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되갚을 수 없는 초대 손님

한국소금 2021. 1. 19. 16:01

되갚을 수 없는 초대 손님

본문 누가복음 147-24

 

성경을 읽다가 오늘의 본문을 읽으며 놀랐다. 그동안 무심코 읽은 본문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되는데, 식사 자리에 친구나 친척을 초대하지 말라고? 해서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오늘의 본문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혼인잔치 자리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누구를 초대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고, 셋째는 큰 잔치 바유에 관한 것이다. 이 세 단락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잔치 자리 초대 지침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비유나 예화로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셨다. 사도 바울이나 요한복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으나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비류로 설명해 주신 이야기가 많다.

오늘의 본문도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을 혼인잔치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읽은 대로 오늘 본문의 내용 맨 처음 지침은 잔치 자리에서 높은 자리, 좋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가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 혹시 손님들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때에 너는 부끄러워하면서, 맨 끝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여보게, 윗자리로 올라앉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은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런 비유로 겸손에 대해 가르치셨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 본문을 읽으면 우리 청암교회 교우들은 누가 주인 말도 없이 상석에 앉으려 들겠느냐고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젊을 때는 아예 알아서 뒤에 않거나 끝자리에 앉았는데, 나이가 들고 지위가 생기니까 본문의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여러 기관의 자문회의에 종종 참석하게 되는데 나는 소위 상석이라는 게 불편해서 아무 자리에나 앉는다. 그러면 나이를 배려해서인지, 대표, 목사라는 직업을 고려해서인지 꼭 상석에 데려가 앉힌다. 본문처럼 사람들 앞에서 내 명예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히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게 되고 그 사람은 머쓱해질 수박에 없다. 요새는 회의 때 아예 좌석에 이름표를 붙여놓으니까 이런 실랑이를 안 해서 좋다. 이런 일은 사진 찍을 때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뒤에 섰다가 앞 의자에 앉아야 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본문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의도치 않게 자리가 바뀐다. 내 경우와는 다르긴 하지만 가끔 예수님이 들려준 일화와 같은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맞지 않게 아무자리에나 앉았다가 그 자리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는데, 예수님의 혼인잔치의 교훈,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추려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는 말씀의 핵심은 한마디로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둘째 지침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우리는 손님을 초대할 때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두 번 째 초대에 관한 것은 비유나 예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요, 예수의 잔치 초청자 지침이다. “”네가 점심이나 만탄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눗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네가 그러한 사람들을 토대하면, 그들고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운총이 없어질 것이다. 잔이픞 베풀 때에느,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자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식사나 만찬자리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리다. 그래서 서로 아는 사람들이나 필요에 의해서 같이 밥 먹는 자리를 마련한다. 우리도 일상적으로 밥 한끼 같이 먹어요!소리를 잘 한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예수님은 사회통념과 달이 한마디로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매우 파격적이다. 우리는 보통 아는 사람을 식사에 초대하고 잔치 자리에 초대한다.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는 것은 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또는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품앗이로 가는 경우가 많다. 내 자식의 결혼식에 왔으니 가야지, 내 보모의 장례식에 왔으니 가야지, 아니면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경조사에 보험을 드는 기분으로 서로들 길흉사에 오고 간다. 이에 우리의 현실이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으면 보답성 초대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초청 대상자에서 제외할 사람으로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이 제시되었다. 보통 친분관계가 있는 사람을 식사나 만찬에 초대하는 것이 관행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회의 관행을 깨고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 장애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신다. 이들을 초청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이 되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통념과 매우 다르다.

예수님께서 초청 대상자에서 금지한 사람들은 우리가 초청하지 않아도 사회적 지위가 있기 때문에 그들끼리의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초청대상에 포함된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창하지 않으면 이런 자리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은혜를 입어도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 줄 경우, 은혜를 베풀 경우,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내가 베푼 상대가 나에게도 그렇게 갚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는데 나에게 되갚지 않을 경우 은혜를 모른다거나 감사할 줄 모른다고, 심한 경우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회적 관행을 깨뜨리라고 하신다. 우리의 관행을 벗어나서 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식사나 잔치자리에 초대하라고 하신다. 내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식사자리에 초대하고, 이들과 관계를 맺으라고 하신다. 은혜를 입어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초대방식이다.

 

잔치에 관한 세 번 째 지침은 초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잔치의 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 번 째 잔치에 관한 것은 큰 잔치의 비유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내용은 상 앞에 있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 있습니다.‘라고 한 말에 대해 예수님이 들려주신 큰 잔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였는데 이들은 다 이유를 대며 잔치에 오지 않았다. 밭을 샀는데 가봐야 해서, 소를 사서 시험해봐야 해서, 장가를 가야 해서..라는 이유였다. 초대한 이가 노해서 종에게 시내 거리와 골목에 나가 가난한 사람, 장애자들을 다 데려오라고 하였다. 그러고도 자리가 남으니 큰 길과 울나차리로 나가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와 자기 집을 채우리고 하였다. 그리고 주인이 말하였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들려준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와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고, 큰 잔치는 하나님 나라 잔치라고. 그리고 초대를 받았으나 핑계를 대로 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만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이 이야기를 앞의 이야기와 연결시켜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해석된다. 큰 잔치에 처음 초대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초대대상에 금지시킨 사람들이다. 밭을 사고 다섯 마리나 소를 살 수 있는 사람, 또 장가를 갈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초청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대상에 포함된 사람들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초청대상에 금지시킨 대상을 초청한 이는 잘못된 주인이다. 이 주인은 예수님이 초청하라고 한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을 초청 대상에 넣지 않았다. 그러다 초청한 이들이 오지 않아 자리가 비자 화가 난 나머지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들을 데려왔다. 그러고도 자리가 비니까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데려다 자리를 재우가고 하였다. 진정한 초대라고 볼 수 없다. 잘못된 초대며, 기쁜 잔치가 될 수 없다. 이 본문을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읽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열리 없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는 앞의 12-14절의 어떤 사람을 초대하여야 하느냐 하는 본문과 연결해서 읽어야 뜻이 제대로 파악된다. 주인이 잔치를 열 때 초대 대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잔치를 열어도 기쁨의 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지시하신 초대 지침을 따라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잔치의 지침을 살펴보았다. 첫째는 겸손한 자리에 앉으라는 것, 둘째는 잔치의 대상을 사람들의 관계망에서 배제된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초청하라는 것, 셋째는 초청대상의 지침을 지키지 않는 잔치는 기쁨의 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침들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낮은 자리에 앉을 줄 아는 사람이 낮은 이들을 식탁에 초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지침이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겸손히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그렇게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정도의 문제지만 노력하면 거부감 없이 실천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식탁에 초청할 대상을 가난한 사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로 하라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친구나 형제, 친척을 초청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이 말의 참 뜻은 실제로 친구나 형제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만 놀지 말고 사회적 약자들과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을 초대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만이라도 이렇게 배제되고 소외되는 사람들 편에 서고, 이들의 친구, 이들의 형제, 이들의 친척이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초대 대상을 제시하면서 되갚음이라는 단어를 여러번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되갚음을 강조한 것은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길은 우리가 마음을 비워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길도 있지만 아예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과 밥을 나누는 일이다. 이런 이들과 식탁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청암공동체 식구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한다.

 

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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