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가 바뀌어 헛꿈을 꾸지 말자.
한국염
저는 오늘 한 지인으로부터 받은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는 글로 오늘의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전도몽상이란 앞뒤가 바뀌어 헛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열흘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누에고치 입니다.
*6개월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제비들의 집입니다
*1년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들의 집입니다.
그런데
*누에는 집을 지을 때 자신의 창자에서 실을 뽑아 집을 짓고
*제비는 자기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집을 짓고
*까치는 볏 집을 물어 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줄 모르고 집을 짓습니다.
*날짐승과 곤충들은 이렇게 혼신을 다해 집을 지었어도
시절이 바뀌면 미련 없이 집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그런데 사람만이 끝까지 움켜 쥐고 있다가
종내는 빈손으로 떠나게 됩니다.
*사람을 위해 돈(화폐)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비싼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는 신세입니다.
*사람이 거주하기 위해 집이 있는데
집이 너무 좋고 집안에 비싼 게 너무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犬)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거꾸로 되고 있는 현상을
일컷는 말을 의미 합니다.
*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줄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완전한 소유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은 이미 두루 알려진 사실입니다.
*자연을 완전히 소유하는 생명체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물체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자연에서 모든 것을 잠시 빌려 쓰다가 떠나가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것은
결코 물질이 아니고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말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것 들을 곁에 두고서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참으로 이상한 현대인(現代人).....
*미래의 노후대책 세우느라 오늘을 행복하게 살 줄 모르는
희귀병에 걸려 살고 있는 현대인,
*늘 행복을 자기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헤매며 찾아다니다 지쳐버린 현대인,
*나누면 반드시 행복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알고도
실천 못하는 장애를 가진 현대인.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바보같은 현대인,
*결국은 서로가 파멸의 길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연/지구 파괴로의 길을 버젓이 걷는 우매한 현대,
*지난날 벌어 놓은 재산을 그저 쌓아 놓기만 했지
가치 있게 써보지도 못하고 자식들 재산 싸움으로
갈라서게 만드는 이상한 부모들이 많이 존재하는 현대인,
*시간을 내어 훌쩍 떠나면 그만인데 앉아서 온갖 계산에 머리 싸매가며
끝내는 찾아온 여행 기회도 놓치고는 중병에 시달리는 이상한현대인,
*이러한 전도몽상(顚倒夢想)에서 헤매는 현대인이
오늘날 바로 내 자신일지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친구로부터 카카오 톡으로 전해 받은 이 글을 받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그 현대인이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설교에 나오는 한 가르침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누가복음 12장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이야기였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예수님이 산위에서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의로운 행실을 하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형제에게 성내지 말라, 음욕을 품지 말라, 음행한 경우를 제외라고 아내를 버리지 말라, “예” 할 때는 “예” 하고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 하라, 보복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남에게 보이려고 자선하지 말라, 기도나 금식할 때 위선자처럼 하지 말고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 하는 가르침과 함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원형을 가르쳐 주셨고, 남을 심판하지 말고 네 눈의 들보부터 깨달아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좋은 열매를 맺어라, 하나님의 듯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라 등 주옥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람이 재물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지를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땅에다 보물을 쌓아주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 실려 있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실제로 재물을 쌓으려 하는 것은 위선임을 경고하고 있다. 이런 경고를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가르치셨다. 걱정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목숨이 이런 것들 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 또 걱정한다고 해서 제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느냐, 걱정이 다 부질없다고 하시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장 33절에서 핵심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을 먼저 하고 그 외에 먹고 사는 일은 하나님의 선물로 받고 감사하면서 그날그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미리 염려하고 대처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 일은 오늘 걱정하고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하게 두라고 하십니다. 미리 닥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오늘을 등한시 하며 살아갑니다. 오지도 않은 내일을 염려하며 오늘을 충실히 살지 않는 것 때문에 우리 삶에서 주객전도가 일어납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많은 선현들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 나를, 자아를 살펴보며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죽을 때 동전 하나 가져갈 수 없는데도 뭔가를 움켜쥐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며 헛된 꿈을 꾸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며 그날에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런 삶이 전도몽상을 하지 않고 사는 삶입니다. 전도몽상이란 순서를 뒤집어 헛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의 우선순위는 첫째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이 넘치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의란 생명적 가치가 우선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첫째를 져버리고 둘째를 이루려는 헛된 꿈을 꿉니다. 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한 부자가 창고를 크게 짓고 거기다 소출을 쌓아 두고 영혼에게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자.” 라고 기염을 토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리고 가신다면, 그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부자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이야기를 읽으며 그 부자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부자는 어리석다고 하면서 우리도 역시 같은 잘못을 범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전도몽상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가 질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짓밟히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고 그에 따라 헛된 꿈을 꾸며 살지 않기는 말은 쉬워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라 쉽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지만 이 길이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류시화 시인이 쓴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책에서 소개한 ‘연필 우화’라는 글이 있습니다. 인도의 시크교 한 영적 스승인 리쉬 싱이 세상을 떠나기 전 모한이라는 제자에게 연필 한 자루와 편지 한통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모한은 세상 일에 몰두 하느라 마음의 세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사업적인 성공에 몰두하고 미래를 위해 많은 일을 구상하느라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영적 문제에 완전히 등을 돌린 건 아니라서 가끔 영적 스승 리쉬 싱을 찾아가 가르침을 듣곤 했습니다.
어느날 스승의 요청으로 모한은 스승의 마지막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마지막 날 스승은 “그대는 사람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잊지 말게. 그러면 그대의 여행이 평화로울 것이네.”라는 말과 함께 연필 한 자루와 “연필에 대해 깊이 새겨보기 바란다. 그러면 그대는 필요한 배움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편지 한 통을 남겼습니다.
“첫째, 이따금 연필을 뾰족하게 깎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영적 수행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몸, 마음, 영혼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자신을 다듬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더 좋은 연필이 될 수 있다.
두 번 째 교훈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겉이 아름다운 연필이라도 안의 연필심이 부실하면 좋은 글씨를 쓸 수 없다. 자신이 일시적인 육체에 머무는 영원한 존대임을 잊지 말고, 내면의 성장에 힘을 쏟아야 한다.
연필의 세 번 째 교훈은 이것이다. 그대가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즉시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연필은 끝어 좋은 지우개를 달고 있다. 글씨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듯이,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은 것이 결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실수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 즉시 양심이라는 지우개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네 번 째 교훈은, 그대가 많은 뛰어난 일들을 할 수 있지만, 더 큰 존재가 인도할 때야 비로소 그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필로 글을 쓰지만, 결국 훌륭한 글을 쓰는 것은 그 연필을 손에 쥔 작가이다. 그 작가에게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졸은 연필이라고 글을 탄행시킬 수 없다.
연필이 주는 다섯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그대가 지나가는 곳에 그대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대의 생각, 행동은 필연적인 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들이 그대의 삶이라는 작품을 이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가르침을 받은 모한은 그 가르침으로 변화되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 평화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 옆에 연필 한 자루를 놓고 연필의 교훈을 새기면서 우리 삶을 전도몽상의 삶, 순서를 뒤집어 헛된 꿈을 꾸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앞에 두는 삶, 생명을 우선시 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봅시다. 이것이 코로나 시국 앞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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