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해변가의 일곱 말씀

한국소금 2019. 3. 26. 19:46

해변가의 일곱 말씀


인생의 길에는 저마다 고비가 있게 마련이다. 그 고비를 견디어 내는 힘은 타성에 젖어있던 우리 삶에 새로운 힘을 주고 새로운 가능성을 안겨주었던 그 때로 돌아가는 일이다. 신앙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그 때의 감격으로 돌아가 우리 삶을 반추해보는 일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실패와 좌절의 빠져있던 제자들이 주님을 다시 만나 새롭게 제자의 길을 걷게 된 내용이 그려져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7곱 말을 중심으로 우리 삶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께서 하신 7가지 말이 나온다. 맨 처음 말은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는 물으심이다. 개역에는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못 잡았습니다. 또는 없나이다라는 말로 대답한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의 현재 상황을 확인시킨다. 어부에게는 마땅히 고기가 잡혀야 하고, 고기가 있어야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지자들은 밤새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못잡았다. 아무것도 없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 현실을 확인시키신다.. “너희에게 있는게 무엇이냐?” 밤새 잡으려 애썼지만 잡은게 무엇이냐? 모두 부질없는 것에 매달린 결과가 무엇이냐?고 물으심으로 희망도 믿음도 없는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도 못잡은 이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게 하신다. 자연히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라는 응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못잡았습니다.” 하고 솔직히 현실을 인정함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이걸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보자. 여기서 고기란 단지 생선이 아니라 우리가 얻으려고 한 그 무엇들로 생각하고 우리 현실을 점검해보자. 우리는 무엇을 잡았고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는 이런 걸 얻으려고 했는데, 이걸 잡으려고 했는데, “우리는 무엇을 잡았습니다. 무엇을 얻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너 무엇을 얻었느냐, 무엇을 잡았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지. 우리도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보자. 믿음, 희망, 사랑, 삶의 의미 이런 것들이 있는가? 그래서 예 할 수 있는가아니면 아무것도 잡지 못해 좌절과 공허에 빠져있지 않는가?


두 번째 말씀은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하는 말씀이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하고 대답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다.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이 그물을 어느 쪽으로 던져야 하는지를 모를 리가 없다. 또 오른 쪽으로 안 던져보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 오른 쪽으로 그물을 던졌고, 그 결과 많은 고기들을 잡아낸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하는 자기 확신이나 고정관념이나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그걸 다시금 시도해볼 때 거기서 잡히는 것이 있고 얻어지는 것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해보아서 가진 경험을 다라고 생각하고 자기 독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고정관념을 고집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 남의 말을 무시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을 버려야 새로움의 길이 열린다.


세 번째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실패와 좌절에 싸여 밤새 고기잡느라 배고픔과 피곤함에 허덕인 제자들에게 한마디 나무람 하지 않고 오히려 아침밥을 준비해 놓으시고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주님의 식탁에 초대해 주셨다. 주님이 주신 아침을 먹고 제자들은 윈기를 회복하고 다시금 주님의 제자로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아침밥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 도망했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실망해서 다시 옛날의 고기잡이로 돌아간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왜 믿음이 없느냐? 이 배신자들아하고 나무라지 않으셨다. 현재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셨고 오히려 배고프고 힘든 그들의 모습을 아파하시며 아침밥을 차려주실 정도로 이들을 품어주셨다. 밤새 고기 잡느라 지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꾸중이나 비판으로 임하셨다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다시 예수를 다시 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히려 밥상을 마련해주셨기 때문에 거기서 감격이 일어나고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된 것이다. 한 밥상에 앉는다는 것은 한 식구가 된다는 뜻이됴, 한 공동체라는 뜻이다. 나무람이나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무엇을 해줄 때, 상대가 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줄 줄 아는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품어주는 것도 예수를 따르는 길이다. 우리 공동체가 진정한 예수 밥상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인정해주고 있는 그대로 품어줄 줄 알아야 한다.


네 번째 말씀은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신 말씀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하필 베드로에게 물으신 이유는 베드로가 12제자의 대표격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설도 있지만, 예수님이 수난 예고를 하시면서 베드로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버릴지언정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큰 소리쳤던 그 때의 상황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네가 다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묻으신 것은 철저한 회개와 다짐을 촉구하는 상징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3번 씩이나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세 번 씩이나 물으신 까닭은 베드로가 예수를 닭 울기전에 세 번 씩이나 부인할 것이다라고 예고 하셨고 실제로 베드로는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리더라도 나는 주를 끝까지 따르겠다고 한 베드로의 주를 향한 열정과 3번이나 했던 그 배신을 상기시키면서 다시금 결단을 촉구하신 것이다. 세 번 씩이나 네가 나를 이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실 때, 베드로의 마음에 어떠했을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은 예수와 다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요청이다. 사랑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대하여 베드로는 감히 라고 하지 못하고 주께서 아십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한다. 실상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을 배신하곤 하였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한 예수의 말처럼 베드로는 최소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갖고 있었기에 주님이 아십니다, 라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너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느냐?”하고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베드로처럼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라도 대답할 수 있는가?


다섯 번째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사면으로 나타낸다. 왜 하필 어린 양인가? 어린 양은 다 자란 양보다 더 도움이 필요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에서 예수의 관심을 볼 수 있다. 예수가 관심하는 바는 지극히 작은 소자, 즉 세상에서 천대받고 학대받는, 보잘것없는 이들로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섬김, 이들을 먹이고 인도하는 것이 제자들이 가져야 될 소명이다. 우리 청암의 뜰에는 한부모 가정이나 조손 가정의 아동들, 저소득 맞벌이 가정의 아동들이, 이주 노동자들이 드나든다. 이들은 바로 주님의 어린양이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주님의 어린양으로 생각하고 돌보는가?

여섯째는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일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너를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는 네 혈기로 네 욕구로 모든 일을 하였고 십자가를 피해 다녔지만 앞으로는 네가 피한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19절에서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라고 해석해 놓았다. 즉 베드로가 당할 십자가의 순교, 고난의 길을 통해서 하니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제자의 길은 원해서 가는 길도 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는 길도 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이란 세상에서의 영광을 통해 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다. 고기를 낚는 어부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내 스스로 가는 길이지만 사람을 낚는 하나님의 어부가 되는 길은 하나님에 의해, 또는 내 의지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지는 삶이다. 제자의 길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겪는 고통의 길이다. 그리고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많은 교회들이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믿고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고난받는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 여기서 한 가지 늙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늙어서는 남들이 너를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다닐 것이라고 해서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미쳐 채 늙기도 전에 조기 은퇴를 하고 직장을 잃고, 막막한 실정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삶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기회로 볼 수는 없는가? 세상적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늙어서 당하는 고통의 시간들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만들 수는 없는가? 젊음의 혈기로는 내가 원하는 것에 매달리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 늙어서는 남는 시간을 인생의 황혼녘에서 자기가 이제까지 걸어 온 사람을 반추해보고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길을 걷는 다면 그 고통의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은총의 시간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다.  

 

일곱 번째 말씀은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3년전 어부인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이렇게 밀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내가 이제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죄책감으로 어쩔줄 몰라하는 제자들을 예수는 다시금 나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신다. 처음 예수를 따르던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는 초청의 말씀이다. 이 초청에 응답해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따라나섰다. 런데 이 대목에 보면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가는 동안 지녀야 할 자세가 있다. 그건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의 뒤를 따르던 베드로는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람하시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묻는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으로 추측되는 그 제자에 대해 베드로는 동지에 대한 애정의 표시인지, 아니면 라이벌 의식이었든지 그 제자의 운명에 대해 묻는다. 이런 베드로의 물음에 대해 예수는 그 일은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니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한다.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 말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비교는 성장에 도움이 안되고 열등의식이나 자기 기만, 자기 우월감에 빠지게 하여 사람을 성숙하지 못하게 한다. 신앙생활이나 제자의 길은 누구와 비교할 것이 아니고 경쟁할 일도 아니다. 누가 나보다 났다고, 더 신앙이 좋다고 기죽은 일도 아니고, 내가 남보다 났다고 우쭐댈 일도 아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자기 능력대로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자기가 받은 달란트 대로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 이게 참 신앙인의 길이요, 제자의 길이다.

 

 

200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