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환경과 여성

한국소금 2018. 4. 4. 15:45

환경과 여성

 

1. 기장여신도회는 70년대 말부터 생명문화 창조운동을 벌여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죽임이 아니라 생명의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는 기치 아래서 시작한 운동이다. 이 운동을 시작한 처음 그 당시는 이 땅에서 환경운동이 발돋음하기 시작한 때였고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은 때였다. 그래서 여신도회가 벌이는 생명문화라는 말이 생소하다 보니까 운동을 해야 하는 당사자인 여신도들도 그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렵게만 생각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김지하 시인이 생명운동이란 말을 쓰니까 새롭고 놀라운 것이 나왔다고 세상이 호들갑을 떨었다. 여성들이 하는 것은 아무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도 침묵당하고 남자들이 한마디하면 그게 세상을 구원할 가치로 인정을 받았다. 우리 교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신도회가 10년 이상운동을 벌일 때는 침묵하다가 세상이 생명운동을 하니까 그때서야 여신도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같이 캠페인을 하기에 이른다. 여신도회가 생명문화 창조운동을 시작하면서 내건 슬로건이 모두가 함께 사는 사회 건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운동도 여자가 하는 것은 사회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남자가 하니까 사회적인 운동이 되는 그런 세계에 우리가 살아왔다. 이런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가부장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죽임의 문화와 살림으로 대표되는 여성적 세계관은 대립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죽임의 문화가 촉진된 것은 개발논리가 자리잡으면서부터다. 이 개발이 시작될 때 프랜시스 베이컨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듯,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탐구해야 한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듯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가치관과 세계에서 자연과 여성의 억압은 축을 같이 하고 있다. 서양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형성 돠었는데 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사회는 신/인간 영혼(정신)/육체, 남자/여자, 인간/자연으로 구분되고 오늘 쪽에 있는 것은 우월하고, 왼쪽에 있는 것은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어 우월한 것이 열등한 것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남자는 영혼이나 정신의 세계, 여성은 자연과 육제와 동일시되었다. 영혼을 가진 남자가 육체를 가진 여자를, 힘 가진 인간이 힘없는 자연을 지배한 결과 우리 사회는 죽임의 그늘로 뒤덮여져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힘의 논리에 의해 여성과 자연이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자연에 폭력을 가하는 공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가 여성과 함께 하는 에큐메니칼 10을 마감하면서 2001년부터 202010년을 폭력극복을 위한 에큐메니칼 10으로 선언하고 폭력극복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세계의 교회로 하여금 이 캠페인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이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시작하는 예배에서 힘의 사회에서 소외를 불러오는, 폭력이 나타나는 양상에 대해 말하면서 불의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들의 탄원을 들어야 한다고 , 폭력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가 이 폭력의 공범(공모자)이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가 폭력극복의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징표(표적)를 갖게 된다고 한다고 말한다.

오늘 우리가 폭력극복과 관련한 환경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넓은 의미에서 이 우주에서의 모든 사안이 다 환경에 대한 것이다.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이라는 주제들이나, 국가와 인종, , 경제, 정치, 문화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환경에 관련된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내건 폭력극복들의 현안에서 환경에 관한 것으로는 피조물에 대한 폭력이 있다. 교회협의회는 이 피조물에 대한 폭력을 말하면서 이렇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탐욕적인 개발과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행동들을 주여 용서하소서.”라고.

 

3. 젖과 꿀이 흐르는 공동체의 원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전통적으로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을 말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그런데 엘리지베스 몰트만 벤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책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여성문화의 가치기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젖이란 여성성의 표징으로서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과 관계가 있다. 젖은 생명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며 자양분이다. 낳고 기르는 모성성의 상징이다. 꿀은 어떤가? 이 꿀은 여왕벌과 일벌에게서 얻어진다. 벌들의 조직 사회는 여성공동체다. 이 여성조직인 꿀벌 사회에서는 자기 꿀을 훔치러 오는 이들에 대한 방어만 있을 뿐이지 침범하기 위한 선제공격이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공동체에게 필요한 꿀을 채취하는 순간에도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옮겨주는 꿀벌처럼 자기 공동체의 이익에만 급급하지 않고 다른 공동체도 생각하는 공생의 관계를 이룬다. 꿀은 힘을 돋게 하고 병을 고치고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 이는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감쌈은 물론 썩어져 가는 사회를 썩지 않게 지키는 여성성의 상징이다 이렇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표상은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의 표상이다. 생명을 먹이고 보호하고 감싸는 모성적인 원리, 작은 생명이라도 보호하고 다른 공동체와 공생관계를 누리며 평화를 위해 애쓰는 여성적인 원리가 흐르는 곳에는 폭력이 설 자리가 없다. 모성적인, 여성적인 원리에 의해 사는 사람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하는 삶을 산다. 이윤추구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을 산다.

 

4. 존재하는 삶의 양식과 소유하는 삶의 양식

에리히 프롬은 인간에게는 두가지 삶의 양식이 있는데, 하나는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이라고 한다. 소유양식은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최대이윤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자 곧 가부장제의 사람의 양식이다. 칼 맑스는 이를 비판하면서 우리의 목표는 풍성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존재양식은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갈망하지 않으면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생존양식이다. 이런 생존양식은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가치관이 흐르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뚫린 오존층,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녹고 있는 빙하, 그로 인한 지구온도의 변화 등 인간이 대처하기에 엄청 버겁다. 이 모두가 인간이 탐욕으로 자연에 가한 폭력의 결과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찬데 우리 앞에는 더 큰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바로 생명과학 발전 문제다. 생명공학의 세기라고 하는 21세기! 유전자 연구를 통해 불치병을 치료하고, 아기 못낳는 사람들에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구세주로 환영받는 생명공학의 발달은 복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편리함과 유용함 속에서 수반되는 부작용은 없는가?

우리 식탁을 위협하고 있는 유전자 조작 식품, 무기화 될 수 있는 유전자 조작 종자에 대한 우려, 생명복제와 배아연구 등에 대해 생명의 존엄성 훼손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다. 생명윤리학자들은 유전자 조작에 의한 정체성의 문제, 유전자를 갖고 있거나 사고 파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계층화의 유발과 자본에 의한 이익의 불평등한 분배, 생명을 도구화하고 상품화하는 문제, 복제과정에서 생기는 연구대상이 치루어야 하는 고통의 문제, 자본이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고 폭력의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서 이제는 복제인간의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상품가치가 있는 생명들은 하늘이나 땅, 바다 등 자연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고 유전자 공장에서 만들어 질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는데,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공장에서 만들어지며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지원을 받고 있는 유전자 회사에 속하게 되는 날이 온다. 생명공학발전에 대해 일각에서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지적도 있지만 이 틈을 타서 지구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라엘리언이라는 신흥종교가 클로네이드사라는 생명과학회사를 만들어 복제인간에 성공했다고 물의를 빚고 있다. 이러한 생명과학 발전 앞에서 한국기독교는 속수무책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우리의 교단 본부에 해당하는 주교회의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전 교회 캠페인으로 내닫고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 갖고 올 후유증, 복제인간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의 후유증이나 그 과정에서 무참히 살육당하는 짐승들의 고통에 대해, 생명과학 기술이 갖고 올 가공할 폭력에 대해서도 아무런 소리가 없다. 여성이 복제인간의 산실로서 대리모로 이용당하고, 여성의 난자가 도구로서 이용당함은 물론 사고 팔리는 현실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 관심 갖는 것은 여신도들에게 너무 벅찬 주제이고 버거운가? 그러나 곧 코 앞에 닥쳐 올 재난들이다. 주제가 어렵더라도 한번 생각해보자.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복제인간이 만들어졌다. 그는 나인가, 아닌가? 복제인간은 사람인가 아니가? 영혼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그대로 우리는 복제를 해야 하나?

함께 의논해보자.


1.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탐욕적인 개발과 그 결과

  2. 환경에 대한 폭력의 공모자로서의 우리

3. 폭력극복의 삶을 사는 표적


* 이 글은 2003년 1월 기장여신도회 실행위원회 교육시에 한 발제원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