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녀상이 기다리는 평화
(누가복음 18:1~8)
“엄마,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눈을 감으면
어느 새 나는 내 고향, 평양 집 마루에 앉아 있습니다.
아 달콤한 냄새, 기분 좋은 바람.
해가 뉘엿뉘엿 산꼭대기로 넘어가려는데,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느덧 으스름한 어둠이 우리 집 마당을 덮기 시작합니다.
그 어둠 앞에 엄마모습 희미하게 보입니다.
“원옥아~”
아, 정말 내 엄마입니다.
“엄마~!”
엄마 품에 안겨본 지 언제인지, 그 품속으로 달려가 봅니다.
그런데 엄마는 금방 어둠속으로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고
열세 살 어렸던 원옥이도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손등에 주글주글 주름이 서려있는 88세 할머니가 홀로 어둠 앞에 서 있습니다.
엄마,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열세 살 그 때 일본군인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내게 달려들어도 엄마 생각하며 이겨냈어요.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본군인들에게 내 몸 수십 번, 수백 번 빼앗기며 울고 또 울었던 그 날들을
엄마에게 토해내며 실컷 울고 싶었어요.
엄마 품에 안겨 울기만 해도 내 아픔 다 나을 것 같았어요.
그러나... 엄마 나는 지금 길을 잃어버렸어요. 집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어요.
집을 떠난 지 어느덧 75년이 지났어요.
그 무섭고 끔찍했던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었다 하네요.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이 이다지도 멀까요?
일본정부로부터 잘못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렇게 힘들까요?
아직도 나는 해방을 기다려야 하나요?
그래도 엄마, 나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일본정부에게 해결을 바라며,
70년 동안 하루하루를 쉼 없이 달려왔어요.
나 올해는 꼭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나 올해는 꼭 일본정부에게 사죄를 받을 거예요.
나 지금 비록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엄마...우리 곧 만나요.
(13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던 길원옥할머니의 꿈)
일본군대사관 맞은 편 거리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형상화 한 청동으로 만든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평화의 소녀상이다. 2011년 12월 14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000차 수요집회 때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세운 것으로 일본군‘위안부’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해, 다시는 전쟁으로 인해 여성과 어린 소녀들이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는 평화의 세상을 기원하기 위해서 세웠다. 이 평화의 소녀상은 단발머리 소녀로서 의자 위에 두 주먹을 꼭 쥔 채 맨발로 앉아 있는데, 발뒤꿈치가 들려 있다. 단발머리는 13-14살 때 끌려가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맨 발은 소녀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가 된 여성들의 고통을,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발뒤꿈치가 들린 채로 앉아있는 모습은 전쟁 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불안한 삶과 방황을 상징한다. 소녀상이 있는 바닥에는 검은 조각으로 어른이 되어 한을 안고 사는 할머니의 그림자가 새겨져 있고 소녀상 옆에는 빈 의자가 놓였 있는데, 세상을 떠났거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모든 피해자를 위한 자리요, 소녀와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다. 이 평화의 소녀상은 단순한 예술작폼이 아니라 이미, ‘위안부’할머니들의 분신처럼 자리잡고 있으며, 어린 소녀를 끌고가 일본군 성노예로 삼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역사의 증인, 다시는 이런 범죄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미래세대를 위한 경고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평화의 소녀상이 철거된 위기에 놓여있다. 지난 2015년 12월 28일 발표된 한일외교장관합의 발표 때문이다.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우리 기장여신도회가 회원단체로 있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에 당시 교회와 사회위원회 위원이던 이효재선생이 정신대문제를 연구하던 이화여자대학교 윤정옥선생님을 소개하여 교회여성연합회가 일본군위안부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에 실태조사를 다녀온 것이 출발점이다. 이후 교회여성엽합회를 비롯해 1990년 11월 16일 37개 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자 일본에서는 일본군‘위안부’의 실체자체를 부인하고 나서자 정대협에서 신고전화를 설치했다. 첫 신고자로 동대문감리교회 교인인 김학순할머니가 “내가 바로 일본군‘위안부’였는데, 이렇게 증인이 살아있는데...하고 울분을 못참고 신고하였다. 김학순할머니를 비롯해 증인들이 나왔고, 1991년 1월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를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하였다.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정하고 진상규명하라. 공식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역사교과서에 기록하고 가르쳐라. 그리고 추모비를 건립하라!“라는 외침이 터져나오고 있다. 우리 기장여신도회도 처음부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원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에 나섰다.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참여는 물론이고 일본과 한국정부에 촉구하고 세계교회에 알리고 평화의 소녀비를 세우는데도 함께 참여하였다. 어느덧 수요집회는 1200회를 넘어서고 있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전시하 여성인권 범죄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처음에는 일본군‘위안부’ 실체 자체를 부인하다 피해자 증언이 나오고 국제이슈가 되자 국가가 한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끌고 간 것이라고 발뺌하더니 끝까지 군의 관여하에 한 것이긴 해도 민간업체가 한 것이고 일본국가 차원에서 강제로 한 것이 아니라고 공식인정과 사죄를 거부해왔다. 그나마 군이 관여하긴 했다는 발언도 일본군‘위안부’들이 20년동안 끊임없이 외친 결과 였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들려준, 귀찮게 졸라대어 불의한 재판관을 굴복시킨 한 과부의 이야기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힘없는 과부가 “내 적대자에게 내 권리를 찾아주시오.” 하고 끈질기게 졸랐다. 마침내 그 불의한 재판관이 귀찮아져서 그 과부의 권리를 찾아주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도 밤늦으로 부르짖으며 귀찮게 구는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끈질기게 간구하는 이들의 기도소리를 내버려두겠느냐? 끈질기게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귀찮게 졸라대면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수요집회는 마치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억을한 권리를 찾아들라고 귀찮게 졸라대는 과부의 울부짖음과 같다.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요구를 계속 묵살했던 것처럼 일본은 계속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국가가 한 것이 아니라며 국가의 책임을 부인하고 사죄하지 않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군‘위안부’할머니들과 정대협은 전 세계로 이 문제를 확산시켰다. 그 결과 1997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시 하 여성에 대한 중대한 저죄임으로 일본이 사죄하고 법적 책임을 이행하라.”는 권고를 이끌어내었다.
한편 피해자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자국 국민의 문제임에도 과거의 일이라고 움직이지 않던 한국정부를 규탄하며 헌법소원을 했다. 마침내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이 문제에 나서지 않는 것은 국민의 권리보호를 외면한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후 한국정부도 일본에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귀찮게 졸라대어 효과를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 찬 물을 끼얹는 엄청 불의한 합의가 행해졌다. 지난 2015년 12월 28일 한국․일본의 외교장관이 일본의 국가책임인정이나 일본정부의 공식사죄와 배상도 없이 일본정부가 10억엔(100억원)을 출연키로 하고 일본군‘위안부’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합의했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합의는 일본국가의 책임을 거론하지도 않고 “군의 관여 하에서 이루어졌다”, 총리가 직접 사죄하는 것도 아니고 외무장관을 통해 사과한다고 대독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 합의는 불가역적, 즉 바꿀 수 없는 합의로서 한국에서 다시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국제사회에서 거론도 하지 않을뿐더러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관련단체와 협의해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10억엔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버리려는 정의롭지 못한 합의에 대해 피해자할머니들과 관련 단체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고 합의무효를 선언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세계행동을 벌이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한일회담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나 정대협을 비롯한 관련단체를 배제하고, 피해자할머니와 단체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을 무시한 채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할머니들은 말쓴하신다. “우리는 이번 한일정부간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우리 의사는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공식사죄도 아니고, 법적 배상도 아닌 이번 합의는 무효예요.” 라고. 각계각층에서 이번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 무효다.라고 한다. 우리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우리 교단이 속해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한일외교장관회담 무효를 선언하고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포했다.
일본이 왜 가만히 서있는 소녀상을 이전시키려 한국정부에 요구할까? 그 소녀상이 일본정부의 전쟁범죄와 전시하 여성아동폭력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진정 사죄의 뜻이 있다면 소녀상을 보며 지난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반성을 해야 옳은데, 오히려 소녀상을 치워달라는 것은 반성은커녕 책임질 뜻이 없음을 드러낸다.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이 없는 이 합의를 들은 피해자 할머니와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무효라고, 그래서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다시 나서야 한다고 외친다. 일본군‘위안부’ 정의로운 문제해결을 위한 세계1억인 서명운동, ”일본이 준다고 하는 100억원(참고로 일본 쓰나미 때 한국국민이 모금해 일본에 준 돈이 440억이다) 받지 말고 우리 힘으로 할머니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시키고 다시는 이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올바를 역사교육을 하고, 평화의 소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세우고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고 고발하는 일을 하는 재단을 우리가 만들자.”라는,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 아시아전쟁터로 끌려간 20만 할머니와 손잡는, 일본군‘위안부’ 정의와 기억재단 만들기 1백만 명 1만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평화의 소녀상의 주인공들인 피해자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일본의 사실인정, 공식사죄와 배상을 원하는 것은 우리 미래 세대들이 다시는 우리처럼 성노예로 끌려가는 일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위해서다.!”
미래세대를 위해 정의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평화를 위한 할머니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우리 기독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백성의 권리를 모른 체하지 않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2월28일 불의한 재판관들이 한 한일외교합의를 무효로 하는 일, 일본군‘위안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행동, 일본군‘위안부’ 정의와 기억재단‘을 만드는 일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는 일, 평화를 위한 일”을 위한 몸으로 하는 기도의 행진이다. 일본군’위안부‘ 정의로운 해결운동에 나서서 불의한 재판관인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귀찮게 하는 일, 이를 통해 세계 여성 평화의 여정에 나서는 일은 2016년 삼일절 에스더의 기도행진을 하는 우리 기장여신도회의 소명이다.
이 글은 기장여신도회가 실시하는 2006년 에스더의 기도 설교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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