 물질, 악의 세계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 중세의 여성 혐오 전승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 그림은 남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는 대상으로 여성을 보게 만든, 여성 혐오와 여성 기피의 전형이다.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적인 금욕주의자들의 태도는 얼핏 병적이기까지 하다. 일부 교부들은 여성의 육체적 형상을 감추어 보려는 생각에서, 여성은 육체가 보이지 않게 헐렁한 옷을 입고 얼굴을 더럽게 하며 추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남성만이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며 여성은 다만 이차적으로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허용되지 않으며, 남편에게 여성이 몸을 거절하는 것은 죄로 간주되었다. 어거스틴은 여자가 남편에게 종속하는 것은 자연질서라고 정의하면서 여성은 남성에 종속적이고 육욕적인 특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육체가 정신에게 복종하듯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어거스틴에 의하면 극히 당연할 일이었다.

여자는 남편과 함께 있을 때만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자가 단독일 경우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단독이든 여자와 하나가 되든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다.”

어거스틴의 경우 부부관계는 하나의 의무일 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호와 비교해서 남편은 아내와 그런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적과의 동침에 해당하는 것이 부부관계다. 성관계는 농부가 자기 밭에 씨를 뿌리는 듯, 오로지 생육을 위해서만 성관계를 해야지 쾌감을 느끼면 죄가 된다. 여기서 여성은 아기 만드는 기계로 이용될 뿐이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여성은 육욕적인 매춘부나 아니면 남편에 종속된 아내이거나,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동정녀 세 그룹으로 인식될 뿐이다. 출산이 여성이 존재하는 유일의 목적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일부다처제도 허용하였다.

. 중세의 마녀 박해

중세에 와서도 여성은 여전히 악마적인 존재요, 열등한 존재로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립된 여성의 열등성에 관한 학설은 중세 전반에 걸쳐 풍미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성의 열등성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적 이론을 인용해서 설명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모든 수태는 남성만을 생산토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우연에 의해 남성 형상이 파괴되어 열등하거나 불안전한 인종인 여성을 생산하게 된다. 이렇게 불안전한 인종인 여성은 자연히 본성 전체가 열등하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피임은 죄다. 왜냐하면 남성 정자의 기능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간음을 죄라고 보는데 남편의 간음은 출산과 자녀교육에 해롭기 때문인 반면, 여자의 간음은 가족 전체를 더럽히기 때문에 남자의 간음보다 죄가 더 크다고 보았다. 결혼이란 번식을 위한 필요악이며 여성은 그 필요악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여성의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필요악의 도구가 되어 남자에게 복종하거나 아니면 동정녀가 되는 것이다. 중세에서는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지배하고 금욕주의 전통이 계속 흐르면서 여성의 삶이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금욕주의를 표방하면서 그 이면에는 성직자들의 타락이 몹시 심했다. 한 예로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사제들의 숫자와 같은 수인1,500명 이상의 창녀들이 모여들었다. 그토록 경건을 부르짖은 중세에 심지어 첩을 두겠다는 맹세를 해야 사제로 모시겠다는 관행도 생겨났다 왜냐하면 사제가 농부들의 아내와 딸을 막론하고 겁탈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1096년부터 200년 이상 자행된 십자군 전쟁시에 기사들은 자기의 부인들은 정조대로 씌워놓고 자신은 남의 유부녀를 유혹해서 사랑놀음을 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기사도란 바로 본처를 희생시키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미화하는 여성 폭력의 한 형태에 불과했다.

기독교사에서 여성 혐오사상이 가장 극에 이른 사건은 중세에 있었던 마녀 학살 사건이다. 이 마녀 학살 사건은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4세기 동안 행해졌다. 100만명의 여자가 마녀라는 이름으로 처형당했다. 이 마녀 박해 사건의 배경에는 흑사병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무리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피해등 사회 경제사적 요인이 있다. 1326년부터 1,500년까지 30-40년씩 3번이나 창궐했던 흑사병의 피해, 200년 이상 계속된 전쟁으로 경제공황 등 경제사적 외적 요인과 함께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 근저에 깔려 일어난 사건이다.

마녀 박해 재판의 기록(Malleus Maleficarum)을 보면 마녀의 속성을 여성의 본성과 동일시 한 것이 드러난다. 여성이라는 말인 페미누스(feminus)라는 말을 페-미누스(fe-minus) , “신앙을 뜻하는 페데스(fedes)없다라는 뜻의 미누스(minus)를 합성시켜 해석, 페미누스(feminus)를 신앙의 결여라고 본 것이다. 즉 여성은 신앙이 결여된 자로서 쉽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마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마녀 박해는 흑사병과 관계가 있다. 흑사병이 돌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퍼뜨려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물약을 사용했다고 보았다. 이 물약에 여자의 월경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술을 할 때는 여자의 월경이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약의 주성분으로 사용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는 사실상 저변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여성혐오주의에 있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에는 여성 혐오주의가 전면에 깔려있다. 왜 여성을 마녀로 보는가 하는 이유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가 홀로 있을 때 그녀는 악을 생각한다. 여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남자보다 훨씬 연약하다. 그들이 마법에 넘어가기 쉽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최초의 여자를 만들 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자는 구부러진 갈빗대로 만들어졌으니, 그 갈빗대는 남자에 대해 반대편으로 구부러진 앞가슴의 갈비뼈다.

여자들은 그들의 지성에 있어서 최초의 경험을 통해 항상 배신의 경험을 지니게 되어 있다. 또한 제2의 경험인 지나친 정열을 통해서 그들은 피를 탐내게 되고 또 마법이나 그 외 다른 방법으로 여러 가지 복수를 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많은 마녀들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자들은 아직 충동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거짓말쟁이이다. 여자들의 걸음걸이를 생각해 보자. 여자의 자세와 버릇을 생각해보자. 여자는 허영 중의 허영이 아닌가여자는 유혹적이고 남몰래 파고드는 적과 같다. 여자들은 그들의 육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살지 않느냐?”

마녀 재판은 도미니크 수도승들이 실시했는데, 이들의 과대망상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이들은 마녀인 여자들이 남성의 성기를 훔쳐가는 버릇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악마와 성교를 한다는 게 전제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고문 방법도 성적 음탕성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악마와 성교를 하면 흔적이 남는데 주로 젖가슴과 음부에 악마가 표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녀로 지목받은 여자의 옷을 모두 벗기고 털이 있는 부분을 모두 면도로 밀고 돌기부를 찾아 뒤졌다. 뿐만 아니라 악마와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국부를 인두로 지지거나 찔렀다. 한번 심판대 앞에 선 여자는 마녀로 낙인 찍혀 죽기 마련이다. 강하게 저항하면 그 저항력 자체가 악마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간주되어 마녀로 처형당한다. 여자를 못에 빠뜨리고 물에 떠오르면 마녀로 보고 가라앉으면 무죄로 보았다. 무죄로 볼 때는 이미 죽은 다음이다. 결국 모두 마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구원자 잔다크도 마녀로 화형받아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능력있는 여자, 혼자사는 여자, 약초를 다룰 줄 아는 여자 등등말대꾸를 하는 사람은 남성권위에 복종을 명하는 사도적 권위를 듣지 않음으로 이단성을 증명했다고 마녀로 몰았다. 마녀로 신고하면 신고자에게 몰수된 재산의 일부를 준다는 조건 때문에 무고가 많아졌고 무작위로 되었다. 어쨌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마녀 사건은 초기에는 중세 유럽의 사회적 공포를 대속할 속죄물로 여성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었는데, 17세기에는 종교전쟁이 마녀 박해와 연계되어 신구교 마귀와의 대결이라는 성격이 되어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마녀로 몰아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 종교개혁과 여성 억압 전통

중세에 이르기까지 자행된 여성 혐오주의와 여성의 열등성 주장은 종교개혁 이후 약간 수정되긴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때처럼 여성 혐오주의나 부정성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하는 것을 신의 질서로 정당화하였다.

마틴 루터는 창조시부터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한 중세신학과는 달리 창조시에는 남성과 여성이 똑같았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 종속하는 것은 이브가 먼저 타락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죄값을 하는, 신성한 심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자는 벽에 박혀 있는 못과 같이 집에서 지내야 한다. 집에서 가정 일을 돌보는 식으로 이브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이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사에 전념하는 것을 심판으로 본 루터는 그러나 결혼과 성생활 그 자체에는 보다 너그러웠다. 그는 중세 금욕적인 성생활을 배격하고 결혼과 성교의 필요성을 자연질서로 보았다. 특히 결혼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성생활의 경우 남자나 여자나 혼외 정사를 통해서 자연의 욕구를 충족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 사전에 서로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성적으로 불능인 남편은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의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혼외 정사를 통한 욕구충족은 실제적으로 남성에게 혼외 정사의 길을 터놓았을 뿐 여성에게는 사회적 법률제도 때문에 시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칼빈 역시 여성의 종속과 가사를 하나님의 질서로 보았다. 그러나 루터처럼 심판의 표시가 아니라 창조질서 때문이라고 강조했지만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 칼빈은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고 본다. 그러나 남자는 흙으로 만들어졌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으므로 남자는 여자보다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인데, 이는 여성의 열등성 때문은 아니고 어떤 사람은 지배하고, 어떤 사람은 지배받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인데 남자가 지배하고 여자가 지배를 받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결혼안에서의 부부관계만 인정했다. 칼빈은 남녀의 공고한 결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처럼 남성이 여성 위에 있는 결합을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여성이 남성의 지배를 못 견디는 것은 신의 질서를 깨뜨리고 원죄를 범한 이후 남녀 결합관계에 혼란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할 것을 권고한다. 설령 매를 맞더라도 참고 견디라고 한다.

우리는 난폭한 남편을 둔 여인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남편이 때리고 어떤 절박한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녀가 고통을 이겨내도록 권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녀의 짐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인내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남편에게 신실한 아내가 되도록 권고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은 직업 대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사노동에 전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봉사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여성을 직업에서 소외시킴은 물론 남녀의 성적 분업과 남성 중심의 가족관계를 하나님의 질서라고 봄으로 개신교의 가부장제 윤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곧 사회윤리가 되어 전 유럽을 풍미했다. 일부 청교도 좌파와 퀘이커교등 소종파 집단을 제외하고 모든 교회에서 여성의 종속성과 직업윤리가 채택되었다. 비록 여성들이 산업현장에서 노동을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여성의 본연적인 일이 아니므로 과외 일로 치부되었고 여성은 가사노동에 예속되어야 했다. 더욱이 죤 넉스는 여성의 공적활동 금지를 주장,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막았다. 여성이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았다. 여성은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에 남편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여성들이 참정권 운동을 일으켰을 때 교회성직자들이 이들 여성운동가를 마귀의 집단으로 부른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이러한 반여성적 전통은 바르트와 본훼퍼에 까지 영향을 미쳐 이들도 남성에의 여성의 종속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였다. 결국 로마교회로부터 개개인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준 큰 공헌을 한 종교개혁은 만인사제라는 혁명적 구호와는 모순되게 성차별적 전통을 물려주었으며, 이 성차별적 질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개신교가 여성의 남성에의 종속성을 하나님의 질서로 강화하는 동안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여성 혐오사상을 유지해 왔다. 1917년 제정된 가톨릭의 경전법은 사제가 여자를 옆자리에 태우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특히 월경 중의 여자는 성찬을 받을 수 없고 교회에 가서는 안 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세례도 남자 다음에만 받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기독교 전통, 기독교 역사에 얼마나 성차별적 요소가 강한지 알아보았다. 결국 처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기독교 역사는 가부장적 역사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감없이 가해왔다. 이러한 기독교 역사를 보면서 메리 델리가 탈 기독교 선언을 한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여성 억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온 기독교 역사를 보면서 분노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여성의 성을 악의 근원으로 보면서 여성의 몸을 학대해 온 기독교 역사, 이 역사와 우리는 어떻게 마주서야 하는가?

 

* 이 글은 1992년 11월 6일 제'기독교와 성폭력'이라는 주제로 열린  10차 한국여성신학정립협의회에서 발제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