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혼돈의 시대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한국소금 2021. 1. 19. 15:48

혼돈의 시대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오늘 말씀의 시작은 제가 일방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비대면 예배에서 여러분이 함께 성서를 읽고 생각을 나누고 말씀을 통해 창조신앙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 창세기 11절에서 31절을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다음으로 본문을 조용히 묵상하십시오.

다음으로 본문 가운데 마음에 짚이는 단어나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그으십시오.

옆의 가족들과 밑줄친 부분이 왜 마음에 집히는지, 어떤 의문점이 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십시오(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의를 달지 마세요. 토론이나 설득의 자리가 아닙니다).

나홀로 가족은 혼자 정리를 하십시오.

 

말씀 들어가기

 

9월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창조절이 있는 달이고 교회력은 사실상 12월 성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기억하고 뜻을 생각하는 9월 창조절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교단도 9월 첫 주를 창조절로 선포하고 이 한 달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보전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일깨웁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같은 과정으로 창세기 1장을 읽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창세기 2장 보다 더 늦게 기록된 성서입니다. 창세기 1장은 기원전 500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시기에 기록된 것이고, 2장은 기원전 1000년 경 솔로몬 시대에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500년 가까이 늦게 기록된 성서가 성서의 성서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맨 처음 장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섭리가 작용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강대국 바벨론에 잡혀가서 보니 바벨론 사람들이 인간이 만든 마르둑을 비롯한 온갖 우상을 섬기고 이 우상에게 복을 비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벨론 왕국이 강요하기도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들 중에도 강대국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현혹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본 예언자들은 사람이 만든 신에게 현혹되지 말라, 이스라엘 민족의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그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지으신 분이고, 그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니, 이런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물질의 자리에 놓지 말라고 강조해서 쓴 성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장의 말씀입니다. 1장의 창조 기사는 앞 뒤 순서가 바뀐 부분도 있고, 오늘날 과학적 사실로 보면 납들이 안가거나 모순점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조기사는 과학적 사실을 규명해 가며 읽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말씀과 삶 나누기

 

이런 전제로 저도 여러분과 같이 오늘의 성서 읽기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몇 가지 통찰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창조라는 것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19 때문에 몸살을 앓고 혼돈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게 되자 사람들이 공허함, 허무감에 사로잡힙니다. 경제적으로 앞이 안보여 깊은 우울증과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바로 이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혼돈과 심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은 가라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계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이 바로 오늘 코로나 바이러스로 혼돈에 빠져있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할 것이라는 희망을 읽습니다.

 

둘째는 빛과 어둠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디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에 빛이 필요함을 아시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낮과 밤으로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빛은 선한 것이고, 어둠은 악한 것으로 생각하고 기피합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샴쌍둥이 같아서 어는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어둠이란 빛의 창조가 일어나는 근원입니다. 창조 기사는 결코 어둠을 악이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집회 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라고 노래했지만,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어둠에서 빛이 창조되고 빛에서 어둠이 파생됩니다. 어둠과 빛, 낮과 밤의 창조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내 삶에서 이 창조 이야기를 반추해 보았습니다. 저는 너무 이원론에 빠져 산 것 같습니다. 제 잣대로 옳고 그름을 구분해놓고, 사람들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구분해 대해 나쁜 사람은 상대를 안 하거나 제쳐놓고 대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를 헤아려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이쪽 저쪽 선을 그어 그 선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창조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의 창조는 구분해서 발라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통찰하면서 어둠을 발라낼게 아니라 새로운 빛의 동력으로 이끄는 기회로 삼아야겠다고, 제 관계맺음을 다시금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은 낮으로, 어둠은 밤으로 부르신 창조 이야기를 읽으며 쉼에 대한 성찰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하루의 시작을 아침부터가 아니라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엇인가 보여서 일을 할 수 있는 아침부터 하루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반대로 일을 쉬는 밤을 하루의 시작점으로 합니다.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쉬고 나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성서가 주장하는 하루의 순서입니다. 일보다 쉼이, 일보다 휴식을 할 수 있는 잠이 먼저라고 합니다. 흔히들 휴식은 재창조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이 말은 휴식의 가치를 일에 묶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일에 중독이 되어 있고, 일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기사는 해지는 저녁부터 하루를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일보다 쉼을 우선하라고 가르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이 강제로 쉬게 되면서 어떻게 쉬어야 할지를 고민한다고 압니다. 그러면서 일에 중독되어 있던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저녁보다 낮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결과가 세상을 파괴로 치닫게 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계속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고 하루의 개념을 바꿉니다. 일하고 쉬는 것이 아니라 쉬고 나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쉴 줄 모르는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 시국을 저녁이 있는 삶, 저녁부터 시작하는 삶으로 어떻게 전환할까 성찰학게 됩니다.

 

다음으로 제가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다시금 성찰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란 모든 인류를 통칭합니다. 모든 인종에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 본문을 여성문제와 이주문제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이니 차별하지 말자, 차별은 죄다.” 라고 인권을 강조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인용해왔습니다. 코로나 시국을 맞아 바이러스가 옮길까봐 기피하는 우리 모습을 보며 일상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과연 구호나 주장이 아니라 정녕 내가 매일 만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했던가? 그렇게 존엄한 인간으로 대했던가,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나 지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했던가, 하는 반성이 생겼습니다. 내가 자기중심적이기 이기적인 것도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긍심이 없기 때문이며, 나에 대한 자긍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 잣대로 내 주면의 사람들에게 함부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저는 명예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설교하지만, 내 자신은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명예에 집착할까요?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신앙이 확고했다면 명예 따위에 미련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그 이상의 가치가 어디 있는가?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성서를 읽으며 사람들을 대하는 내 자세에 대해 많은 성찰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에 대한 통찰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태풍과 폭염, 해일, 산불, 북극 빙하의 해빙 현상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 또는 기후재앙을 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재앙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물질적 성장 중심의 발전이라는 잘못된 가치관 때문임을 지적합니다. 이런 개발에 의한 발전 논리에 한 몫 한 것이 창세기 1장의 성서를 오용하고 남용한 기독교에서 비롯됩니다.

 

창세기 1장 창조선언에 의하면 하나님이 온갖 생물을 다 지으시고 마음에 드셨습니다.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다스리게 하고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만드시고 복을 베푸시며 다른 피조물들에게 하신 똑같은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하시면서 조건을 다셨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려라.” 여기서 정복하라는 원 뜻은 바벨론 사람들처럼 자연에게 정복당해 신처럼 대하지 말라는 경고가 들어있습니다. 또 다스리라는 말에는 군림한다는 뜻도 들어있지만 관리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복과 다스린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자연을 함부로 한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먹을거리로 주셨지 남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개발의 명목으로 파괴하고 지금은 인간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유지시키는 관리자가 되어야 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인간과 자연은 서로 상호관계에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 모두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가 붕괴되어 가는 오늘의 사태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쓰레기 줄이기, 화학제품 사용안하기 등 낭비를 줄이는 생각을 하다가 먹거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서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에게 먹을 것으로 준 것은 풀과 열매입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 대로 제가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식을 먹을 때는 자연파괴도 생각하면서 최소화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고기 때문에 열대림이 파괴되고, 사육하는 동물에게서 나오는 메탄가스로 오존층이 뚫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육식을 줄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난 당뇨 때문에 단백질 모충을 위해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하고 스스로를 합리와 하려는 자신을 보면서 한탄하는 것이 요즘의 제 일상이기도 합니다. 그렇긴 해도 육식을 할 경우 소고기 보다는 닭고기 등,생태계 파괴를 덜 시키는 음식을 먹도록 하자, 환경파괴를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보자는 성찰을 했습니다.

 

아무튼 코로나 바이러스, 기상이변 앞에서 제 일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며 내 생활을 돌아보면서 청암교우 여러분들에게 제 삶과 고민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통찰을 하셨나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내가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에,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에 큰 위로와 희망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