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여성 평화통일운동 성찰과 전망
한국염/전 여성평등위원장
1. 들어가는 말
해방 후 남북 분단 상황에서 한국교회여성들은 전쟁난민으로서, 아니면 이념갈등으로 인한 적개심의 담 내지는 이산가족의 한을 안고 사는 전쟁피해자로서 살거나 아니면 민족분단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구제활동을 벌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한국교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지만, 그 통일염원은 정부에서 주입하는 대로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북진통일 후 이북에 교회를 건설하여 북한을 기독교화하는 것에 몰입되었고, 교회여성들도 자연히 이 선상에서 통일문제를 바라보았던 듯하다.
그러한 한국교회에서 통일에 대한 논의, 오늘날 우리가 통일운동이라고 부르는 ‘평화통일이라는 관점’에서 통일논의를 시작하게 된 것은 80년대에 접어들어서라고 볼 수 있다. 1972년 7월 4일 남의 이후락과 북의 김영주가 남북관계개선을 위하여 서울과 평양을 상호방문하고 상부의 뜻을 받들어 조국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을 하고 조국통일에 대한 원칙들을 합의, 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합의한 원칙은 <자주의 원칙, 평화의 원칙, 민족 대단결의 원칙>이다. 이 74남북성명 발표 이래, 당국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이 3대 원칙, 즉 ‘사상과 이념과 제도를 초월한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 통일운동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통일문제는 남한과 북한 당국, 민간단체의 세 범주에서 논의되었다. 민간단체의 범주에 속해 있는 교회는 여전히 반공을 기반으로 한 보수적 통일을 말하는 입장과 3대 원칙 입장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전자를 “흡수통일노선”이라 한다면, 후자를 “평화통일운동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교회여성들은 여성으로서 독자 노선을 걷기 보다는 자기 교단의 노선에 따라 움직여왔고, 이러한 행태는 일각에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발제자는 기독여성들의 평화통일운동을 개괄하는데 있어서 3기로 분류하고 그 분류에 따라 살펴보겠다. 제 1기는 1988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의 평화통일희년을 선포와 관련된 <기독여성통일희년운동>시기요, 2기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기독여성의 통일운동이 지원을 중심한 평화운동으로 나가게 된 시기요, 제3기는 2000년부터 2017년까지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 <615 선언실천을 위한 통일운동>시기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80년대부터 민족과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전개한 통일운동의 선상에서 기독여성들이 어떻게 운동해왔으며, 한계가 무엇인지, 향우 과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기독여성의 평화통일운동을 주도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양성평등위원회(이하 양성위)와 이 위원회에 전문위원 자격으로 참가하고 있는 단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왜냐하면 양성평등위원회에 포진하고 있는 이 단체들이 실질적으로 기독여성평화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우선 기독여성통일운동의 경과를 개괄하고 나서 다음으로 여성통일운동에 대한 성찰과 과제, 전망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Ⅱ. 기독여성통일운동의 경과
1. 생명의 담지자로서 기독여성, 평화통일희년운동에 서다(1980-1995).
1) 기독여성통일운동의 배경으로서 교회협과 세계교회의 노력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통일 없이 민주 없다.”는 통일인식을 태동시켰고, 당국의 용공박해를 피하기 위해 “선민주, 후통일”론을 내걸었던 교회협도 ‘민주-통일-평화’를 동일 선상에 놓은 평화통일운동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교회협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한반도 통일문제를 아시아의 평화문제로 다룰 것을 제안, 1981년 6월 서울에서 한독교회협의회가 처음 열렸고, 이 회의 결과로 1982년 교회협의회 내에 통일문제를 다룰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84년 세계교회협의회 국제관계위원회(WCC-CCIA)는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 도잔소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를 개최했다. 이 협의회를 통해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동북아 평화의 문제와 직결된 문제임이 각인되었고, “평화와 통일은 교회의 선교적 과제“라는 대명제가 설정, 평화와 통일문제가 이념문제가 아닌, 교회의 선교과제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6년 9월 2일 세계교회협의회 주선으로 스위스 글리온에서 분단 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교회 대표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제1차 글리온 남북기독자협의회가 성사되었다. 이 대회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 5명과 KNCC대표 6명이 참여하였는데,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교회간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이 글리온 대회에 북에서는 여성이 참여했으나 남에서는 여성이 참여되지 못했고, 2차에 가서야 여성참여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1988년 2월 29일 연동교회에서 열린 교회협 제37회 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선언”을 발표, 민족분단의 고통을 평화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천명하고 분단 50년이 되는 1995년을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선포하였다. 모든 것이 자기 원래의 자리로 회복한다는 희년의 뜻으로 분단 50년을 ‘하나됨’으로 돌아가는 통일 원년으로 삼자는 취지였다. 이어 1988년 4월 25-26일에 교회협은 세계교회협과 아시아교회협의 협력을 얻어 인천에서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협의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 세계에서 300여명이 참가하여 한반도통일문제를 세계교회의 이슈로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 교회협의 88선언은 그해 11월에 열린 제2차 글리온회의에서 남북한 교회가 함께 통일희년운동을 함께 전개해나가기로 합의, 통일희년운동은 남북교회의 공동과제가 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교회협의 통일운동은 한국 평화통일운동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남북종교간의 교류에, 민간만남의 물꼬를 텃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교회협의 통일운동을 배경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교회협의 통일운동이 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에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2)한국기독여성들의 평화통일운동 태동
교회협의 통일운동은 한국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기독여성 통일운동의 산실이 된 것은 교회협이지만, 탯줄을 끊어 준 것은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이후 여신협)다. 1980년 여신학자협의회가 창립되었는데, 이때 창립기념세미나에서 초대회장인 박순경박사가 ‘신학과 여성’이란 주제강연을 통해서 ‘민족의 통일 없이 여성해방은 일어나자 않는다, 민족의 분단을 지속시키는 강대세력으로부터 민족의 해방과 여성해방의 과제를 짊어져야 한다, “여신학자들이 민족문제와 결부된 신학을 해야 하며, 특히 통일을 위해 일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특히 도잔소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 세미나와 ‘민족, 민중, 민주’라는 삼민주의 영향을 받은 한국여성운동의 자극을 받아 1986년 여신학자협의회 제3차 협의회에서 현장신학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민족문제로 통일문제가 다시금 거론되었고, 그해 6월 분단문제 세미나를 교회 여성 최초로 실시하게 된다. 이 세미나 후 ‘통일문제 신학화작업반’이 결성되게 된다. 이 작업반에서 분단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그것이 여성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87년 “한국여성신학과 민족통일‘이라는 주제로 4차 정립협의회를 열었고, 통일신학과작업반의 결과물과 4차정립협의회의 결과물을 모아 ”한국여성신학과 민족통일“이라는 자료집이 출판되었다. 아무튼 이 4차 협의회 이후 여신협이 어떤 일을 하든지 통일이라는 주제와 결부시켜 논의하였다. 하다못해 생태문제와 환경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도 통일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여신협의 이 통일논의는 기독여성운동에 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주었으며, 기독여성의 통일모임에 예배모델을 제시해주었다.
한편 1979년부터 생명문화창조운동을 전개해 온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는 1984년 “생명, 평화, 정의”를 주제로 논의를 한 결과 생명운동의 방향을 평화운동, 통일운동으로 전개시키기로 결정하고, 민족통일과 평화를 위한 생명운동의 전개야 말로 이 시대 주요선교과제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민족적 모성애 전개(남북긴장관계 완화를 위한 공동캠페인), 범여성공동운동전개, 국제적 차원에서의 운동을 전개키로 했는데, 이때 이미 핵보유국에 살인무기 사용하지 말자는 호소를 하기로 하였다. 이 협의회에서 “평화․통일운동의 확산과 이 땅 어머니들의 동참을 위해 ‘한국의 어머니에게 아룁니다.”하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이 메시지의 주요내용은 ’전쟁을 만류하고 기장을 완화하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남북한의 어머니가 마음을 모아 통일조국의 번영을 위해 민족의 어머니로 살아가자“는 호소였다. 이 정책협의회를 기점으로 기장여신도회 차원의 통일문제 강연과 평화기도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전국지회가 월 1일 당번제로 24시간 365일동안 쉬지않고 기도하는 평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기도운동은 1984년 결성된 한국기독교10주년 여성사업추진위원회의 사업으로 채택되어 이 협의회에 가담된 21개 조직의 기도운동으로 번져나가기도 했다. 1989년 교단으로는 처음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평화통일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3) 한국기독여성통일운동의 이정표가 된 여신학자 선언과 여성협의회 선언의 영향
(1)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한국 여신학자선언
1988년은 한국 기독교통일운동에서 한 획을 긋는 해였다. 1988년 2월 29일 교회협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응하여 한국여신학자들은 1988년 3월 30일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여신학자선언”을 발표하면서 6개항의 실천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여신학자선언서는 분단을 단순히 외세의 지배만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분단을 가부장적 지배문화의 결과로 규정하고, 분단의 가장 큰 희생자인 민중여성이 통일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실천과제로서 1) 분단으로 인한 갈등구조와 고통의 원인을 연구하고 규명하며 고난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사례를 모아서 신학화하여 남북한 여성들의 공감대를 형성 확산할 일. 2) 각 교단과 기독교 여성단체에 <평화통일 연구위원회> 신설하여 통일교육에 나설 일. 3) 교회제도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하여 언론매개체와 교회교육교재를 통하여 의식화할 일. 4) 북한에 대한 무지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자료를 수집, 공개함으로써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올바른 인식에로 전환될 수 있도록 노력할 일. 5) 북한 기독여성들과의 여성차원의 만남을 실시할 일. 6) 한반도 평화는 세계평화를 위한 열쇠이므로 한반도 비핵화와 온 세계 핵무기의 폐기를 위하여 세계적인 평화 운동과 연대할 일. 등이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분단이 가부장적 지배의 결과라는 엄청난 선언이었음에도, 가부장적인 한국교회 풍토에서 이 선언은 남성들에게는 전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기독교통일운동사에서 제대로 언급도 되지 않았다.
(2)’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협의회를 위한 여성협의회 선언“
같은 해 교회협은 세계교회협과 함께 4월 25-26일 인천 송도에서 ’세계기독교평화협의회‘ 를 이틀 전에 개최하였다. 이때 기독여성들은 이 협의회 직전(88.4. 24-24)에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협의회를 위한 여성협의회“를 열었다. 이 협의회에 세계 17개국에서 온 여성들 114명이 참석하였다. 이 협의회에서 ”세계기독교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성협의회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는 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과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발표한 ”한국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선언문“을 지지하면서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단구조를 규명하고, 한국교회가 여성의 삶을 억압해 온 가부장제에 대한 죄책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 평화와 화해의 과업에 여성들이 가진 생명과 생명보전에 대한 결단은 모두에게 풍요로운 삶을 줄수 있다는 비전을 선포하고, 통일을 위한 세가지 행동을 결의하였다. 이 선언은 한국기독여성운동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선언서에서 기독여성의 통일과제로 제기된 3가지 실천과제는 사실상 향후 기독여성통일운동의 이정표가 되었다. 여기서 결단된 3가지 활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적 행사로 통일에 대한 그룹 연구를 구성할 것,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 온 한국여성들의 사례를 수집하여 함께 나누어 읽을 것, 평화에 대한 여성들의 비전을 담은 시, 노래, 연극, 사진전 등을 작성하여 한국과 외국에 보급할 것, 평화와 통일을 위한 토론에 타종교의 여성들과 젊은 여성들을 대폭적으로 참여시킬 것, 금년 부활절을 기해 시작된 “기독여성 10년‘ 기간 동안에 한국의 통일문제를 적극 강조할 것, 교회여성들에게 성서적 입장에서 본 통일문제를 교육시키고, 1995년 희념에 앞서 1년 동안 철저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할 것, 1988년 올림픽에 참여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한국의 분단상황과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정보를 준비할 것 등이 결의되었다.
둘째 특별행사로는 북한의 백두산부터 남한의 한라산까지 닿을 수 있는 ”평화리본“을 만들 것, 1988부터 1995까지 매년 국제적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주일“을 정여 지킬 것, 한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문을 작성하여 세계기도일 국제위원회에 보낼 것과 교회여성들이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설정하여 지킬 것이 결의되었다.
셋째 결의안은 남북의 만남에 대한 것으로서, 초교파 교회기구 또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도움을 받아 제3국에서 북한과 남한의 여성들의 만남을 가질 것, 통일을 위한 모든 국제에큐메니칼 협의회에 한국여성들을 참여시킬 것, 추석과 같은 명절에 남북한 여성들이 같이 할 수 있는 문화적 행사를 거행할 것, 등이다. 이 여성협의회에 성만찬에 색동스카프가 사용되었고, 이후 색동스카프는 통일희년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3) 기독여성 10년과 통일운동
88년은 통일운동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여성운동에도 중요한 해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88년부터 1997년까지 향후 10년간을 “여성과 함께 하는 에큐메니칼 10년”으로 선포하고 교회에서의 여성참여 증진, 정의화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여성의 공헌을 인정하고 가시회하는 일, 여성의 영성으로 신학하기“라는 교회의 여성과 연대하는 3대 과제를 설정하였다. 한국의 기독여성들은 교회협 여성위원회를 중심으로 이해 부활절을 기해 ‘기독여성10년’을 선포하고 기독여성10년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여성들은 기독여성 10년을 선포하면서 선언문을 통해 ”모국을 남북으로 가로막은 분단의 바윗돌을 옮기겠다, 평화의 사도가 되어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분단과 증오와 전쟁과 공포의 바윗돌을 제거하고 극복해 나갈 것“을 천명했다.
이때 한국교회 통일운동의 구심점이 교회협이었고, 여기에 ‘기독여성10년운동’의 한국 거점역할을 교회협여성위원회가 맡다보니 통일운동 역시 교회협 여성위원회로 결집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협 여성위원회에 전문위원 자격으로 여신협, 교회여성연합회, 아시아여성교육원, 기독여민회, 여신협, 여성교회 그리고 교단 여교역자회 대표 등이 참여하다보니 명실공히 기독여성 통일운동을 아우르는 조직이 되었다. 여기에 1989년 기독여성평화연구원이 설립되면서 평화통일논의에 힘을 실리게 되었다. 앞의 여성협의회 선언서에 각 그룹이 통일연구를 전개한다는 과제가 들어 있듯이 교회협 여성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는 각 기관에서 통일연구와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회협 여성위원회, 교회여성연합회, 기장여신도회는 통일선언과 세계평화협의회 후 전국을 대상으로 ‘한반도 통일과 교회여성 세미나’를 지역투어로 진행하였고, 여신협과 기여평이 통일에 대한 이론적 작업을, 기독여민회는 일반여성단체들과 함께 기독여성의 통일운동을 저변화하는 일을 하는 등, 각자 역할분담을 해 통일에 대한 여성들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가 선포한 1988년부터 시작된 “여성과 함께 하는 교회를 위한 기독여성 10년‘ 캠페인에 한반도 통일운동을 위한 활동을 사업계획에 넣었고, 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는 평화통일기도리본잇기의 본부로서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한편 통일희년을 교회여성들에게 저변화하기 위하여 기쁨의 해를 준비하는 여성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눈여겨 볼 것은 여성위원회의 ’기쁨의 해를 준비하는 여성”이라는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1989년 기장여신도회에서 ‘통일과 여성“이라는 통일교재가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여성협의회가 열린 한달 후 교회여성연합회는 “평화통일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 11월 30대 ’교회여성지도자 세미나‘에서 통일과 교회여성의 과제를 주제로 다루고 각 회원교단의 공동과제를 모색하였으며, 그해 12월 『민족통일과 교회여성』이라는 제목으로 통일교재를 발간하였다. 89년에는 통일운동의 비장확산을 위해 ”교회여성과 통일“이라는 주제로 대중강연회를 열었다.
이 시기 기독여성 통일운동은 단순히 통일에 대한 의지를 키우는 일 뿐만 아니라 실천운동도 함께 진행되었다. 분단 40년이 되는 90년 4월 ‘평화․군축을 위한 정책협의회“를 개최하고 방위비 삭감을 통한 긴장완화와 평화증진운동 벌이기도 했다.
(4)남북기독여성들 만나기 시작하다.
① 글리온에서의 만남 : 1989년부터 해외에서 남북교회여성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해 11월 23-25일 스위스 글리온 제2차회의에 남한에서 교회여성연합회 총무인 윤영애총무와 이효재선생이, 북에서는 이문영, 김혜숙씨가 참석, 최초로 남북한 교회여성만남이 이루어졌으며, 남한의 교회여성들이 북한의 교회여성들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들로부터 북에 교인수가 만명에 달한다는 정보를 얻기도 했다. 이렇게 글리온에서 북의 기독교지도자들을 만나고 온 후 교회여성연합회는 세계기도일헌금을 북한교회를 위해 사용키로 하고 1990년 일본 교회협을 통해 북한교회에 종교서적을 전달하였다.
② 1991년 7월 9-12일 일본 도꾜에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가 개최되어 교회여성연합회와 교회협 여성대표들이 참여, “조국 해외기독교여성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남북교회의 만남에 남한교회의 여성지도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1988년 여성협의회의 성면서에서 강조된 바, ”통일을 위한 모든 국제 에큐메니칼협의회에 여성들을 참여시킬 것“이라는 사항이 교회협에 건의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발제한 ’기독교와 통일운동의 전망‘이라는 강연에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접근”을 시도한 탓으로 귀국 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고, 여신협을 중심으로 해서 14개 기독여성단위들이 모여 ‘박순경교수 석방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기도회를 여는 등,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 박교수가 석방되어 기독여성들의 통일에 대한 결집과 열망의 결실을 보여준 한 예가 되기도 했다.
③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 해외에서 남북교회여성들의 만남이 가시화되기 즈음하여 1991년 11월 서울에서 분단이후 최초로 민간차원에서의 남북여성만남이 이루어졌다.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라는 이름으로 11월 25-27일 서울 라마다올림피아호텔에서 역사적 남북여성만남의 자리가 성사되었다. 북에서 여연구 대표외 5인, 일본과 재일한국인 여성대표, 한국대표 해서 모두 300여명이 참여했는데, 서로의 입장차이가 매우 컷고, 북쪽 참가자들이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있음도 알 수 있었지만 이 자리에 많은 기독여성들이 참가하여 통일의 의지를 확인했다. 특히 북한 대표로 온 최옥희전도사가 찬송가를 4절까지 불러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자리에 참여한 기독여성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같은 기독인으로서의 공감대를 키우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당국의 과잉보호와 방공집단들의 항의로 북측 대표단이 일정을 마치기 전에 일찍 돌아가서 아쉬움을 남겼으나 남북여성교류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비용을 민간 여성의 힘으로 충당했다는 점에서 통일에서 여성의 역할을 가늠할 수 있는, 뜻 깊은 만남이었다.
(5)정의,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와 기독여성통일운동
이렇게 통일희년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통일운동을 평화와 생명의 관점으로 확대하게 된 큰 국제회의가 한국에서 개최되었다. “정의와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세계 대회다(JPIC대회). 이 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된 배경 역시 한반도의 평화가 동북아평화와 직결되어 있다는 지정학적 관점, 개발도상국에서 개발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중의 개발정의와 생태계 파괴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부각되는 곳이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이 JPIC 대회를 통해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 희년이라는 이정표의 문제는 다시금 세계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기독여성들 역시 이 대회에 참석해서 기독여성 10년과 연결하여 희년의 구체적 실천과제로서 JPIC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JPIC대회를 통해 여성문제가 단순히 여성문제가 아니라 정의, 평화, 생명 전반에 걸친 문제임이 직시되었고, 생명의 담지자로서 여성의 역할과 가능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대회에 제시된 사례들의 경우 대다수가 여성들의 사례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JPIC대회가 참여한 기독여성들에게는 많은 영감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교회에서 여성들을 위한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자리가 되지 못했다.
(6)희년세미나를 통한 대안연구와 교회여성대회
한편 이 시기에 주목할 것은 교회여성들간에 희년세미나가 공동으로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희년세미나의 목적은 교회여성들이 희년운동을 전개해가기 위한 것이었다. 88선언에서 95년을 통일희년의 해로 선언한다는 선포에 따라 기독여성들도 이를 위해 준비에 나선다. 1991년부터 교회협 여성위에 참가하고 있는 큰 단위인 교회협 여성위, 교회여성연합회, 여신학자협의회, 여교역자연합 4자가 주관하에 ‘95통일희년교회여성정책협의회가 워크숍형태로 진행하면서 교회여성들이 바라는 통일상, 희년상에 대한 대안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제시된 과제로는 교회개혁운동, 군축반핵운동, 경제정의운동, 민주화운동, 환경운동, 희년축제예배의식 등이 토의되었다. 희년을 2년 앞 둔 1993년 8월 11일에는 한국교회여성들의 희년운동을 저변화시키고 그간의 희년운동을 평가하기 위하여 ’평화통일희년을 향한 교회여성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를 통해 희년운동의 저변화와 새로운 실천과제를 발굴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중요한 문서 하나가 발표된다. 그것은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남북고위회담에서 발표된 것이다. 이 합의서가 이행자체가 한반도 평화실현에 큰 열쇠가 되는 그런 합의서였다. 이 합의서 발표 후 남북 사이에 교류가 촉진되기 시작했다.
(7)‘95희년을 향한 기독교평화통일협의회 사전 ’여성포럼‘
한편 1991년부터 교회협은 해마다 ‘95희년을 향한 기독교평화통일협의회’를 개최하였다. 여성들은 이 대회에 여성들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매회 사전에 여성포럼을 개최하였다. 이 여성포럼에서 “교회협에서 진행하고 있는 통일운동은 여성을 배제한 운동이라 진정한 희년맞이가 될 수 없다, 희년개념에 한국교회의 가부장적 모습에 대한 반성과 교회민주화실현을 넣어야 한다, 여성을 동원의 대상으로 삼지말고 실질적인 통일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등의 목소리가 나왔고, 이 소리를 가감없이 교회협 통일협의회에 전달하였다. 여성들이 작심하고 의견을 제시한 덕에 이후 교회협 통일운동에 여성들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되었다. 이후 매회 여성포럼을 미리 해서 협의회에 상정할 문서초안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을 여성적 시각에서 검토하고 전략을 짜는 의미있는 자리였다.
(8)‘95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 발족
1993년에는 ‘평화통일희년을 향한 교회여성대회’를 하였다. 이 대회에서 발표된 결의문을 보면 희년통일에 희망사항으로 교회안에서의 남녀평등실현,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과 함께 하기를 희망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여성들의 희년운동을 저변화시키고 그간의 희년운동을 평가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1994년에는 기독여성운동정책협의회를 실시했는데, ‘95통일희년을 1년 앞두고 교회여성의 실천과제를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이 협의회에서 희년의 해에 할 구제적인 사업들이 제시되었고,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교회여성들의 희년기구발족이 제안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95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다.
희년을 일년 앞 둔 기독여성들은 ‘기독여성운동정립협의회’ 시의 결의에 따라 1994년 8월 10일 동대문감리교회에서 ‘95 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를 발족한다. 1994년부터 95년 12월 30일까지 기간으로 삼았다. 주제는 “새 날을 낳으리라‘라는 주제하에 민족통일운동과 희년정신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함 목적에서였다. 이 협의회는 교단과 기관을 망라 22단체가 참여하였고, 비 교회협가맹교단여성들도 참여하였다. 김희원(교회협여성위원장), 나선정(전한국기독교100주년여성위원회총무자격), 전병희(교회여성연합회회장)가 상임대표였다. 희년음악회, 희년전국대회, 희년교회여성선언, 여성통일법정, 통일띠잇기 등을 진행하였다. 대회에는 600여명이 모였다. 사업으로 통일희년강사교육, 통일희년안내 소책자 발간, 교회여성설문조사를 통한 교회여성민주화보고대회, 지역별 협의회 조직과 교육, 희년통일의지와 실천을 나눌 축제의 장 마련, 신명난 춤판이 어우러진 통일마라톤대회였다. 유감스럽게도 남북해외교회여성만남의 광장은 북측의 참여 불허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측과 해외동포대표간의 만남으로만 이루어졌다. 평화통일리본잔치위원회에서는 6년동안의 통일을 기원하며 각국에서 모은 리본을 대형걸개그림을 만들었다. ,글자그대로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어질 만큼 모아졌는데, 그 모은 리본을 다 전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교회협 95통일희년협의회 축제 때도 사용하였다. . 나눔실천위원회에서는 사랑의 복음성가 대축제를 창천감리교회에서 개최, 50명의 한부모가정 위기 청소년들을 희한 희년장학금을 수여하였다. 모일 때마다 박순경박사가 작사한 1995년 통일희년을 위한 교회여성들의 기도를 드리면서 희년의 정신과 내용과 꿈을 꾸었다.
이렇게 ‘95통일희년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92년에는 한국군의 평화유지군파병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1994년에는 미국이 한국군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려 하자 교회협여성위원회, 교회여성연합회, 기독여민회, 여신협, 기여평등은 “한반도평화정착을 바라는 여성연대를 결성”, “우리 여성들은 민족생존 위협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를 반대합니다.”하는 성명서를 내고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 통일희년운동에서 평화연대운동으로
95통일희년운동은 분단극복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 희년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을 준비하면서 맛본 기쁨은 참여한 이들에게 통일희년을 살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그런 운동이었다. ‘95년이 지나도 분단이 극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으나 교회협을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의 진보적 통일운동은 분단극복과 통일의 문제가 평화와 직결되는 것이며, 통일을 위한 노력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신앙고백과 아울러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임을 부각시켜 교회의 분단극복과 통일의 당위성을 고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아직 통일운동이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에 통일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 북한주민 지원운동 시작
한편 한국교회가 선포한 희년이 와도 분단극복이 가시화하지 않자, 한국교회는 선언적이고 의식화적 측면의 통일운동에서 북한주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나눔운동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환한다. 1995년 북한은 극심한 수해를 입게 되고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통해 남한교회에 긴급구호요청을 하게 된다. 이 요청에 응답하여 한국교회는 수십억에 달하는 물품을 지원했는데 여기에는 교회협 뿐만 아니라 교회협의 통일운동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교회들이 앞장서서 동참을 한다. 교회여성들도 이 북녘동포 지원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994년 6월 그동안 평화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기독여성들, 교회협 여성위원회와 교회여성연합회, 여신학자협의회,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 기독여민회 등은 진보적인 여성단체와 더불어 ‘평화를 만드는 여성연대“를 결성한 바 있는데, 이 연대틀은 북한관련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시기까지 여성들이 연대하여 공동실천하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조직이었다. 이 연대틀의 노력으로 북에 8월 27일 1억4천만원에 상당하는 분유 26톤을 전달하였다. 이에 이어 1997년 9월 12일 교회협 여성위원회와 교회여성연합회를 중심으로 ”평화의 쌀 보내기 기독여성운동본부“를 발족하여 모금운동을 전개, 1998년 4월 15일
평화의 쌀 43톤을 북에 보냈다.
2) 제2의 기독여성 10년 선포와 북한여성과 어린이 지원
1998년은 세계교회여성운동사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여성과 함께 하는 에큐메니칼 10년”, 즉 한국에서는 “기독여성10년”을 마감하는 해였다. 한국의 기독여성들은 이 기독여성10년을 마감하는 축제를 하며서 “‘섬김과 나눔’을 향한 제2의 기독여성 10년”을 선포하면서 고통받는 북녘 여성들과 어린이들에 관심갖고 나눔을 실천하기로 의지를 모았다. 그 실천의 하나로 ‘북한어린이 돕기 운동’을 전개키로 하고 2000년 6월 26일 ’북한 어린이돕기 교회여성연대‘를 발족, 1구좌 1,000원 씩으로 하고 1인당 이유기 어린이의 한 달분 이유식가격인 5000원 씩을 모금하여 북한어린이게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 결과 2001년 1월 19일에 1차분을, 2002년 4월 3일 인천항에서 분유 2차분을 보냈다. 2003년에는 과거의 북한어린이돕기 교회여성연대에 참여했던 기관과 단체들이 모여 ‘반전평화기독여성연대’를 구성하면서 평화운동을 벌여나갔다. 2003년 7월 22일에는 ‘전쟁방지를 위한 기독교 평화대회“를 열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시작하고, 국가보안법 폐지기독교대행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3)<폭력극북 10년>과 기독여성평화운동
소강상태에 든 한국기독여성통일운동을 북돋을 큰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선포한 ,폭력극복 10년> 프로젝트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01부터 2010까지를 ‘폭력극복 10년’으로 선포하고 전 세계교회로 하여금 폭력극복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01년 2월 4일 독일 베를린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고 <폭력극복; 화해와 평화를 일구어가는 교회>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 취지는 모든 교회가 비폭력과 화해를 위해 일하고 비폭력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갈등전환과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접근방식을 개발하려는 의도였다. 여기서 제기한 폭력은 직접적, 구조적 폭력, 가정폭력, 공동체 안에서의 폭력, 국제사회에서의 폭력 등 모든 형태의 폭력을 문제시하고, 세계의 군사문화와 소형무기 확산에 도전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기독여성10년도 그렇지만 ‘폭력극복10년’을 살려 평화통일운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폭력극복에는 일상적인 폭력과 국가폭력, 전쟁 등 국제폭력이 다 포함되어 있고, 이의 종식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신학적 당위성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통일운동 선상에서 이 주제를 살리지 못했다. 기독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회내 성폭력문제를 비롯한 여성의 폭력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 문제를 분단극복이나 평화통일의 주제로 연결해 활동하지 못했다. “기독여성 10년‘ 과는 달리 ’폭력극복 10년”이라는 주제가 한국 기독여성계에서는 실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2011년 5월 17-25일 자마이카 킹스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폭력극복 10년을 마무리하고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에큐메니칼 선언을 발표한 한 달 후 6월 9일, 한국에서 교회협 양성평등위원회에서 <기독여성 폭력극복 10년 심포지엄>을 실시하고, 참석자들이 비폭력, 평화, 화해, 정의를 위한 헌신과 결단을 다짐한 것도, 작은 결실이라면 결실이겠다.
한편 2003년 기독여성통일운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교회협여성위원회는 북한물자지원사업 등 대북관계 사업의 패러다임 전환들을 위한 ‘기독여성통일운동 정책토론’의 장을 마련키로 한다. 이 일환으로 4월 30일 교회협여성위원회와 교회여성연합회가 공동으로 “기독여성평화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주제를 갖고 ‘기독여성운동정책협의회’를 실시한다. 이 토론회에서 ”기독여성 평화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한반도 평화와 여성, 교회의 평화운동과 여성, 군사주의와 여성“이라는 발제가 있었다. 이 토론회에서 교회여성들이 통일운동과 더불어 세계 평화를 위한 군사화에 반대해야 하는 운동이 제기 되었다. 이미 1992년 7월 한국국의 PKO(평화유지군)파병반대를 외친 바 있는 기독여성들은 1994년 4월 14일 ”전쟁의 위기를 고조시키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깨드리고 국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패트리어트미사일 설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3. 615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여성본부를 통한 통일운동
1)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2000년 6월 25일은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이 주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고 정상회담을 가진 후 남북관계발전과 평화통일실현을 위한 중대한 선언을 한 날이다. 이 선언에서 남과 북은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 남측의 연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연방안의 통일방안의 공통성 중심으로 통일지향, 조속한 인도적 문제 해결,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 균형발전과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 남북사이의 대화 개최를 합의하였다. 이 <615 남북공동선언>발표 후 향후 한국의 통일운동은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운동으로 자리매김 된다. 남측에서는 615 선언을 실천하기 위해서 보수에서 진보진영을 총 망라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 준비위원회 남측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와 평화를 지켜내고 단합과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여 세계 앞에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 단결을 보여줄 것을 선언하면서 ”1) 6,15 공동선언 실천에 천명된 대로 나라의 통일문제를 남에게 의존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과 지혜를 합쳐 풀어나갈 것. 2) 민족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각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6.15 공동선언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그 실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 3)남과 북(북과 남),해외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자주적 연대와 협력이 풍성하게 꽃펴날 수 있게 할 것.4)-평화는 온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이며 평화수호는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절명의 과제임으로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반대하고 이 땅에서 전쟁위협과 군사 적대결과 긴장을 걷어내며 항구적 평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과제가 선포되었다.
이러한 615 실천과제를 수용하면서 한국교회는 한국교회 615 공동선언 실천과제로 1) 교회가 평화와 화해를 선포할 일.2) 북녘의 교회를 지원하고 민족 나눔운동을 펼칠 일(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3)화해와 평화교육을 실시하고 갈등해소를 위해 노력할 일.4) 남북평화통일주일 공동예배를 드릴 일을 병행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에 기독여성들은 615 공동실천과제와 교회의 실천과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측 여성본부에 가담하여 함께 실천운동을 벌여나갔다.
2)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기독여성들의 만남
(1)카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남북, 해외교회여성대표들의 만남
615공동선언 후 제일 가시화된 것은 남과 북, 해와의 각계 각층의 만남이었다. 여성들도 여성모임을 추진하고 구체화하였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여성모임은 한국기독여성들의 요청에 적국 응답한 미국교회협의회 봉사와 증언위원회와 카나다연합교회 차원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주선한 자리로서, 2001년 9월 23-29일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연대하는 여성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모임에 초청된 이들은 남쪽에서는 그동안 한국 기독여성 평화통일운동을 주동했던 기관의 대표들로서 교회협 여성위원장 송영자장로, 여신협총무 한국염목사, 여신협 정의평화위원장 이숭리선생, 교회여성연합회 회장 성영자장로, 총무 이문숙목사,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이우정장로 해서 모두 7명이었고, 북에서는 조선여성협의회 회장인 홍선옥씨, 카톨릭교회 대표 이산옥씨,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국제위원장 김혜숙 전도사, 이민영수행원 1명이었고, 여기에 재일교회여성연합회 양영지회장을 비롯한 아시아 대료 4명, 한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미감리교 패터슨총무와 카나다연합교회의 총회장이었으며, 카나다 국회 상원위원이기도 했던 로이스 윌슨목사를 비롯한 북미교회 대표 13명으로 총 28명이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남북의 긴장완화가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됨을 확인하고, 615정상회담과 공동성명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도를 지속한다는 것과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15개의 건의사항이 채택되었으며, 이 건의사항을 한국정부에 보고키로 하였다. 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연대하는 여성 모임>은 카나다를 비롯해서 북미에 큰 반향을 일으켜으며, 이 모임을 통해 참여한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자매라는 일치의식과,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다. 한편 이 모임은 이우정선생의 통일을 위한 마지막 해외여정이기도 했다.
(2)금강산에서의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
여성만남은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는 두 차례의 6․15민족공동행사와 8․15공동행사, 남북노동자통일대회, 농민통일대회, 청년학생통일대회에 이어 마지막 부문행사로 열리는, 사실상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민간부문행사를 마무리하는 성격으로 이루어졌다. 이 대회는 남측에서 민화협 여성위원회, 7개 종단 여성위원회, 통일연대여성위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우리민족서로돕기 단체가, 북에서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여성협회, 민족회해협의회 여성부가 함께 2002년 남북여성통일대회 추진본부를 구성하여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 대회에는 남쪽에서 350여명, 북쪽에서 300명, 해외에서 2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의 남측 참가자는 7개 주관단체의 회원과 여성정치인, 여성학자, 여성미술작가와 문화예술인, 여성노동자와 농민, 여성경제인, 교육 및 보육관계자, 기자단과 공연팀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남북의 여성들은 따뜻한 자매애를 나누었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천을 다짐하였다. 이번 대회를 통해 여성들은 민족의 동질성을 왁인하는 한편 분단세월이 가져다 준 이질성을 확인하면서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를 높이는 과정이 필요함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대회에 북의 김혜숙씨와 이산옥 씨 외에 몇 명이 기독교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김혜숙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국제위원으로 영어도 잘해 통역으로 국제회의에 많이 참석하는 북한 교회의 여성 대표이고, 이산옥 씨는 카톨릭 대표다. 다음 날 아침에 각 분야별 만남이 8시부터 열렸다. 북에서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4명이 참석했으나 남쪽에서는 개신교 대표로 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다 여성단체 연합 소속으로 참석했지 종단 소속이 아니었고, 개신교대표도 아니었다. 마침 남쪽에서 여성단체 연합 소속 대표로 이 대회에 참석을 여신학자협의회의 한국염목사, 기독여민회의 정태효목사, 여성단체 연합 공동대표 이강실목사, 전주의 김은경목사 4명의 목사, 여기에 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인 윤명선 전도사와 카나다에서 온 서진옥씨, ywca에서 온 한 분 해서 일곱명이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에서 온 여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김혜숙씨가 현재 북에는 평양에 봉수와 칠곡 2개 교회가 있고 전국에 513개소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북쪽 교회를 소개하고 나서, 지난 10월 7일에 미국이 북한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없다고 발표한 데 대해 분노하면서 북조선 헌법에 엄연하게 신앙의 자유가 선언되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힘을 합쳐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앞장 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기독교 모임에 북쪽 측 해외동포로 호주에서 온 두 명의 여성이 참석했는데, 어제 남한에서 온 사람들이 한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북한 교회는 예수 믿으면 천당 가는 걸 믿느냐?” 그러자 김혜숙씨가 ”예수 믿고 천당가는 걸 안믿으면 왜 어떻게 기독교신자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답변을 했다. 그 호주에서 온 사람들은 호주에서 북한의 기아를 지원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 통일운동이 아니라 북한 선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남북여성대회의 성질도 모르고 북에 관광 차 왔다가 묻어 온 사람들이었다.
3) 615남북공동선언실천을 위한 여성본부 결성과 남북여성들의 만남
(1)여성본부 결성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한 내에서는 615남북공동선언실천을 위한 추진본부를 결성하였고, 이 추진본부는 7대 종단, 통일연대, 민화협 3자 단위로 구성이 되었는데, 7대 종단 중 개신교를 대표하여 교회협이 들어갔다.
여성들 역시 615 공동실현을 위한 여성본부를 결성, 종교여성, 통일연대,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으로 남한 내 여성관련 최대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기독여성들은 종교여성 범주에 들어가서 활동했으며, 종교측 대표로 첫해에 한국염 당시 여성위원장이 공동대표로, 정해선 부장이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여성부문이 아닌 남측 본부 대표 단위에서 활동한 기독여성들이 15명 이상이 되었고, 여성본부 종단 개신교부문에 교회협여성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는 단위 대표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2) 화해와 평화를 희망하는 이웃종교여성들과의 만남
앞에서 살펴 본 바, 기독여성들은 615 공동선언실천활동과 관련하여 종교여성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어서 종교여성과의 연대가 필수적인 사항었다. 이를 위해 해방60년, 분단60년이 되는 2005년 7월 1일 이웃종교 여성들과 만나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과 종교여성의 역할을 공유하는 자리인 “이웃종교 여성들과의 만남, 화해와 평화를 희망하다.”를 마련하였다. 이웃종교여성들과의 만남 자리는 작은 음악회로 이루어졌다. 각 종단 여성들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꿈을 종단 고유의 기도와 음악에 실어 나르면서 종교여성들간의 연대와 통일에 대한 의지를 불지폈다.
(2)<815 남북해외여성연대모임>
615공동선언실천본부의 사업에서 중점 사업은 615남북공동실현을 위한 민족공동행사였다. 삼일절, 6월 15일, 8월 15일, 10월 3일 개천절에 민족공동행사가 때로는 남에서, 때로는 북에서 실행되었다. 부문별 공동행사도 추진되었다. 여성의 경우 815민족대축전, 815남북해외여성연대모임, 남북여성대회를 추진하였다. 분단 60주년이 되는 2005년, 남에서 815민족대축전이 열렸고 이때 여성들은 8월 16일 여성정책개발원(연구원)에서 <815 남북해외여성연대모임>을 했다. 북측에서 7명의 여성위원이, 남측에서 55개 소속단체의 대표와 임원, 해외동포 약간 명 해서 약 150명이 참석했으며, 부문별 주제발제로 북에서 김경옥부위원장, 남에서는 한국염공동대표가 발표를 했다.
(3) 2005 남북여성통일행사
한편 2005 남북여성통일행사가 9월 10-14일 묘향산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통일과 평화를 위해 일해온 지난 시간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해방60주년의 의미를 성찰하고 615공동선언 실천을 확고히 하기 위한 자리였다. “615공동선언 실천과 반전평화를 위한 남북여성총일연단‘에는 남측 대표 100명, 북측여성 500명이 참여했다. 한국염 615남측여성본부 공동대표와 김경옥615북측여성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의 사회, 정현백616남측본부 상임대표와 박순의 615북측여성분과위원회위원장의 기본연설, 북측 장금숙선생의 615공동선언실천과 여성의 역할, 남측 김숙임대료의 q'반전평화와 여성의 역할’ 보충연설과 공동선언문 낭독이 있엇다. 교회협에서 한국염위원장, 신효희부위원정, 정해선부장 참석했고, 이문숙교회여성연합회 총무를 비롯해서 많은 기독여성기관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남쪽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반미여성회까지 폭넓은 계층들이 참여하다보니 갈등의 조짐도 있었고, 언어사용들의 문제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는 부문별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사시간등에 북측의 교회여성지도자들과 만나 서로 평화의 의지를 확인했다.
(4)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남북여성대표자회의
남북여성통일행사를 묘향산에서 치룬 이듬해 <3․8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뜻에서 2006년 3월 9-11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여성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남측에서 30명, 북측에서 30명이 참여하였다. 이 대표자회의는 2006년도 여성통일운동의 방향과 향후방향제시를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남측 한국염공동대표와 북측 김경옥부위원장의 사회, 남측의 정현백 대표와 북측의 박순희 대표의 연설, 남측의 김숙임공동대표와 북측의 김인옥부위원장의 구체적 실천과제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남북여성들이 분단을 종식하고 자우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함께 전진할 것,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전평화실현을 위해 힘을 쏟고 군사적 대결과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근원을 제거하는데 여성들의 힘을 쏟을 것, 여성단체들이 연대와 단합, 협력을 강화하여 통일운동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높일 것,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일제잔대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할 것, 자주, 평화, 통일의 새날을 열기 위해 북과 남 모든 여성들이 나아갈 것을 내용으로 한 남북여성 공동호소문이 발표되었다.
한편 이해 6월 15일, 615민족공동행사가 광주에서 열렸다. 이 행사를 계기로 여성들도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남북여성상봉모임을 열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대표연설과 호소문이 채택되었다.
5) 교회여성평화연대 활동
기독여성들은 615공동선언 10주년을 기해 교회여성평화연대 활동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첫 활동으로 ‘세상읽기와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정기적으로 실시키고 하고 한 당에 1번, 매달 둘째 주 수요일 2시에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하였다. 기도회는 연대하는 단체가 돌아가며 주최키로 하였다. 그 첫 기도회가 2006년 10월 18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이 기도회는 2008년 2월까지 이어졌으며,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 교회협양성평등위원회, 교회여성연합회, 새가정사, 성공회어머니연합회, 디아코니아자매회, 기장여교욕자회, 여신협, 복음교회여성신도회 등 13개 단체가 기도회를 주관하여 기독여성의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별히 2006년 11월 15일에 열린 기도회에서는 한반도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와 동북아 평화, 한미 FTA와 경제정의 실현, 군부에 의해 목회자와 시민활동가, 신부 등이 살해당한 필리핀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한편 이렇게 평화를 위한 기도를 통해 통일의 의지를 다잡은 교회여성들은 다시금 북한동포를 위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용천참사로 고통을 당하는 북한동포를 지원하기 위해 ‘용천돕기 여성행동발대식 및 거리모금 캠페인을 벌인 바 있는 교회여성연대는 2007년 북한수재민을 위한 모금을 전개키로 하고 9월 5일에 종각 국세청 앞에서 북한수해복구지원 거리 캠페인을 시작으로 모금운동에 나섰다. 원래 700만원을 목표로 했으나 실모금액은 3백여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이 모금액은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 기부, 북의 영유아 양식과 보건의료사업에 사용토록 하는 한편, 평화기도회에서 모은 1백만원 상당은 교회협을 통해 대북지원사업에 사용토록 했다.
6) 615 10주년 기념 기독여성 평화통일문화제와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기독여성 성명서
615 남북정상들의 만남과 공동선언은 한반도에 평화의 서광이었다.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공동행사>를 비롯해서 남북여성들의 만남은 남과 북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수용하며, 거리를 좁혀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2007년 10월 4일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 정상회담에서 나온 10․4 선언의 내용인 서해평화협력지대 수립, 개성공단사업, 금강산관광, 남북경협, 철도와 도로, 통신등의 연결, 이산가족상봉, 국군포로문재, 사회문화교류 등의 과제를 설정했다. 이 10․4 선언으로 615선언이 더욱 현실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008년 정부가 바뀌면서 남과 북의 관계가 경색되었고, 공동행사를 비롯해서 여성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이 폐쇄되어 버림으로 통일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하게 되었다. 통일부를 없애자고 주장한 사람이 통일부 장관이 된 상황에서 금강산에서의 한 여성의 피살과 2010년 3월의 천안함 사건 이후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이 침몰되고 있는 가운데 남북 사이 대화단절은 물론, 간신히 일군 화해와 평화의 무드가 실종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한일강제병합 100년, 한국전쟁 60년, 615남북공동선언 10주년을 맞으면서 2010년 6월 10일 기독여성들은 교회협양성평등위원회와 교회여성평화연대의 이름으로 평화통일에 대한 기독여성의 과제 인식, 평화감수성 향상 그리고 통일을 위한 연대의 자리로 <기독여성 평화통일문화제>를 개최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향한 기독여성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행사는 여성의 감수성을 살린 몸짓공연, 노래, 연주 등으로 진행되었다. 선언서의 내용은 천안함 침몰로 희생된 46명의 장병들의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이 사태 이후 불신과 갈등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정부가 인도적 대북지원을 지속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설 것, 막혀 있는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 할 것,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완하하며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기독여성들은 갈등해소의 중재자로, 인도적 대북지원을 지속하고, 일상에서 평화살기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였다.
Ⅱ. 성찰과 전망
이제까지 한국기독여성의 평화통일운동을 개괄해보았다. 다음은 기독여성통일운동 경과를 살펴보면서 기독여성 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1. 성과
1) 기독여성 통일운동의 면모를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특성으로 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은 단순히 남성기독인들의 뒤를 따른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들이 독자노선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분석틀이 교회협을 중심한 일반 분석틀과 다르며, 이 다른 분석틀이 기독여성들로 하여금 통일문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점이다. 기독여성통일운동의 발화점이 된 <여신학자 선언>이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성협의회>선언을 보면 분단의 원인을 단순히 강대국의 폭력이나 분단을 고착화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빈공이데오로기 주입자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일차적인 원인을 가부장제라고 적시함으로 여성이 접근하는 통일상이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일을 위해 일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모성성을 들고 있는데, 이는 자칫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이데오로기로서의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 교회여성들에게 통일의지와 사명을 북돋우는데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분단의 원인을 가부장제로 규명했다는 것은 분단극복을 여성해방의 과제와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바로 이 지점이 한국기독여성운동을 남성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게 한 원동력이라고 본다.
2) <‘95통일희년운동>에 기독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였다. 그 원인 중 하나는 통일운동에 참여한 1세대 여성들이 분단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을 직접 체험했거나 간접으로 체험했고, 이 경험이 여성들의 참여를 불러왔다고 여겨진다. 결국 자기 문제화 할 때 운동이 생명력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3) 기독여성들이 통일문제를 선교과제나 신앙과 연결할 때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서 기독여성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신앙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통일을 신앙실천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4) ‘95통일희년운동을 여성들이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여성운동에 참가한 단체들의 효과적인 연대틀 형성에서 비롯되었다. 기독여성전문 연구기관의 결과물을 교단 교회여성들이 받아 적극적으로 확산하는 일을 했는데, 이를 통해서 통일운동의 저변화가 가능했다. 이는 효율적인 연대가 운동의 필수사항임을 입증해준다.
5) 초창기 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통일운동이 불온시되던 풍토에서 그나마 교회의 통일운동의 입지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기독여성의 통일운동이 진보여성들을 흡수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이들을 통해서 통일운동의 지평이 넓어졌다.
2. 한계
1) 기독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교단 차원에서는 여성의 공헌이 가시화되지 못했다. 이는 북한지원 등에 여성들이 적극 참여를 해도 교단의 이름이나 교단의 남성지도자 역할만 부각되지 교회여성의 이름은 묻혀지는 현실이다.
2) 진보성향을 가진 기독여성단체들과 달리, 교단의 교회여성조직은 교단의 정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일례로 ‘95통일희년운동에 어느 교단 여성조직은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 여성조직이 속한 교단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교회여성조직의 자율성 여부가 기독여성운동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
3) 기독여성들이 일반여성단체와 연대해서 운동을 하려고 할 경우, 정보취득력과 관계망이 견고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일례로 615 여성본부에서 종단 몫 공동대표가 타 종단으로 이관되었을 때 정보망이 형성되지 않아 615사업을 교회여성들이 공유하기가 힘들었다.
4)기독여성, 특히 교회여성들의 통일운동이 교단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사람이 바뀌면 운동이 연결되지 않아 활성화되지 않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5) 교회를 바탕으로 통일운동, 평화운동 하던 여성들이 교회의 보수성이나 획일화에 견디지 못하고 일반 사회단체나 여성단체로 가서 일을 하는 현실에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제도권 밖에서 운동하는 기독여성지도력을 교단 제도권이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국에는 이들을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로 인해 기독여성의 통일운동의 역량이 줄어든다.
6) 615 여성본부와 일을 하면서 직면한 문제는 기독여성진영에 통일전문가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여성단체는 통일운동전문가를 키워냈으나 교회는 통일운동을 위한 여성전문가를 키워내지 못하였다.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기독여성들의 경우, 교단 여성단체 실무자들이나 임원들 중심이다 보니 역량의 한계와 전문성 부족에 직면하게 된다. 일반여성단체에서는 각 기관이 고유업무를 갖고 있고, 활동가들도 자기 영역이 있다. 그러나 교회기관 실무자는 다양한 업무를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한 방면으로 집중해서 지도력을 키우기가 어렵다. 자연히 한 방면의 전문가를 발굴하기 어렵다. 통일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통일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인물을 발굴하고 키우고 뒷받침해야 한다.
7) 여성통일문제 전문가 육성을 비롯해서 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재정지원이 필수다. 교단적으로 교회의 구성원 60%이상이라는 현실을 감안해서 여성지도력 육성에 재정지원을 하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8)615 남북교류 현장에서 드러난 문제로서, 교육에 돈이 들다보니 자기 돈 갖고 갈 수 있는 사람만 교류가 가능해진다. 의식없는 사람이 북의 현장을 보고 오는 것도 계몽을 위해서는 필요하나, 활동가가 돈이 없어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는 방지해야 한다. 여기에도 경제정의가 필요하고 나눔이 실천되어야 한다.
9) 초기 기독여성통일운동을 할 때, 여신학자협의회, 기독여성평화연구원, 기독여민회 등이 기독여성통일운동 이론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여성평화연구원을 해체하고 평화문제에 관심하던 기독여민회 여성회원들과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만든 여파로, 여신협에서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역량이 줄어들면서, 기독여민회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활동을 접고 기층여성들과의 연대에 중심하면서 결과적으로 기독여성통일운동을 위해 이론작업을 해 줄 단위가 약화되었다.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는지 살펴서 전문기독여성기관의 역량을 살리고 존속할 수 있도록 연대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10)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95통일희년 운동>이 끝난 1996년부터 북한지원, 북한교회와의 교류, 통일정책협의 실시, 남북평화공동기도드리기에 치중되었고, 기독여성들도 나름 대로 독자성을 갖고 운동을 전개한다고 했으나 이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정부 주도로 열린 통일정책을 펴 민간단위에서 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기는 했으나, 한반도의 비핵화, 동북아의 비핵화를 비롯한 지속가능한 평화체제 형성을 위한 기독여성들의 평화통일운동이 계속되어야만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일반여성계는 <동북아여성평화회의>라는 틀을 만들어 9․19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6자회담이 재개되도록 한국을 비롯해서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의 여성평화운동가들과 연대하여 6자회담 참여국들에게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계 이행을 위한 여성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 기독여성계에서는 이 문제에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그나마 그나마 교회여성연합회 총무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3. 기독여성 통일운동의 과제
시대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향후 기독여성통일운동의 과제는 궁극적으로 한국여신학자 선언에서 제시된 실천과제, 폭력극복 10년에서 제시된 과제, 7․4합의서 정신하에서 615공동선언 실천과제를 구현하는 것이다.
1)한국여신학자선언에서 제시된 과제
(1) 분단으로 인한 갈등구조와 고통의 원인을 연구하고 규명하며 고난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사례를 모아서 신학화하여 남북한 여성들의 공감대를 형성 확산할 일.
(2) 각 교단과 기독교 여성단체에 <평화통일 연구위원회> 신설하여 통일교육에 나설 일.
(3) 교회제도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하여 언론매개체와 교회교육교재를 통하여 의식화할 일.
(4) 북한에 대한 무지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자료를 수집, 공개함으로써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올바른 인식에로 전환될 수 있도록 노력할 일.
(5) 북한 기독여성들과의 여성차원의 만남을 실시할 일.
(6) 한반도 평화는 세계평화를 위한 열쇠이므로 한반도 비핵화와 온 세계 핵무기의 폐기를 위하여 세계적인 평화 운동과 연대할 일. 등을 다시금 구체화하는 일.
2) 615선언 실천을 위한 과제
(1) 6,15 공동선언 실에 천명된 대로 나라의 통일문제를 남에게 의존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과 지혜를 합쳐 풀어나갈 것.
(2)우리는 민족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각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6.15 공동선언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그 실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
(3)남과 북(북과 남),해외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자주적 연대와 협력이 풍성하게 꽃펴날 수 있게 할 것.
(4)평화는 온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이며 평화수호는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절명의 과제임으로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반대하고 이 땅에서 전쟁위협과 군사 적대결과 긴장을 걷어내며 항구적 평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3) 폭력극복 10년 과제
(1)직접적인 폭력, 구조적인 폭력, 가정폭력, 공동체 안에서의 폭력, 국제사회에서의 폭력 등 모든 현대의 톡력을 다루고, 폭력에 대한 세계 각 지역의 분석과 촉력극복을 위한 방법들을 배운다.
(2)교회들은 폭력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를 폐지시키고 화해와 비폭력의 영성을 새롭게 확인한다.
(3)지배와 경쟁이 아닌 협력에 기초한 공동체 내 공동안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한다.
(4)공동체 내의 다른 종교와 협력하고 다른 종교로부터 평화건설에 대한 영성을 배우고 자료들을 얻는다.
(5)세계의 군사문화와 소형무기의 확산에 도전한다.
나가면서
이명박 정부 들어 교회협을 비롯한 개신교의 통일운동이 소강상태에 직면하고 있다. 이명박정부의 반통일정책 때문이라고 하지만, 냉정히 보자면, 지금의 남북상황이 ‘95통일희년운동을 할 때 보다 더 악화된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왜 통일운동에서 적극적이지 못하는가? 문제는 비전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95년 통일희년을 선포할 때, 그 시기 세계적 환경은 독일이 동서 자유왕래가 되고 동구권의 몰락, 통일을 눈앞에 둔 독일을 보면서 우리도 분단 50년에는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리라는 비전을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615공동선언실천에 나름대로 열심을 다한 것도 생각지도 못했던 남과 북의 정상회담과 그 정상회담에서 선언된 실천과제들을 보면서 그것이 이행되면 남북이 한 형제, 자매가 되리라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위성이 힘이 있으려면 비전이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기름을 준비한 여성들이 신랑이 갑자기 와도 신랑을 맞을 수 있는 것처럼,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비전을 만들고 비전이 이루어질 준비를 하자. 이를 위해서는 통일에 대한 비전이 필요한데, 우리는 어떤 비전을 만들 수 있을까?
* 이 글은 2012년 6월 교회협 여성위원회 주최 통일세미나에서 발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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