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보내는 삶
한국염
크리스마스를 기쁘게 보내셨는지요? 우리는 어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오늘 2021년 마지막 주일을 맞았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니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해야 하는 때인데도 마지막 주일을 맞습니다. 네 밤을 자면 이해가 가고 2022년이 온다.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청암교회 교우들의 느낌은 어떤가?
지난 일 년은 내 개인적으로 한편으로는 어려운 한해였고, 다른 편으로는 하루하루를 맞는 것에 감사한 한해였다. 매일 새 날을 맞으면서 오늘 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누구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하루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저녁에는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에 감사하며 성서를 수면제처럼 읽으며 잠이 들곤 하였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다가 12월에 접어들어 바울서신을 읽기 시작했고, 순서에 따라 빌립보서를 읽게 되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길목에서 기쁨이 없는 내 삶을 들여다보며 빌립보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기뻐하라는 바울의 말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기뻐하라는 말에 꽂히니 기쁨이라는 말, 기쁨을 주제로 한 찬송가도 새롭게 들어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크리스마스 캐럴도 의미 있게 다가 왔다. 첫 장부터 시작해서 끝장까지 구절구절마다 “기뻐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빌립보서 4장 4절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빌립보서를 처음 읽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런 느낌이 든 것일까? 빌립보서를 처음 읽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자극이 온 것일까? 왜냐하면 내 삶에 기쁨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감사는 마음으로 느낀 것이 아니라 머리로 느낀 것이었다. 감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머리로 하다 보니 그 감사가 기쁨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는 로마서와 함께 사도 바울이 에베소 감옥 안에서 쓴 마지막 편지다. 언제 처형이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빌립보 교회를 방문해서 교인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희망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감옥살이 속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기쁨이 가득한 내용으로 편지를 썼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여러분 모두를 마음에 두고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바울의 편지를 읽으면서 청암교회 교인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전임 목회자 이었고, 지난 2년 간 한 달에 한 번 씩 설교를 하는 목회자였지만, 청암교회 교인들 모두를 마음에 두고 간구한 적도 없고, 더더욱 기쁨으로 간구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감옥에 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음을 기뻐한다. “ 여러분이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바울은 곧 자신이 순교를 당하게 될 것을 내다보면서도, 자기는 기뻐하고 있으니 빌립보 교인들도 함께 기뻐하라고, 편지 전반에 걸쳐 기뻐하도록 주문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기뻐하라!”가 마지막 유언인 셈이다. 유언이 “기뻐하라!”라니.
이 편지를 읽으면서 전율이 왔다. 어떻게 죽음을 앞둔 감옥 속에서 이렇게 기뻐할 수 있고, 교인들에게도 기뻐하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으로서 유대 크리스천을 박해하러 가다가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에게서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선포자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바울은 이후 25년 동안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 로마제국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박해를 받아 숱한 고생을 하였다. 고린도후서 11장 23-29절에 보면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수고가 잘 드러나 있다. 수차례의 감옥살이, 39번 씩 곤장을 맞은 것이 다섯 번이었고, 채찍과 돌로 맞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에 파선을 당해 망망대해에 떠다녀야 했고, 굶주림과 헐벗음에 시달렸고, 죽을 뻔한 위험도 여러 번 당하였다. 마침내는 로마에서 바울은 처형당하였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로 이송되기 전 에베소 감옥에 있을 때 쓴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병든 몸으로,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날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지금도 감옥이라면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먹는 것,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편하지 않다. 지금은 감옥에 있어도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해서 많이 좋았졌지만, 로마 치하 감옥은 더 열악했을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석방될 날을 기대할 수 없고 로마로 이송되어 죽을 운명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 빨리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서 감옥을 나가기를 소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고통으로 보지 않고 매일 기뻐하고 있으며,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나는 우리 시대에도 이런 분들을 만났다. 우리 시대의 민주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던 문익환, 안병무, 문동환, 서남동 등 목사님들은 감옥에서 바울이 쓴 빌립보서를 읽으며 ‘기쁨의 신학’을 발견했다. 그 분들은 감옥에서 겪는 고통을 통해 민중의 고통과 함께 하는 하느님을 만나고 민중신학자가 된 것이다. 히틀러 시대 독일 저항 신학자 본회퍼 목사님도 테겔 감옥 안에서 독일 교인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선한 능력을 믿고 기쁜 새해를 맞이하라고 인사를 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울로 하여금 기쁨의 신앙을 갖도록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뒷부분에서 그 대답을 찾았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비결, “나에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믿음으로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것까지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나 그가 편지를 써서 보낸 교회에 기뻐하라고 하면서 강조한 말이 하나가 있다.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이다. “주님 안에서”가 바울의 믿음과 행동의 핵심이었다. 바울의 편지들에서 바울은 항상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바울의 정체성이다. 주님 안에서 바울은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주님 안에서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다. “주님 안에서!”
이렇게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바울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자신이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목표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나는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2021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2021 송년예배를 드리면서 죽음 앞에서, 마지막 생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친구로 찾고 기쁘게 삶을 마친 한 신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송년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 보고자 한다. 바로 이태석신부 이야기다.
이태석신부는 남수단 톤즈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간 분이다. 그는 군의관 생활을 하던 중 삶의 방향을 바꾸어, 불우한 청소년들을 교육하며 신앙여정을 도와주는 살레시오회에 입회해서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케냐 나이로비에서서 선교체험을 하던 중 톤즈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신부를 만나 톤즈로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 그는 처음 톤즈에서 의술만 믿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와 선교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 먼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 이태석이 사랑의 선교사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2001년 12월에 그는 몇 년 동안 방문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톤즈에 뼈를 묻는 선교사가 되겠다며 소속 관구도 동아프리카 관구로 옮겼다. 이곳 톤즈에서 그는 동정이 아닌 사랑으로 내전 와중에서 진료실을 열고, 학교를 세우고, 말라리아, 콜레라와 싸우며 브라스 밴드를 만들고 톤즈 아이들의 인사말 ‘안녕’을 뜻하는 “슈크란 바바‘를 염원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다가 암에 걸렸다.
한국에 잠시 다니러 와서 검진 결과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함암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기 힘들어졌다. 항암 치료가 계속되면서 그의 체력은 점점 약해져 갔고 정신적으로 약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절망감이 심해졌다. 자신이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직 톤즈에서 해야 될 일이 많은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그는 원망이 생겼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화도 났고, 영적 투쟁의 계곡으로 떨어짐을 느꼈고, 무력감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이태석신부는 평정심을 회복, ”Everything is good!" 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2010년 1월 14일이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은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태석신부가 선종한지 10년이 되는 이해에 이태석신부 기념사업회에서 ”톤즈에서 빛으로 신부 이태석“이라는 책을 내었다. 그 책에 244쪽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오늘! 한동안 잊고 지내던 톤즈의 친한 친구 하나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설레는데…. 왜 그리 깡그리 잊고 살았는지? 너무 보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그 친구가 내 곁에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 바로 주님이시다. 톤즈에 처음 막 도착했을 때 충격으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멍하니 있을 때….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함께 있지 않느냐!” 며 위로해주시던 병실 안의 바로 그 주님…….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에 허덕이는 그곳 사람들의 중간에서 항상 떡 버티고 계셨던 바로 그 주님……. 그곳의 가장 버림받은 이들의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괴로워하시던 바로 그 주님……. 죽어가는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도 가진 것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나의 두 손을 어마어마하게 섭리로 가득 채워주셨던 바로 그 주님……, 톤즈에 폭탄이 떨어질 때, 나와 함께 땅바닥에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바로 그 주님……. 힘들다는 핑계로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까지 잊어버렸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톤즈라며 자주 얘기하던 친구였는데. 모든 어려움을 함께 지낸 만큼 그 우정 또한 보통 두터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 친구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설레는데……. 왜 그리 깡그리 잊고 살았는지? 그 우정이 그립다. 그 친구가 그립다. 그 주님이 그립다! 옆에 같이 계심을 느끼면서도 계속 그분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지난 일 년 동안 힘들 때마다 그 친구가 옆에 계신 걸 알면서도 자꾸 동행해 달라고 기도하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이태석 신부의 그 신앙이 부러웠고, 나도 그리스도가 그리워졌다. 언제나 그리스도가 옆에 계심을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었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바울의 그 믿음이 간절해졌다.
2021년을 지내면서 나도 여러분에게 바울처럼 이런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청암교회 여러분 모두를 마음에 두고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2021년 우리가 그 목표의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2022년 그 길로 나아가십시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으로 계속 나아가십시다.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청암교회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청암교우 여러분, 2021년을 우리 모두 기쁨으로 보내고, 기쁨으로 2022년을 맞읍시다
* 이 글은 2021년 청암교회에서 한 하늘 뜻 나누기다.
'일꾼들의 사색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 (0) | 2021.01.19 |
---|---|
선한 일을 하다 낙심하지 말자 (0) | 2021.01.19 |
새 날을 잉태하는 기다림 (0) | 2021.01.19 |
로뎀나무 아래 (0) | 2021.01.19 |
두 과부의 기름병 (0) | 2021.01.19 |