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난 믿음의 사람들
본문: 히브리서 11장 1-16
우리가 오늘 읽은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장이라고 해서 믿음의 길을 걸은 많은 사람들을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믿음의 길 여정에 선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특히 아브라함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랴서나는 특별히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믿음의 길을 떠난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신앙의 사람이라고 소개할 때 그 신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아브라함을 신앙의 사람이라 불리게 했는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운다, 흔히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예”하고 응답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그의 길 떠남에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하셨을 때 주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길을 떠났다. 히브리서 1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떠날 때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났,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타국에서야 같이 장막에서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주저 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 타국에서 사는 것처럼 언제나 떠날 차비를 하고 산 아브라함을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브라함의 떠난 이야기를 기록한 성서는 아브라함이 왜 고향을, 아버지의 집을 떠났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났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길을 떠남은 새로운 출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머물러 있는 데서 떠나 새 길을 걸어갔듯이 기독교인의 삶이란 이전의 존재방식,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림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듯이 고향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인습으로부터 떠나고,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이 나타내고 있는, 기득권과 소유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아브라함은 일생동안 길을 가는 여정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란 기존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위해 길을 떠나는, 즉 여정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한 것처럼 믿음의 사람이란 길을 떠난 사람이요,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라 하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서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이 있어야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내용이나 기독교 교리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믿음이란 정말 그런 걸까?
미국의 저명한 신약성서학자인 마커스 보그 교수의 책들,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와 그의 마지막 유고집인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이라는 책을 참고하며 믿음의 길 떠남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믿음이란
믿음, 신앙이라는 히브리 말 어원은 ‘에무나’라는 단어다. 이 에무나라는 말은 아귀 당나귀가 어미 당나귀를 부를 떼 내는 소리라고 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송아지가 어미 소를 부를 때 내는 ‘음메’처럼 들리겠는데, 구약에서 믿음이란 아기 당나귀가 어머 당나귀를 부를 때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기 당나귀가 에무나 하고 부를 때 그 울음 속에는 분명히 그 울음이 어미 귀에 들려 어미가 자기에게 응답할 것이라는 확신의 요소가 들었다고 한다. 어미 당나귀의 응답을 믿고 부르는 아기 당나귀의 울음소리, 이게 신앙의 뜻이다.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하나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자세가 바로 믿음이다.
흔히들 신앙이란 기독교 전통교리에 따른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 즉 천당에 간다,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 이런 것을 믿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기독교에서 전한 어떤 특정한 진술들을 옳다고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어떤 진술을 머리로 믿는 것이지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알기 위해 믿느냐, 믿기 위해 알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사에서 오랜 논란이 되어 왔지만, 성서나 초기 기독교에서 믿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신뢰함을 넘어서 그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믿다와 사랑한다는 동의어로 쓰였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어떤 진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듯이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랑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믿습니다.” 하는 신앙고백을 한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어떤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 이전과 작별하고 사랑의 길이라는 새로운 여정에 서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신앙이란 관계형성이다.
신앙이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형성이다. 신앙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라 불성실함, 불신실함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맺음이 신앙이라고 할 때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구약신학을 배울 때 첫 시간에 교수님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 쓰라는 숙제를 내셨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그때 나는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인간에게 자기 뜻을 거스르면 벌주시는 분이라고 쓴 기억이 난다. 그동안 내가 받은 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렇게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계명을 잘 지키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그런 교리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랑의 하나님 보다는 하나님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벌주시는 하나님, 조건부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의 인상이 깊게 박혀져 있었다. 여기에 부채질 한 게 왕으로서의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이미지였다. 하나님은 지배하고 다스리고 심판하고 벌주시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서를 다시 읽으면서 이런 심판자요 적대자인 하나님의 모습만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언서와 복음서를 읽으며 성서 전편에 흐르는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으로 우리를 양육하며,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고, 징벌적인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잘못된 신앙임을 알게 되었다. 잘못된 하나님 상에서 벗어나 자비로우시지만 말을 잘 들어야 복을 주시는 그런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라 전적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요즈음 나는 헨리 나우엔의 제안에 따라 매일 아침 시편 23편을 묵상하는데, 이 묵상을 통해서도 사랑의 하나님을 더 체감하게 된다.
믿음의 길 떠남
하나님은 두려워하거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부등켜 안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신앙이란, 믿음이란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의 요구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 것이다. 언제인가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이라고 할 때 그 자비의 어원이 자궁임을 소개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임신을 해서 자신의 자궁에 있는 자녀에게 품는 그 마음이 바로 자비의 실체다. 어머니는 임신해서 자궁 안에 있는 그 아기가 잘되기만을 바란다. 자궁의 아기가 위험해 질세라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아기가 위험해질 것 같으면 맹렬해진다. 자궁이라는 뜻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비는, 그래서 사회적 정의와 관계가 있다. 성서에서 정의란 법률적인 용어가 아니라 평등과 관계가 있다. 사회 정의란 경찰서 구호가 아니라 이집트에서 압제당하는 히브리 민족의 울부짖음을 듣고 불쌍히 여겨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신 그 해방, 바벨론 포로생활에 고달파 우는 백성들의 울음에 응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귀환시키신 그런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울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 비참하게 울부짖는 사람들이 없도록 안녕을 확보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자궁 속에 있는 사람들, 이 세상 사람들의 안녕을 위한 사회적 정의 실현, 평화에 관심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할 때 심판의 하나님을 믿기에 당위성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 자비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 길에 나섰기에 기쁨이 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에 서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라 믿는 예수님은 자비롭고 자애로운 하나님을 삶에서 보여주신 분이다. 예수가 보여주신 가장 소외된 자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 대한 연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연민의 실재를 보게 된다. 아브라함이 인습과 기득권을 떠나 새로운 여정에 나서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교리를 믿는 믿음의 길에서 떠나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 여정에 서기 바란다.
아브라함이 길을 떠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탕에서 불러주신 그 관계에 충실하게 이끄시는 길로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이런 길을 가도록 초대받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네가 있던 곳을 떠나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네 고향과 부모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떠나라고.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낡은 삶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계속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인습을 떨치고 길을 떠나도록 부르시는 그 너머의 삶으로 길을 떠날 것인가?
‘사랑이 나를 기쁘게 맞이했다’ 라는 17세기 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의 시로 말씀 증언을 마치려고 한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어보자.
사랑이 나를 기쁘게 맞이했지만, 내 영혼은 뒤로 물러섰네.
더러움과 죄로 인해 떴떳치 못해서,
그러나 재빠른 눈을 가진 사랑은 내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머뭇거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상냥하게 물어보네.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나는 대답했네,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는 손님이요.“
사랑이 말했네, “당신이 바로 그 손님이요.”
아 그대여, 친절하지도 않고 은혜를 모르는 내가요?
나는 그대를 져다볼 수도 없습니다.
사랑이 내 손을 잡고 미소로 대답했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눈을 만들었는가?
주님, 옳습니다만, 나는 그 눈을 망쳐놓았습니다.
네 수치가 응당히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두소서.
사랑이 말했네. 그 비난을 누가 감당하는지 너는 알지 못하는가?
내 사랑하는 이여, 그러면 당신을 섬기겠나이다.
사랑이 말했네. 너는 앉아서 내 살을 먹으라.
그래서 나는 앉아서 먹었네.
하나님의 사랑의 길에 동행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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