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
본문 누가복음 15장 11-32절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와 특히 12월 31일이 되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전통이 있다. 연말에 가족들이 모여 지나간 일 년을 회고 하고 새해를 맞는다. 우리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2020년의 마지막 주일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를 통해서 한해를 마감하며 사랑의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하는 그런 연말을 맞기를 바란다.
아버지를 말할 때 아버지 자체가 상처가 되는 사람들도 있고,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가 가기 전에 함께 이 본문의 아버지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잃었던 하나님 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본문을 수없이 읽고 또 자비로운 하나님에 대해 설교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이 말씀을 그저 교과서적으로, 나와 별 관계없이 스쳐 지나가며 읽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분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 모습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런 분이겠지, 하고 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최근 내가 겪은 한 사건을 통해서 이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 그런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싶었고, 본문을 읽으면서 부모로서의 나를 통렬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지난 4월부터 우리 아들 한솜이가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나가 살았다. 그동안 명절이나 부모의 생일이 되면 집을 다녀가곤 해서 잘 살겠지, 하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상처를 받고 정신적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20년 만에 부모가 있는 집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아들과 지내면서 병간호하는데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때론 나을 수 있을까 염려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늘의 본문이 새롭게 내 마음에 다가왔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야 나눠가질 수 있는 재산의 분깃을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버젓이 떼를 써서 타가지고는 객지에 나가 다 탕진해버리고 예고도 없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재산을 다 탕진하고 유대인의 금기사항인 돼지치기라는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생존의 위기 앞에서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긂어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 이렇게 생각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여기까지가 아들의 귀환 이야기다.
본문 20절에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달려가서 측은히 여기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그 다음날부터 동구 밖에서 아들이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먼발치에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달려 나갈 수 있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동구 밖에서 서성이는 아버지의 모습,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아들을 기다리지 않은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우리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 아들이 자기 갈 길을 찾아갔다고 생각하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노심초사하지 않았다. 연락이 없다고 괘씸해 하고, 아들의 형편을 살피지 못했고, 아들에 대해 막연한 걱정은 했지만 잘 있으려니 하고 이 아버지처럼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았다.
아들에게 사고가 생겨 병원에서 아들과 함께 살던 이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아들이 정말 힘들었는데 아들은 집에 올 생각을 안하고 다른 이를 따라 간 것이었다. 예수님이 들려준 아들은 돼지치기를 하면서 아버지 집을 떠올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는데, 우리 아들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도 집에,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아들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을까? 영성공부를 하던 아들이 부모가 자기를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은 것을 알고 돌아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부모의 기대에 못 미쳐서 돌아오지 못했을까? 서운함이 너무 커서 못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래도 어려울 때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데 왜 우리 아들은 이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병을 얻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을까?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아들이 나간 날부터 동구 밖에 나가 기다렸다면 그 사랑에 감응해 아들이 기꺼이 돌아왔을텐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하나님은 내 잘못을 따지지 않고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둘 때 아들의 모습 즉 재산을 갖고 나가서 다 탕진하고 돼지치기에까지 떨어졌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우리 같으면 화가 났을 텐데 기꺼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시는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다.
다음으로 나를 감동시킨 아버지의 모습은 돌아온 자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역겨운 냄새가 날텐데도 개의치 않고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둘째 아들은 돈을 다 탕진하고 궁핍하게 되었다. 생존하기 위해 돼지치기가 되었는데 유대인은 절대 돼지를 치는 일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돼지치기는 거켱 돼지 가죽을 만지는 것도 부정탄다고 허용되지 않았다. 둘째 아들이 돼지치기가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갔음을 뜻한다. 돼지를 치는 돼지우리는 얼머나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는 곳인지 상상만 해도 더럽다. 돼지기 먹는 주염열매조차 배를 채우지 못한 둘째 아들의 옷은 보나마나 돼지 오물에 절어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아들이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하는데도 아들을 껴안고 볼을 부벼대며 입을 맞춘다. 종들에게 명령하여 손에 반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행동은 아버지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는가를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의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 이게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 앞에서 난 참으로 부끄러웠다. 우리 아들이 처음 집에 왔을 때 황성수설하고, 아빠 엄마를 말도 안 되는 말로 비난하고, 상식이 안통하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고...약도 거부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에 기가 막혀서 언제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절망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지 못했다.
우리 아들이 무의식중에 하는 말은 엄마 아빠가 사회 개혁한답시고 자기들을 돌보지 않았고, 가정에서의 따뜻함을 느끼기 힘들었다고 원망하는 말을 하는데, 미안하기가 그지없었다. 사실 우리 아들이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어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칭찬보다는 꾸중을, 격려보다는 지적을, 강하게 키운다고 품어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엄마나 아빠가 하는 일을 당연히 아들이 지지할 것이라는 착각이 결과적으로 아이를 힘들게 한 것이다. 이 모두가 부모 중심의 이기적 사고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일을 하면서 아이들의 입장은 헤아리거나 묻지 않고 목회나 운동을 하다 보니 정작 우리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고, 그래서 아들이 밖으로 돌다가 큰 상처를 입은 후에야 아버지 어머니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본문의 아버지처럼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를 기뻐하고 환영하기 빨리 나야 할텐데! 하고 걱정하고 집착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기를 기도할 뿐이다.
세 번 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면 우리를 원래의 자리로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 돼지치기까지 떨어진 아들을 종들이나 이웃이 무시하고 질시할까봐 서둘러 자식의 위치를 회복시키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녹아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돼지치기 하다 온 아들의 넝마 같은 옷 위에 새 겉옷을 입힌다. 보통 아버지라면 먼저 넝마를 벗기고 몸을 씻으라고 할 텐데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고, 왜 돌아왔는지,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지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들을 맞아주시고 원래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신다.
어떤 모습이든 자식을 있는 그대로 품고 환영의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모습을 보며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돌아오기만 하면 반갑게 맞아주시고 품어주시는 분이다. 우리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책감으로 가슴 아팠다. 아들에 대한 기대 없이, 상처 입은 아들을 있는 그대로 품으면서 살아있다는 것만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간구한다. 상처로 정신이 혼란스러운 아들을 돌보는 것이 힘이 들지만 젊은 시절 돌보지 못한 아들을 이제라도 할 수 있어서, 그것도 은퇴한 후에 차분히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아들의 돌아옴을 통해서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살고, 판단하는 자세에서 긍정성을 보고,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연민을 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간구한다.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들의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체험할 수 있고 우리 부부가 변화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가 된다면 감사하겠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돌아온 아들을 반기시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모습임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오늘 본문의 앞에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은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하나님이 나선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나님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올 때 본문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를 반기신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받아들여진 것은 조건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에 응답하여 돌아올 때 거기서 구원이 일어난다. 나는 청암교회 교인들도 조건없이 우리를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자식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모로부터 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다. 반대로 부모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자녀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기가 쉽고 잘못을 해도 하나님께 돌아오기가 쉽다고 한다.
아버지의 집으로
A.다니
일단 결심하면 나는 더 이상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가진 것 없이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라 해도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몹시 지쳐 있어 어렵다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집을 멀리 떠나 있는 마음의 고통보다는 훨씬 인간적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맨 끝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집을 떠나 외로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해서 나는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항상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 죄를 묻지 않으시며 항상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임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멀리서 나를 보시고 달려와 나를 얼싸안으시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집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의 태도는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케 해주시고
사랑의 열기로 나를 감싸주십니다.
등불을 밝히고 모닥불을 피우니 나의 귀가가 온 집안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나를 변명하지 않고 죄를 참회하는 마음에서
나의 모든 잘못을 말씀드리려 했으나 아버지께서는 잔치 준비에만 분주하십니다.
형제들도 내 피곤하고 고통스럽던 누더기 옷을 벗겨주고
따뜻하고 기쁜 마음으로 나를 맞이해 줍니다.
그들은 나와 일치하고 그들끼리도 일치하며
우리 함께 아버지 안에 일치하니 이것이 올바른 삶입니다.
자유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집 안에 있는 것이며
개별적이며 전체적인 한 인간의 부분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언제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나와 이웃의 얼굴에서 슬픔을 지워버리고
평화와 기쁨의 분위기를 이루게 해주십시오.
내가 헤매던 죄악의 가시덤불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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