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십자가 앞에서

한국소금 2021. 1. 19. 15:52

십자가 앞에서

 

마태복음 26: 36-46

 

하나님의 뜻을 따른 십자가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모습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를 알기에 괴로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라는 잔을 마시지 않도록 해달라는 인간적인 간구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이 인간적인 간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뜻 대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요.”하는 하나님께 내맡기는 기도를 드린다. 이런 기도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괴로움을 토로한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있어다오.” 이렇게 간곡한 부탁에도 제자들은 끝내 스승 예수와 함께 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같은 간구를 세 번 씩이나 하는데 얼마나 고뇌에 차고 간절한 기도를 했던지 누가복은 144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인간적으로는 피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져야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였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지는 것, 그것이 십자가다. 예수님은 오롯이 십자가를 지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가 끝나고 유다가 이끌고 온 무리들에게 잡혀 유대 대제사장과 의회,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반역자로서 십자가형 선고를 받는다. 죄인들을 처형하는 골고다까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아 몸소 지고 가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다. 여기서 강도란 우리가 뜻하는 그런 강도가 아니라 로마에 저항하던 독립군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예수는 그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신다. 당시 십자가 처형을 할 때 죄수에게 쓸개를 탄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신포도주가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해서 고통을 덜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신포도주를 거부하시고 맨 정신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셨다. 그러다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이 절규는 독창적인 절규가 아니라 바로 시편 22편 첫 구절이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시편 기자의 호소를 자기 호소로 전이시킨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그러난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조롱거리, 백성의 별시거리일 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비아냥댑니다.

그가 주에게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가 그를 구하여 주겠지.

그가 그토록 주의 마음에 들었다면 주가 그를 건져 주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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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쏟아진 물처럼 퍼져 버렸고 뼈마다기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촛불처럼 창자 속에서 녹아 내렸습니다.

나의 기력이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께서 나를 흙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습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드러났으며,

원수들이 나를 끊임없이 노려봅니다.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우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마취 끼가 섞인 신포도주를 거부한 채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를 부르짖은 예수님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맨 정신으로 시편 22편에 실린 그 고통스러운 처지가 지금 자기의 십자가 밑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있음을, 무리들이 조롱하며 자기 옷을 제비뽑고 있는 모습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시편은 이렇게 조롱하는 무리들을 원수라고 부르지만 예수는 이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렇다고 용서하는 것이 다르다. 시편 22편의 고통에 대한 절규는 결국 하나님께 호소했더니 하나님이 구 절규와 호소를 들어주셨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끝난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엘리엘리 라마시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은 후에 신포도주를 마시고 숨을 거두신 것으로, 누가복음에는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요한복음에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고 운명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끝나던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당한 고통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십자가 신앙은 자칫 관념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고난주간에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생각하며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부르짖음을 읽거나 회상할 때는 시편 22편을 함께 묵상해야 그 부르짖음의 참 뜻이 살아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크리스천도 아니었던 김춘추라는 시인은 이라는 시에서이렇게 말하고 있다.

 

술에 마약을 풀어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아픔을 눈감기지 말고

피를 잠재우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 발로 가라.

숨 끊이는 내 숨소리

너희가 들었으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마 사박다니

시편의 남은 귀절은 너희가 잇고

술에 마약을 풀어

아품을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 발로 가라. 찔리며 가라.

 

시인은 예수께서 부르짖은 시편 22편 첫 구절 이후를 우리에게 이으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후 절이 예수가 당하는 고난의 실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며, 시편 22편과 복음서에 가록된 십자가상의 예수 모습을 같이 읽으면 십자가의 고통이 더 절실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한 김춘추는 예수께서 그러했듯이 고통을 희석시키려 마취제를 거부하고 우리가 질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말고 찔리면서 그대로 고통을 감내하라고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그대로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여주듯이 예수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긴데서 가능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께 기꺼이 나를 내맡기는 행위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 몫의 십자가를 전적으로 지는 것이다.

 

고난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순절에 우리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생각한다. 이런 구세사적 고통 외에도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고난과 고통들이 있다. 사순절에 예수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도 보였다. 각 사람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다들 커서 그런지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지고 가고 있었다. 이 사람도 자기의 십자가를 열심히 지고 가려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져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이 십자가가 저에게는 너무 벅차니 조금만 잘라달라고 하였다. 예수는 기꺼이 그 사람의 십자가를 잘아주었다. 예수께 감사하다 말하고 훨씬 가벼워진 십자가를 지고 다시 걸었다. 얼마 후 다시 예수께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예수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의 십자가는 땅에 끌지 않아도 될만큼 가벼워지고 작아졌다. 시간이 지나자 다시 무거워졌다. 마지막 부탁이라며 십지가를 아주 짧게 잘라달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그의 부탁대로 십자가를 잘라주었다. 하도 작아져서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뱅뱅 돌릴 정도였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미련하다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깊은 골짜기가 나왔는데 다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지고 온 십자가를 다리삼아 놓고 건너갔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십자가는 너무 작아서 걸쳐볼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염치없지만 그는 엎서 가는 예수님께 소리쳐 도와달라고 했다. 허지만 예수님과 다른 일행은 너무도 멀리 가 그의 절망적인 소리가 닿지 못했다. 이 이야기에서 십자가를 줄여나간 그 사람은 예수의 보호를 더이상 받지 못한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데 닥치는 어려움과 고통을 회피하지 말라는 하나의 경고로 들린다. 나라면 예수님이 먼저 가다가 멈춰서 돌어와서 이 사람을 위해 예수가 지셨던 십자가로 계곡을 건너게 했을 것 같다. 신포도주를 거절한 예수님처럼 자기 앞에 놓인 십자가를 질 때, 그 고통까지 감내하며 오롯이 지는 것이 십자가를 제대로 지는 것이다.

 

고난과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있다. 야곱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요샙처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두 길이 있다.

성서에 나오는 야곱과 요셉을 보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매우 다르다. 야곱이 죽었던 아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이집트로 왔을 때 바로가 나이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살아온 나날이 다 궂은 일 뿐, 험난한 일뿐이었다.”고 대답한다. 험한 꼴을 많이 당하긴 하였다. 장자권 때문에 형에게 쫒겨 고향을 떠나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무보수로 일해야 했고, 천사와 싸우다 다리를 절게 되었다. 맏아들 루우벤이 자기 소실과 불륜을 일으켰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길에 묻어야 했다. 기근에 허덕이기도 했고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면서 막내 아들 베냐민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하였다. 그의 말대로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 그래서 야곱은 일생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축복도 많이 받았다. 형을 피해 가서 살 곳도 있었고, 비록 사기를 당하기는 했지만 14년 걸려 사랑하는 이와 결혼도 했고 자식도 12이나 되었다. 형과 화해도 하였고 물질적 축복도 많이 받았다. 아들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덕에 기근도 면하고 노후에 잘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한 세월을 보냈다고 결론을 짓는다. 자기 욕망대로 살았기 때문에 노년에 와서 자신의 삶을 고통의 날, 험악한 날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요셉의 경우를 보자.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로 살해당할 뻔하다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상전인 보디발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무고로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이 꿈해몽을 잘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형제들과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야곱과 요셉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요셉의 경우가 훨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요셉의 삶이 고통스러운 삶이 아니라 축복받은 삶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셉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았다. 요셉의 전기를 보면 매사를 하나님안에 있다. 꿈을 해몽할 때도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우리 가족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집트의 주권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제 아들이다....라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잘 견디어냈다. 그래서 삶에 대한 원망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야곱과 요셉의 차이는 내 뜻을 앞세우느냐, 하나님의 뜻에 맡기느냐 하는 차이다. 내 뜻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고통에 허우적거리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께 맡김으로 편안을 얻을 수 있다.

 

크리스천이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계속되는 것이고 우리가 매일 져야 하는 것이다. 요셉은 고통스러운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맡겼기에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고통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고통 앞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한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고통은 은총으로 다가온다.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신다. 지금 코로나 19로 고통당하는 세계의 아픔에 같이 계신다.

 

2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